전세계 애마 일본차, 전기차시대엔 낙오?
블룸버그 "흐름 못 읽고 하이브리드·수소차 고집 … 기존 고객 다른 기업에 빼앗겨"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자동차기업들이 글로벌 자동차시장에서 선도적 입지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전기차 시대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서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최신호에 따르면 테슬라는 판매대수에서 전세계 최고 전기차 제조사다. 중국 비야디와 독일 폭스바겐이 그 뒤를 따른다. 일본 자동차제조사 중 전기차 판매량 상위 20위에 든 곳은 없다. 전기차는 자동차시장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부문이다. 블룸버그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3분기 순수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80% 늘었다. 반면 전체 자동차 판매량은 약 4% 하락했다.
블룸버그NEF 애널리스트 콜린 맥커래처는 "전기차는 자동차시장에서 중요한 부문이 됐다. 현재까지 일본 자동차업체들은 전기차를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주요 자동차업체들은 오래 전부터 전세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보통 미국 신차 판매량의 1/3 이상을 차지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구축했다.
전기차 분야에서 일본차의 부진은 당혹스럽다는 분석이다. 친환경 자동차를 선도한 나라가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이기 때문이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내연기관+모터) 모델 프리우스는 4반세기 전인 1997년부터 시판됐다. 한때 미국 할리우드 스타들이 최고로 꼽은 모델이었다. 닛산은 2009년 순수전기차 리프를 공개했다. 전기차 대중시장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같은 해 미쓰비시도 첫번째 전기차를 출시했다. 2010년 도요타는 테슬라에 투자했다.
하지만 전기차에 대한 일본의 초창기 열정은 곧 시들었다. 판매량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배터리혁명이 서서히 올 것이라고 확신한 탓에,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은 하이브리드 전기차에 집중했다. 그리고 순수전기차보다 더 큰 환경친화적 잠재력을 가진 수소연료전지차 개발에 매달렸다.
도요타는 지난해 9월 성명서에서 "순수전기차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게 올 것"이라며 "우리도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순수전기차로 관심을 한정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도요타는 또 "다각화된 세상이고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시대다. 단 한가지 선택으로 모든 이를 행복하게 만들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연료 가격이 높아지면서 각국 정부가 전기차에 대한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은 전기차를 선택하려는 고객들에게 내놓을 만한 모델이 별로 없는 상황이다. 도요타는 지난해 5월 전기SUV 'bZ4X'를 출시했다. 하지만 서스펜션에 치명적 결함이 발견되면서 6월 판매를 중단했다. 10월 판매를 재개했지만 생산대수를 줄였다.
닛산 최고생산설계자로 전기차 리프를 설계했고 현재는 이탈리아 에우로뻬오 디자인대학교 교수인 이노우에 마사토는 "일본 자동차업계는 전기차 선도기업들을 따라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가전 분야 전철 밟나
전문가들은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이 반도체나 가전기업들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본다. NEC의 메모리반도체와 소니의 워크맨 등은 한때 세계를 호령했다. 하지만 애플의 아이폰 등과 같은 파괴적 혁신 사례에 덜미를 잡혔고 상품화를 넘어선 혁신에 실패했다.
일본 닛폰생명보험 산하 NLI연구소 수석전략가인 이데 신고는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은 이미 뒤처졌다. 선두자리를 되찾는 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자료에 따르면 일본 6대 자동차 제조사들은 2021년 미국 승용차 시장에서 약 40%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 2분기 점유율이 34%, 3분기 32%로 연이어 하락했다. 제너럴모터스(GM)는 지난해 도요타로부터 미국 최고판매 기업 자리를 가져갔다. 지난해 도요타의 미국 자동차 판매량은 9.6% 감소했다. 미국인들이 점차 전기차를 선택하면서다.
S&P 글로벌모빌리티는 지난해 11월 말 보고서에서 "2022년 전기차를 선택한 소비자들은 대개 도요타나 혼다의 기존 고객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내연기관차를 몰았던 고객들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전기차 전환기에 더욱 비중 있는 참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일부 국가들의 자동차 시장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기차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3분기 독일과 영국에서 팔린 신차의 약 15%, 중국의 경우 20% 이상이 전기차였다.
같은 기간 미국의 전기차 판매 비중은 5%에 그쳤지만, 수요는 급증할 전망이다. 지난해 8월 통과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전기차에 대한 다양한 세제혜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중순 기준 글로벌 자동차기업들이 미국 전기차 제조시설에 투자하겠다고 공언한 금액은 280억달러에 달한다. 글로벌 투자은행 제퍼리스는 "도요타가 북미 전기차 전략에서 중대한 오판을 했다"고 지적했다.
수소연료전지차를 개발중인 도요타는 일본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일본정부는 수소가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6월 "2035년 모든 신차는 하이브리드를 포함해 이른바 전기로 구동되는 자동차여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정부와 자동차 제조사들은 순수전기차로의 전환을 망설인다. 일본차가 우위에 선 기존 자동차시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수많은 부품 협력업체와 하청업체들로 구성된 촘촘한 네트워크가 와해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일반적으로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에 비해 부품이 훨씬 덜 들어간다.
자동차 생산은 일본의 가장 중요한 산업 중 하나다. 다국적 비영리기구 클라이밋그룹에 따르면 자동차는 제조업의 20%, 고용의 8%를 차지한다. 도요타는 고용과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내 생산대수를 300만대로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도요타 글로벌 생산량의 약 1/3에 달한다.
일본 금융서비스기업 모넥스그룹의 제스퍼 콜 국장은 "전기차로 전환되면 나고야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해고된다"고 말했다. 도요타 본사와 가까운 나고야는 수많은 부품 제조사들이 둥지를 튼 곳이다.
자기잠식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과거와 달리 전기차는 더 이상 틈새상품이 아니다.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도 현재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도요차는 2030년까지 300억달러를 투자해 30종류의 전기차 모델을 출시하기로 했다. 혼다는 2024년 출시를 목표로 GM과 함께 전기 SUV를 공동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2026년 출시를 목표로 소니그룹과 합작해 프리미엄 전기차를 개발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시장에 전기 SUV 아리야를 내놓은 닛산은 모델을 다양화하기 위해 투자를 늘렸다.
그러나 경쟁기업들 역시 전기차 투자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 GM이 특히 두드러진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애널리스트 존 머피는 "2025년 GM이 테슬라를 앞설 수 있다"고까지 전망한다. GM이 내놓은 전기차는 쉐보레 볼트, 캐딜락 리릭 SUV, GMC 허머 SUV 등이다. 또 올해 여러종의 전기차를 출시할 계획이다.
도요타는 순수전기차가 너무 비싸고 개발도상국의 충전 인프라가 부족해 확산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자동차 리서치기업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미국에서 팔리는 전기차 평균 가격은 약 6만5000달러다. 내연기관차를 포함한 전체 신차의 평균 가격 4만8000달러보다 훨씬 비싸다.
도요타 수석과학자인 길 프랫은 "많은 나라에서 전기차 확산을 견인할 충전 인프라가 부족하다"며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수소연료전지차 등 다양한 전기차가 그같은 시장에선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라고 말했다. 그는 "충전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에선 하이브리드와 수소차가 탄소배출을 줄이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은 지난 수십년 다양한 경쟁력을 구축했다. 브랜드 인지도는 물론 전세계에 포진된 배급·서비스 네트워크는 신생 전기차 제조사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다. 중국 비야디는 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다. 글로벌 고객에게 다가가기엔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하다.
미국 시장조사기업 콕스 오토모티브의 수석애널리스트 미셸 크레브스는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을 무시할 순 없다. 여전히 대단한 역량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기차를 둘러싼 경쟁이 공학적 기술이 아닌, 소프트웨어와 서비스로 집중되고 있기에 일본 기업들이 따라가기 버거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동차평가 웹사이트 아이씨카스닷컴 수석애널리스트 칼 브라우어는 "출발이 늦은 일본 기업들은 전기차 공급업체와 고객들을 알아갈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도요타가 전기차를 생산할 자원과 능력을 모두 갖췄다고 해도,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곡선을 통과해야 한다"며 "다른 나라 자동차 제조사들은 이미 이를 하고 있다. 일본을 앞서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