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1%의 생존이 99%의 생존에 우선한다’는 이상한 확신

2024-08-30 13:00:04 게재

1.

수(數)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꽃이라고 하지만, 잘못 적용하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마비시키는 마취제가 될 수도 있다.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이라는 옥스퍼드의 철학자가 ‘실존적 위험 예방을 세계적인 우선 순위로’라는 논문에서 들고 나온 수의 논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행성이 최소 다음 억년 동안 거주 가능할 것이며, 최소 일억명의 사람이 지속 가능하게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최소 1016개의 인간 수명이 가능하다. … 그러나 의미 있는 수는 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지가 아니라, 총계로써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후손의 수이다.

현재의 우주론적 추정을 기반으로 하는 미래 접근 가능 우주에서의 생물학적 인류 존속의 하한은 1034이다. 미래의 마음이 주로 생물학적 신경망 하드웨어가 아닌 컴퓨터 하드웨어에 구현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다른 추정은 인간 뇌 에뮬레이션 존재의 존속기간을 1054년으로 하한을 제공한다.

덜 보수적인 가정을 하면 미래 문명이 알려진 물리학의 절대 한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때(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술을 사용), 계산과 메모리 저장이 가능한 양과 실현 가능한 주관적 경험의 년수에 대해 극단적으로 높은 추정치를 얻게 된다.

심지어 이러한 추정치 중에서 우주 정복과 소프트웨어 마인드의 가능성을 전혀 무시하는 가장 보수적인 기준을 사용하더라도, 실존적 재앙으로 인한 예상 손실이 (이후 1억년 간 지구에 존재할) 1016명의 인간생명의 가치보다 막대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의 승수 증가는 마술과 같다. 100조(1014)가 1000조(1015)로 되면 10의 승수가 하나 더 붙은 것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 증가 폭은 999조다. 0 하나씩 더 붙을수록 가속적으로 까마득해진다. 그런데 1034~1054년 이후라니, 그보다 더 먼 미래라니. 그 수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실감은 마비되어 사라져 버린다.

문제는 보스트롬이 그렇듯 까마득한 시간 안에 존재할 인간의 수를 ‘예상 손실’이라는 이름으로 가치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술의 2단계다. 십의 몇십승이라는 까마득한 시간 단위에서 산출된 인간(또는 AI 인간)의 수는 현재의 ‘고작’ 몇십억(109에 불과하다)의 인류의 수보다 물론 막대하게 크다. 보스트롬은 수의 이러한 막대한 크기 차이를 윤리적 가치의 크기 차이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무한한 미래 시간까지 존재할 인간 수 전체에 비하면 지금 살아있는 인간의 수의 가치는 너무나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실로 마술적인 결론이다.

잠깐만. 이 결론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와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현재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실존적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화석에너지 문명을 재생에너지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 인류의 사활을 건 관건적 주제가 되고, 그 전환에 정책과 투자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보스트롬의 사고법에서는 ‘실존적 위험’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앞으로 최소한 1억년 이상 이후에 인류가 지구를 탈출해 우주로 진출할 준비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현재의 기후위기에 대한 인류의 지지부진한 대응 수준을 보면 머지않아 곧 인류의 상당수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스트롬에게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기후위기 예방은 우주 진출 준비보다 결코 우선적인 일이 될 수 없다. 설사 기후위기로 이후 몇백년 동안 인류의 90%가 사망하게 될 것이 확실하게 되더라도 그렇다. 우주 진출의 먼 미래 준비에 집중하는 10%의 생존이 더욱 중요하다.

90%와 10%가 아니라, 99%와 1%라고 상정해도 마찬가지다. 앞서 인용의 바로 앞에 보스트롬은 옥스퍼드의 선배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이 1980년대에 썼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파핏은 묻는다. 다음 세 가지 중 무엇이 가장 나쁜가?

1. 평화.

2. 세계의 기존 인구의 99%를 죽이는 핵전쟁.

3. 100%를 죽이는 핵전쟁.

2는 1보다 나쁘며, 3은 2보다 나쁘다. 이 두 차이 중 어느 것이 더 큰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1과 2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2와 3 사이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고 믿는다. 지구는 최소 다음 일억 년 동안은 거주 가능할 것이다. 문명은 몇 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가 인류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이 몇 천년은 문명 인간 역사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2와 3 사이의 차이는 따라서 이 작은 부분과 나머지 역사 전체 사이의 차이일 수 있다. 우리가 이 가능성 있는 역사를 하루로 비교한다면 지금까지 발생한 일은 단지 일초의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지금 당장은 인류의 99%의 죽음이 더 큰 사건 같아 보이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남은 1%가 더욱 중요하다.

보스트롬은 파핏의 논리를 모방하되 그 의미를 비틀어 증폭시켰다. 지구에서 생존 가능할 1억 년을 넘어 훨씬 더 먼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10⁳⁴년, 10⁵⁴년 아니 그보다 더 먼 이후까지의 미래 인류를 고려해야 한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오늘날의 기후위기 대응은 더더욱 하찮은 문제가 된다. 인류에게는 기후위기 대응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탈출 이후의 먼 미래를 준비하고 우주에서도 생존 가능할 인간 변형의 기술 개발에 전력하는 일이다. 설사 기후위기로 몇백년 안에 인류의 99%가 사망하더라도 우주 진출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먼 미래의 준비에 매진하는 1%의 생존이 더욱 중요하다.

2.

이런 끔찍한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우주 만물의 기본원리는 오늘날에나 무한한 미래에나 불변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에서의 인간 조건과 무한한 미래에서의 인간 조건을 동일 논리로 추론한다. 여기서 인류 1%의 생존을 확실하게 담보해야 할 선택이 인류 99%의 사멸을 방지하기 위한 선택보다 압도적으로 ‘윤리적’이라는 이상한 계산과 괴이한 확신이 나온다. 탁월한 1%의 생존이 평범한 99%의 생존보다 더 가치있다는 괴이한 파시스트 윤리가 탄생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막대한 척도를 동일성으로 묶어내는 이 ‘불변의 법칙’을 의심해야 한다. 먼저 척도는 그것이 적절히 작동하는 각개 영역들로 구분해야 한다. 뉴튼 역학이 작동하는 척도 영역과 빛의 속도와 중력이 작동하는 거시적 상대성이론이 작동하는 척도 영역은 다르다. 양자역학이 작동하는 미시적 척도 영역도 물론 다르다. 수학-물리학의 척도와 역사학-윤리학의 척도 역시 다르다. 자연계든 인간계든 우주 자체든 실제 현상은 이러한 여러 척도 영역의 맞물림 속에서 발생한다. 그 맞물림 속에서 변화와 생성이 일어난다.

보스트롬의 우주에는 그런 변화와 새로움에 대한 고려가 없다. 모든 것이 미리 다 결정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법이 있기에 그는 인류사 전체가 어느 미래 초지성이 설계해 놓은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부단한 생성과 변화에 대한 창조적 대응의 역사였지 미리 결정된 대본에 따라 산 꼭두각시의 역사가 아니었다.

우주의 역사에 영구불변의 법칙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근거 없는 것 아닐까? 우주 만물은 시간 속에서 변한다. 이전 우주와 이후 우주 역시 그렇다. 이 원리야말로 유일하게 영구불변일 것이다. 이를 확고하게 입증하는 과학이 진정한 미래의 과학일 것이다.

김상준

경희대교수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