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노동자 갑질보고서

"정화조 똥통에 들어가래요" 경비원 갑질보호법 무색

2023-03-21 11:04:49 게재

입주민·관리소장 '괴롭힘'에도 신고도 못해 … 직장갑질119, '다단계 간접 고용, 초단기 근로계약기간' 때문

#. 지난 14일 서울 강남 A아파트에서 10여년간 근무해온 70대 경비원 박 모씨가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관리소장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19년부터 경비반장으로 일하던 그는 1주일 전 일반경비원으로 강등됐다. 9일 같은 아파트에서 근무했던 70대 청소노동자 김 모씨가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전날 아파트 청소용역업체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비노동자 박씨는 유서에서 "소장이 미화원 죽음의 책임도 져야 한다"고 썼다.
2020년 5월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에서 아파트 입주민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최희석씨 사건이후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라는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이 개정됐지만 실효성 없다는 지적이다. 간접고용, 초단기 근로계약으로 입주민과 용역회사의 갑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박씨가 갑질 가해자로 지목한 관리소장은 A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로부터 아파트 관리를 위탁받은 B업체 소속이고, 박씨는 B업체가 경비업무를 위탁한 C경비업체 소속이었다. 박씨에 대한 관리소장의 갑질은 같은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아 박씨는 관리소장을 신고할 수조차 없었다.
16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2023 경비노동자 갑질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지난해 10월 경비노동자 4명, 경비반장 1명, 청소반장 1명, 관리소장 1명, 기계·전기반장 1명, 기전기사 1명 등 9명의 공동주택 노동자들을 심층면접한 결과가 담겼다. 이들은 모두 50세가 넘었으며 경비노동자는 모두 65세 이상이었다. 청소반장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남성이었다.

구호 외치는 경비노동자│관리자의 '갑질'을 폭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이 일했던 서울 강남구 A아파트 앞에서 17일 아파트노동자 서울공동사업단,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본부 관계자 등이 추모 기자회견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입주민이 자녀에게 '공부 잘해라. 못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대놓고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더 그런다. 40~50대의 남성·여성이고 초등학교 자녀를 둔 사람들이다."(경비대원 D씨)

보고서에 따르면 면접조사 노동자 9명 모두 입주민으로부터 △고성·모욕·외모 멸시하는 표현 △천한 업무라고 폄훼하는 경우 △업무상 적정범위를 벗어난 부당한 업무지시와 간섭 등 갑질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노동자 9명 중 6명은 극단적 선택을 한 박씨와 마찬가지로 업무 외 부당한 지시를 수행하는 등 '원청 갑질'을 경험했다.

#. "2021년 7월 정화조가 여름철 무더위로 인해서 끓어올라 청소가 필요했다. 관리소장이 경비대장에게 지시하고 다시 경비대장이 경비원에게 청소를 지시했다. 처음에는 어디인 줄도 모르고 작업하라고 해서 장화도 안신고 작업했는데 알고 보니 정화조 작업이었다. 분뇨가 발목까지 찼다. '똥독'이 올라서 2주 넘게 약을 바르며 치료했다."(경비대원 E씨)

입주민들과 관리소장은 단기계약 해지를 이용해 공동주택 노동자의 교체를 요구하는 경우가 잦고 근로계약이 갱신되지 않는 상황도 발생했다.

#. "여의도 아파트에서 젊은 입주민에게 차를 좀 빼달라고 요청했다가 '경비 주제에 무슨 말을 하냐'며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해서 그만두게 하겠다'고 협박한 경우가 있었다."(경비대원 F씨)

#. "2021년 10월부터 들어온 경비용역회사의 경우 3개월마다 (입주민) 민원이 있는 경비대원들을 내보냈다."(경비반장 G씨)

이렇게 입주민에게 교체요구, 직접 해고를 종용받은 노동자가 4명이었다. 실제 동료가 입주민의 민원으로 근로관계가 종료됐다고 응답한 노동자가 2명 있었다.

하지만 입주민과 용역회사의 갑질에 신고 등으로 대응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2명뿐이었다. 대부분 해고의 두려움과 해결 능력이 없어 대응을 포기했다.

직장갑질119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비노동자 박씨는 계약해지를 당할 수 있다는 극심한 고용불안 때문에 갑질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공동주택 노동자의 실질적 사용자여도 직접적 근로계약 관계를 맺지 않는 입주자대표회의가 경비 인원을 삭감하거나 용역업체가 변경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경우다. 용역회사가 입주자대표회의와 체결하는 용역계약 갱신 또는 연장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입주민의 갑질을 참으라고 지시하는 사례도 있었다.

#. "입주자대표회장의 관리비 미집행으로 6개월 넘게 급여가 안 들어올 때도 '청소를 흠 잡히지 않게 하라'고 했다."(청소반장 H씨)

◆1개월 단기 근로계약서 체결도 = 직장갑질119는 경비원 등 공동주택 노동자가 입주민과 용역회사의 갑질에 노출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간접고용 구조와 초단기 근로계약기간을 꼽았다.

조사대상 9명 가운데 경비회사에 고용된 경비원 5명 중 4명은 3개월 단위로, 1명은 1개월 단위로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청소회사와 관리회사에 고용된 미화반장과 기전실 및 관리소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는 1년 단위의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직장갑질119는 "짧은 근로계약기간은 노동자에게 소속감이 생길 시간을 주지 않고, 입주민은 공동주택 노동자와의 유대감을 형성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며 "공동주택 노동자가 노조를 결성해 대응해도 원청인 입주자대표회의에 책임을 지라는 요구는 멀고 어려운 길"이라고 설명했다.

직장갑질119는 공동주택 노동자를 갑질로부터 보호하는 방안으로 △실효성 있는 공동주택 노동자 보호 체계 마련 △직접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주민 및 입주자대표회의에 대한 책임 강화 △직접 고용구조로 전환 등을 제안했다.

특히 공동주택 노동자 보호 체계 마련을 위해 △용역회사 변경 시 고용승계 의무화 △입주자 대표 회의의 책임 강화(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도급인으로 확대) △갑질하는 입주민 제재 △입주민 갑질에 대한 입주자대표회의·관리사무소의 보호 체계 마련 등을 제시했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 노동자 보호 못해 =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으로는 입주민이나 원청업체 관리소장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76조의2) 적용 대상을 입주민 원청회사 등 특수관계인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임득균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3개월 6개월 단위의 초단기 근로계약, 관리회사에 경비회사까지 있는 다단계 고용구조, 다수의 입주민·관리사무소 등 수많은 갑들로부터 업무지시를 받는 구조에서 경비노동자들은 너무나 쉽게 갑질에 노출된다"며 "2014년, 2020년에도 갑질로 인해 경비노동자가 사망했지만 갑질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임 노무사는 "입주민·관리소장 등의 갑질 방지 및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고용불안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만 갑질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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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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