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남국의 낙원 팔라우에 23개 사업 개척했어요"
한파산업개발-골든 퍼시픽 벤처 하 순 섭 회장
남태평양은 인간의 상상력을 담아내는 거대한 도화지다. 붉은 태양이 작열하는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그림 같은 산호섬들과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울창한 정글, 야자수 그늘이 드리운 황금빛 모래 해안,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군무를 추고 있는 미지의 푸른 바다…. 괌과 사이판의 남서쪽에 작은 섬나라 팔라우 공화국이 자리하고 있다. 무지개가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신비로운 남국의 낙원이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팔라우에서 40여 년 동안 자신의 삶을 개척해 온 한 한국인이 있다. 팔라우 경제를 주무르는 10대 기업인 중 하나인 하순섭(73)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 회장은 지금 종합건설·유통·호텔사업을 하는 한파산업개발(Hanpa Industrial Development Cooperation)과 부동산·레저사업을 하는 골든 퍼시픽 벤처(Golden Pacific Venture) 등 두 개의 회사를 중심으로 건설업과 부동산개발, 호텔, 관광, 무역, 슈퍼마켓 등 모두 23개 분야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팔라우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업종에 대한 허가권을 지니고 있다. 그가 올리는 연간 매출 500만 달러는 팔라우 국가 예산의 10%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다. 하 회장이 부동산 개발을 위해 사들인 땅만 해도 도심 노른자위 1만2000㎡을 포함해 30만여㎡나 된다.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질긴 근성으로 텃세가 세기로 유명한 팔라우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는 임기 4년의 대통령 경제고문을 두 번째 맡을 정도로 팔라우 사회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팔라우는 340여개나 되는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면적을 다 합쳐봐야 거제도의 1.2배 정도밖에 안 된다. 인구는 2만 명 남짓. 팔라우의 최대도시는 경제수도 격인 코로르이다. 최대도시라고 해야 기껏 인구 1만 여명 정도가 몰려 사는 작은 타운이다. 코로르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로 양편으로 호텔과 레스토랑, 슈퍼마켓, 기념품점 등이 올망졸망 들어서 있다.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로 유독 납작해 보이는 1층짜리 건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붕은 낮았지만 건평은 아주 널찍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전면에 커다란 태극문양과 함께 '한파마트, HANPA MART'라고 쓰인 한글과 영어 겸용 간판이 붙어 있었다. 마트 안은 한국의 여느 슈퍼마켓과 똑같은 모습이다. 한국산 과자류와 식료품들이 정갈하게 진열돼 있다. 냉장고엔 각종 청량음료와 소주, 막걸리, 냉동만두 등이 가득 들어있었다. 팔라우에서는 한국식품을 취급하는 유일한 곳이다.
건물의 측면으로는 'Hanpa Hardware'라는 영문 간판이 걸려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눈어림으로 마트보다 열배 이상 넓어 보이는 매장이 펼쳐진다. 각종 농기구와 공구, 페인트, 시멘트, 철물, 건축자재들이 일목요연하게 진열돼 있었다. 물자가 귀한 작은 섬나라에서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 중국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과 소파에 앉아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이 탁자 위에 지적도와 설계도면 등을 여러 장 펼쳐놓고 설명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도 잘 아는 것처럼 요즘 팔라우에 중국인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어요. 비행기 표와 호텔 방을 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이곳에 호텔을 짓는다면 5~6년이면 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회사가 소유한 이 땅은 팔라우 도심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금싸라기 땅입니다. 호텔이 들어서기에 아주 적합한 위치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호텔을 지을 만한 부지가 없어요. 지난 1년 사이 당신네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와 요지의 땅들을 마구 사들였거든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설명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하 회장이었다. 하 회장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이들은 중국인 투자자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중국 광둥에서 라이온스 클럽 회장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팔라우의 관광객들을 겨냥한 호텔사업의 경제성을 타진하기 위해 이곳 터줏대감인 하 회장의 자문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 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희는 23개 사업허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가령 호텔을 지을 경우 각종 목재와 철근 등을 공급하는 건축자재상과 콘크리트 석재를 생산하는 석산공장에서부터 인테리어 공사, 건설인부를 공급하는 인력송출업무까지 회사 자체에서 일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체 공정을 진행하는 데 외부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는 거지요. 그만큼 공사단가도 낮아지고, 공기도 단축시킬 수가 있지요."
하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난 중국인 투자가들이 궁금한 점들을 이것저것 물었다. 마침내 서로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서자 거리엔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 회장과 중국인들 사이엔 이미 저녁식사가 예정돼 있는 듯했다. 하 회장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국식당이었다. '아리랑' 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면서 하 회장이 말했다.
"이 곳도 한때 제가 운영하던 식당입니다. 원래 식당을 '아리랑'과 '한국관' 이라는 두 곳을 했어요. 제가 건설업과 호텔업을 시작할 수 있는 종자돈을 마련한 곳입니다. 다른 사업들이 커지면서 식당일은 2009년 모두 접었어요."
중국인들과의 저녁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팔라우 투자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잘 정리됐기 때문이었다. 등심과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연신 건배를 외치며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셨다. 평소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던 하 회장도 젊은 중국인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잔을 비워냈다. 70대 중반의 노인치고는 대단한 주량이었다. 하 회장이 해병대 장교 출신에다가 월남전까지 갔다 왔다고 하더니 그 깡이라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저녁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설 즈음엔 빈 소주병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 회장의 집은 아리랑 식당에서 걸어서 3~4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쇼핑센터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등이 우르르 몰려 있는 코로르의 한 복판, 올망졸망한 건물들 가운데 제법 우뚝한 5층짜리 빌딩이 'Palau Paradise Hotel' 이라는 네온사인 간판을 번쩍이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 명동의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땅 1500㎡를 차지하고 있는 호텔이었다.
"제 손으로 직접 지은 호텔입니다. 객실 스무 개 밖에 안 되는 작은 호텔이지만 매년 고객들로부터 최고 등급의 평가를 받고 있어요. 시내 한 복판에 있기 때문에 쇼핑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데 우리 호텔만큼 편한 곳이 없지요. 5층은 저희 부부와 아들, 며느리, 손자가 함께 사는 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니어처처럼 생긴 작은 요트들이 어미 닭의 품을 파고든 병아리들처럼 옹기종기 정박해 있었다. 검은 먹물처럼 잔잔한 밤바다는 별처럼 반짝이는 항구의 불빛을 하얗게 반사한다. 선창가에 '드롭 오프(Drop Off)'라는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각국의 언어들이 중얼중얼 피어오른다. 팔라우 남서쪽에 위치한 말라칼 섬의 네코마린 선착장의 밤풍경이었다.
하 회장은 팔라우에서 40여년 사업을 하면서 두터운 인맥을 쌓았다. 응에이켈 에티피손 전 대통령과 존슨 토리비옹 전 대통령과 조슈아 코시바라 전 상원의장 등 정치인 뿐 아니라 장차관들과 대학학장 등 팔라우를 좌지우지 하는 명사들과 두루 친교를 쌓았다. 하 회장이 몇 번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벗어날 수 있었던 던 건 바로 인맥의 힘 덕분이었다.
첫 번째 고비는 한파산업개발 설립허가를 신청했을 때 찾아왔다. 하 회장은 노보르 킹의 이름으로 돼 있는 식당과 농장을 자신의 이름으로 정식 등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업체가 더 커질 경우 소유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회장은 1984년 12월 11일 한파산업개발을 설립한 뒤 외국인투자심사위원회(FIB)에 자신의 이름으로 식당과 농장 사업에 대한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되돌아 온 것은 사업 허가가 아니라 노동국의 강도 높은 조사였어요. 노동국의 우두이 과장이라는 사람이 벌이는 일이었어요. 외국인 사업가들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킹의 이름만 빌려서 식당과 농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파악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조사 결과가 FIB에 통고된 거지요. 자칫 빈손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다급하게 매달릴 수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야 했다. 당시 밴캠프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농수산개발장관인 고이치웡을 찾아갔다. 전후사를 이야기하고 통사정을 했다. 고이치웡 장관이 나서서 노동국과 FIB에 공문을 내주었다. 하 회장의 사업이 팔라우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고, 부족한 야채도 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참작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우두이 과장은 더욱 악에 바쳐 감정적으로 대응을 했다. FIB와 농수산개발부, 법무부에게 공문 보내더니 나중엔 하리오 레멘니크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너무 힘들더라고요. 혼자 술집에 가서 맥주를 한잔 하고 있었어요.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현지인이 당신이 '미스터 하'냐 하면서 말을 걸더라고요. 자신이 법무장관이라고 소개를 하더군요. 당시 팔라우에서는 워낙 떠들썩한 사건이었습니다. 술을 한잔 하면서 사실관계를 죽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듣고 법무장관이 도와주더라고요. 10개월에 걸친 노동국과의 긴 싸움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1985년 10월 5일 하 회장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첫 사업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어 1986년 7월엔 식품 도소매 사업, 1987년 2월엔 건자재 사업, 2000년엔 건설사업 등을 줄줄이 따내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관광객들이 늘기 시작했다. 1993년 골든퍼시픽 벤처 리조트 허가를 받은 데 이어 1996년 부동산 개발 종합허가를 획득했다. 2002년 한파마트를 개업하면서 유통업과 주류 판매, 도소매권, 항공화물 등을 취급할 수 있는 사업권을 확보했다. 건설업과 유통업, 부동산개발업 등의 규모가 커지면서 2009년 식당 사업은 완전히 정리했다. 한 회장은 이제 7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가슴 속에는 앞으로 새롭게 시작할 사업구상으로 가득하다.
"바다에 접한 곳에 종합 리조트 타운을 세우고 싶어요. 호텔과 쇼핑센터, 식당, 위락시설, 수상보트 등을 갖춘 레저타운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중국인들이 싹쓸이 하기 전에 제가 확보해 놓은 부지들이 있습니다. 채소 농사도 이곳에서는 블루오션입니다. 팔라우는 채소와 과일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귀하고 비쌉니다. 기름진 땅에서 대규모 농장을 다시 시작할 생각입니다."
일요일 아침 하 회장 가족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선다. 부인 공영애 여사와 며느리 박소희씨, 여섯살바기 손자 태경이를 앞세우고 팔라우한국교회에 가는 길이다. 아들 지훈씨는 한국에 출장을 나가고 없었다. 한국교회는 바벨다오브섬 초입의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예쁜 뾰족지붕을 한 하얀 건물이 우리를 반긴다. 하 회장은 믿음이 독실한 장로다. 그는 자신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허락한 하느님에게 늘 감사를 하면서 산다. 감사의 표시로 팔라우 동포사회와 팔라우 현지 학생들을 위해 매년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놓는다. 모교인 부경대학 후배들을 위해서도 하순섭 장학회를 설립해 매년 600만원씩을 기탁해 오고 있다. 찬양이 끝나자 하 회장이 대표기도를 한다. 기도를 하는 그의 얼굴이 환하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 팔라우는 하늘이 그에게 내려 준 드넓은 낙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