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소비자 지속가능제품
일일이 수작업 … 전기차 폐배터리 재활용 '분통'
생산단계부터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 확대 필요 … 유럽연합, 원재료 채굴부터 재활용까지 실시간 정보 확인 추진
"전기자동차 폐배터리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배터리팩을 해체해야 하는 데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자동화설비를 도입하고 싶어도 모듈과 팩의 사이즈, 형태가 다 달라요. 게다가 모듈과 팩 방수작업에 사용되는 실리콘류 접착제는 재활용이 되지 않아 별도 분리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어려움이 많죠."
8일 전기자동차 폐배터리 재활용업체 A이사는 이렇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전기자동차 폐배터리는 버려졌다 해도 다시 쓸 수 있다. 재제조 재사용 재활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 가능하다. 폐배터리 잔존수명이 일정 수준(제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약 60% 정도)을 넘으면 원형 그대로 재사용한다. 재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파쇄·분쇄 뒤 재활용한다. 리튬 코발트 니켈 등을 추출해서 양극재(2차전지 구성 요소 중 하나) 제조 등에 사용하는 식이다.
재활용이냐 재사용이냐. 최근 리튬 이차전지를 활용한 전기·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폐배터리 처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어느 방식이든 순환경제(Circular Economy) 활성화를 위해 현장에서 제대로 운용될 수 있도록 정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한 상황이다. 아예 처음 생산단계부터 자원순환성을 고려한 배터리 제품 설계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한국환경연구원의 '순환경제를 위한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 활성화 연구' 보고서에서도 전기자동차 배터리 대여(리스)서비스 실증사업과 같이 신규 비즈니스 모델이 창출되지만 배터리팩 해체 어려움이 재사용과 재활용 비용 상승 등 활성화의 저해인자로 작용하므로 자원순환성을 고려한 배터리 제품 설계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순환경제는 제품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버려지는 자원의 순환망을 구축해 투입되는 자원과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친환경 경제 체계를 말한다. 자원채취→제품생산→소비→폐기로 이어지는 종전 선형경제(Linear Economy)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제품 전주기에 걸친 자원이용 효율성 고려 시스템 필요 =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6일 세종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해를 순환경제 실현의 원년으로 삼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이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순환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폐기물 사후관리 체계에서 벗어나 제품 전주기에 걸쳐 자원이용 효율성과 순환성을 고려하는 시스템을 안착시키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전기자동차 폐배터리에 국한되지 않고 전 제품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에코디자인 당신의 미래: 에코디자인이 제품을 더 스마트하게 만들어 환경을 도울 수 있는 방법' 보고서에 따르면 제품과 관련한 환경영향의 80% 이상이 상품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 그만큼 처음 생산단계부터 순환경제를 고려해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들의 자발성도 중요하지만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한국환경연구원의 '순환경제를 위한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 활성화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자원순환성을 고려한 제품 평가제도들(△순환이용성평가제도 △전기·전자제품 재질·구조 평가제도 △포장재 재질·구조 평가제도)이 서로 다른 법률과 주체에서 분절적으로 운영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제도 간 연계성과 통합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각 제도별로 한정된 평가 품목만이 개선권고 대상이라는 점에서 파급효과에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조지혜 한국환경연구원 자원순환연구실장은 "제도 통합을 논하기에 앞서 제도 간 연계성 측면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순환이용성 평가의 경우 전기전자제품 및 포장재를 모두 대상으로 하는 만큼 전기전자제품(또는 포장재) 재질구조 개선 평가를 통해 문제제품 목록이 도출되면 이를 순환이용성 평가제도에서 후보제품으로 건의해 개선방안을 권고하는 방식도 검토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순환이용성평가제도는 순환이용 저해요소를 평가하고 제조자 등에게 제품 생산단계에서 개선하도록 해 순환이용을 촉진하는 제도다. 평가 대상 제품은 자동차 부품, 토너 카트리지, 페트(PET) 등이다.
전기·전자제품 재질·구조 평가제도는 기업 스스로 재질·구조 개선 여부를 평가하도록 한다.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 대형가전제품과 컴퓨터 내비게이션 등 정보통신 제품 소형가전 등이 해당한다.
포장재 재질·구조 평가제도는 포장재 재질·구조 및 재활용 용이성을 평가해 제품 설계·생산단계부터 재활용 용이성을 고려하도록 유도한다. 종이팩 금속캔 유리병 등이 평가 대상이다.
◆2030년 전기차 폐배터리 42만개 발생 =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와 함께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EPR은 재활용이 가능한 폐기물의 일정량 이상을 재활용하도록 생산자에게 의무를 부여하고, 재활용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실제 재활용에 드는 비용 이상을 생산자로부터 징수하는 제도다.
전기자동차 폐배터리 재활용업체 A이사는 "폐배터리도 중요한 자원이니 손실되지 않도록 관리가 필요하다"며 "정책적인 제도 도입을 통해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폐배터리가 불법 매립되거나 다른 나라로 유출되지 않도록 배터리 유통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관리체계인 EPR 도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월부터 정식 운영 중인 한국환경공단의 미래폐자원거점수거센터에서 평가 된 전기자동차 폐배터리 중 재사용 비중은 68%, 재활용은 31%(지난해 12월 31일 기준)다.
미래폐자원거점수거센터에서 직접 재사용이나 재활용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회수부터 민간 공급에 걸친 전기자동차 폐배터리 자원순환 관리체계가 미비한 현실을 보완하기 위한 거점 인프라 역할을 한다.
물론 미래폐자원거점수거센터의 평가 물량이 전체 폐배터리 처리 현황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용 후 배터리 처리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는 있다.
제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10~15년 사이에 전기자동차 배터리 성능 저하가 나타난다. 재사용 비중이 높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재사용한 폐배터리를 재활용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기자동차 폐배터리 물량 자체가 늘어나는 점도 무시 못한다. 한국환경연구원에 따르면 2030년까지 국내에 전기자동차 362만대가 보급될 경우 폐배터리는 42만개(누적)가 발생할 전망이다.
◆환경부 "EPR에 포함시킬지 검토 중" = 10일 장용철 충남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는 "전기자동차 배터리 산업이 앞으로 중요한 먹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만큼 순환 체계를 잘 구축할 필요가 있다"라며 "자동차의 경우 EPR 대상 품목이 아니지만 핵심 부품이 들어가 있는 배터리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또 "배터리 제조사나 전기자동차 생산자 등 재활용 목표를 부여할 대상을 누구로 할지가 정교하게 논의돼야 제도 도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며 "유럽연합(EU)의 경우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폐기할 경우 제조사가 배터리를 재활용해야 한다고 명시는 했지만 아직 현장에서 명확하게 가르마가 타지지는 않은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도 향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유통망 구조 등을 고려해 재활용 책임을 분명히 하는 등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U는 2026년부터 이른바 '배터리 여권' 제도를 도입한다. 배터리 여권이란 배터리 원재료 채굴부터 재활용까지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개방형 전자 시스템을 말한다. 나아가 EU는 배터리 제조 시 의무적으로 재생원료를 일정비율 이상 포함하도록 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순환경제 활성화는 물론 배터리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심산이다.
10일 환경부 관계자는 "전기자동차 폐배터리를 EPR 대상 품목에 포함시킬지 여부는 검토 중인 사항"이라며 "이해 당사자 등 관련 의견들을 폭넓게 들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은 최근 한국전지산업협회 한국환경공단 등과 배터리 얼라이언스를 구성해 사용 후 배터리 관리체계 마련을 논의 중이다.
9일 한국전지산업협회 관계자는 "킥 오프 회의(프로젝트 시작을 알리는 성격의 회의)를 몇 차례 한 상황"이라며 "의견 수렴 단계로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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