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칼럼

부가가치세는 죄가 없다

2024-04-08 13:00:01 게재

자본주의 경제와 조세국가 역사가 짧은 한국이 꽤 앞서 정착시킨 세금제도가 있다. 1977년 도입해 반세기를 향해가는 부가가치세다.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지만 소득세 법인세에 이은 3대 세목으로 자리잡았다. 한국보다 20년 늦은 1997년,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하는 일본에 한수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부가가치세가 4.10 총선 공약 심판대에 올랐다.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부가가치세 감면 공약을 연거푸 내놓았다. 먼저 출산육아용품과 라면 등 일부 가공식품의 세율을 10%에서 5%로 낮춰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어 간이과세 적용 기준을 현행 매출 8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상향 조정하겠다고 공약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토론회에서 1억4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했는데 한 위원장은 한술 더 떴다.

지난해 경기가 부진한 데다 이런저런 감세조치로 56조4000억원 세수펑크가 발생했다. 올해도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완화 등 감세방안이 줄줄이 대기중이다. 한 위원장 공약대로 일부 품목 세율을 절반으로 낮추고 간이과세 기준을 높여 감면대상을 늘리면 세수감소폭이 수조원에 이를 게다.

저출생 고령화로 인한 생산연령인구 감소 등 인구구조 변화와 기후위기, 산업구조 변화는 재정의 역할을 증대시키면서 증세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지난해 말부터 다양한 감세정책을 쏟아냈다.

세율이 10%인 일반과세와 달리 업종에 따라 1.5~4.0%를 적용하는 간이과세는 영세 소상공인의 세금 납부를 편하게 하고 부담도 덜어주자는 취지다. 하지만 감세 대상으로 꾸미려고 매출을 축소하는 등 공평하지 않다. 월급에서 소득세를 원천징수당하는 근로소득자와의 과세 형평성도 문제다.

세금 근간 흔드는 총선 표몰이 감세 공약

부가가치세는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물건이나 서비스 가격에 10%를 얹어 낸 돈을 사업자가 맡아두었다가 대신 납부하는 구조다. 매해 1월, 7월 두차례 신고 납부하는 일반과세자와 달리 간이과세자는 1월 한번 신고 납부에 그친다. 이처럼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세금을 대납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예외를 두는 간이과세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세금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간이과세 매출 기준은 코로나19 충격이 컸던 2021년 기존 4800만원에서 20여년 만에 8000만원으로 상향 조정됐다. 이것이 3년 만에 1억원을 넘어섰다. 윤 대통령이 거론하자 정부가 법이 아닌 시행령을 바꿔 조정할 수 있는 상한 1억400만원으로 올렸다.

한 위원장 공약대로 2억원으로 올리려면 국회에서 부가가치세법 개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2억원이면 월평균 1660만원 매출을 올리는 사업자다. 이를 영세소상공인으로 볼 수 있는가. 영세사업자 부담 완화는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등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다.

물가가 오르는 데도 정부가 간이과세 기준을 유지한 것은 부가가치세 납부 예외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간이과세 기준을 급격히 높이면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않는 사업자가 늘어나 일반과세자도 세금계산서를 못 받게 되고, 사업자의 매입 포착이 어려워져 ‘근거과세’ 원칙이 위협받는다.

사실 부가가치세는 세율을 낮추거나 감면을 확대할 게 아니라 합리적 손질이 요구된다. 국책 연구기관과 전문가들이 부가가치세율 인상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회입법조사처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저성장·초고령화사회 대비책으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국가부채 관리 차원에서 제안했다.

부가가치세가 인상 대상으로 꼽힌 것은 47년째 10% 세율로 낮고 경직돼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부가가치세율(19.3%)의 절반 수준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프랑스는 기본세율 20%에 경감세율을 10%, 5%, 2.1%로 세분화했다. 식당 안에서 음식을 먹으면 10%인데 주문한 음식을 포장해 가져가면 5.5%를 매긴다.

문제 많은 소비자 세금대납 예외

우리나라 부가가치세가 성공 사례로 꼽히지만 속상처가 적지 않다. 현행 기준 8000만원 매출로도 간이과세자가 200만명이다. 그중 상당수는 매출을 축소 신고해 탈세하고 있다. 7월부터 기준이 1억400만원으로 올라가면 50만명이 추가된다. 면세 범위가 너무 넓은 것도 문제다.

세금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진전시켜야지 퇴행해선 안된다. 선거 표몰이 용도로 세금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는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이참에 제 이름값하게 정밀 손질하자. 현재 면세인 의료보건업과 금융서비스 분야 등을 과세 대상으로 돌리자. 이들 업종에서 세금계산서를 확실히 주고받으면 소득세와 법인세 징수도 늘어나는 등 과세 기반이 확충된다. 탈세혐의가 짙은 특정 업종에 대해선 부가가치세액을 소비자가 직접 납부하도록 바꾸자. 이렇게 해서 늘어난 세수를 복지사회로 가는 길에 쓰면 국민도 납득할 것이다.

가천대 겸임교수 경제저널리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