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한국 건축기술로 베트남 스카이라인 바꿉니다."

2015-09-17 12:08:20 게재

하노이 엄이건축비나 한치옥-장은숙 사장 부부

8세기 중엽 당나라 현종 시절 왕적신(王積薪)이라는 바둑의 고수가 있었다. 그는 황제와 바둑을 두는 일을 담당하는 기대조(棋待詔)라는 벼슬을 지낸 이였다.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당대 최고의 고수였다. 왕적신은 바둑을 둘 때 명심하고 준수해야 할 요결을 열 가지로 정리했다. 바둑계의 십계명으로 통하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이다. 1200여 년 전 그가 정리한 위기십결은 첨단과학문명 속에서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촌철살인의 지혜를 주고 있다.

위기십결 중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항목이 있다.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뜻이다. 삼척동자라도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집어 든다. 문제는 크고 작음을 보는 안목이다. 고수들은 당장 눈앞의 크고 작음뿐 아니라 그 너머로 이어지는 지평의 넓이를 가늠한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종합건설회사인 엄이건축비나를 운영하고 있는 한치옥(58) 사장. 그는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고층빌딩 건설관리(CM) 전문가다. 30대 초반 건축기술사 자격을 획득한 그는 1990년대 서울 남대문 앞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지상24층)과 여의도 유화증권빌딩(지상20층), 잠실 월드타워(지상20층) 등의 CM으로 활약하면서 고층빌딩 건축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인물이다.

2004년 그는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했다. 사소취대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이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에 들어서는 300억 원 규모 공사의 CM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뿌리친 채 30억 원짜리 공장건물을 짓기 위해 베트남으로 건너왔다. 10분의 1 밖에 안 되는 작은 떡을 집어든 선택이었다. 한 사장이 그동안 쌓아온 고층빌딩 건축전문가로서의 화려한 경력은 한평생 고소득과 명예를 보증하고 있었다. 그런 편안한 인생을 포기한 채 미지의 해외무대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러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계산한 사소취대의 결정이었다. 한 사장은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한 베트남 경제의 미래 가능성을 내다봤다. 1986년부터 '도이모이(쇄신)' 경제 개방정책을 채택한 베트남은 연평균 7~8%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꾸준하게 지속하고 있었다. 인구 9000만의 든든한 시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사장은 심각한 레드오션으로 변한 한국의 건설시장보다는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시장 베트남이 더 큰 떡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베트남의 랜드마크 빌딩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건설 회사들의 작품이다. 베트남 건설업계에 진출한 지 12년 째 되는 한치옥 '엄이건축비나' 사장도 하노이 최고층 빌딩인 경남랜드마크72 등 하노이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주역 중 한 사람이다. 한 사장이 그의 아내이자 회사의 재무담당 이사인 장은숙 여사와 함께 호떠이 호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호수 건너편으로 경남랜드마크72와 웨스트 레이크호텔, 돌핀 플라자 등 한국 건설 회사들이 세운 빌딩들이 보인다.


이후 한 사장은 고층빌딩 CM 전문가로 베트남 대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데 일조를 하게 된다. 하노이의 최고층 빌딩인 경남랜드마크72와 중부 해안도시 다낭의 37층짜리 블루밍타워, 다낭 스포츠홀, 후에 종합병원 등 굵직굵직한 건설현장을 지휘했다.

10년 동안 CM 전문가로 활동을 하던 한 사장은 2013년 종합건설회사인 엄이건축비나를 설립했다. 프리랜서 CM으로 활동할 당시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건축설계 업체인 엄이건축의 베트남 대리인 역할을 했던 인연으로 회사이름을 엄이건축비나라고 정했다. 엄이건축비나는 설립 첫해 25억 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2014년 80억 원 등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커넥터를 생산하는 아모비나 빈푹공장을 비롯해 휴대전화 부품 회사인 '산하일렉트로닉스'의 빈푹 공장건물, 하노이 근교 우주 목재펠릿 공장 등 200만~300만 달러짜리 공사를 잇달아 수주했다. 회사 설립 이후 참가한 5번의 공개 입찰에서 전승을 거두는 실력을 과시했다. 별도의 영업도 안하고, 커미션을 건네지 않은 채 순전히 기술력으로 승부를 한 결과였다.

시원하게 툭 트인 너른 호수가 황금빛 태양을 반사하고 있었다. 하얀 물비늘이 찰랑찰랑 수면 위에서 부서진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 한복판의 호떠이(서호)는 700만 대도시가 토해내는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둘레 13km의 호떠이 호수를 배경으로 하노이의 스카이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올망졸망한 저층 건물들 사이로 하늘을 찌르는 고층빌딩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베트남 건설업계에 진출한 지 12년 째 되는 한치옥 '엄이건축비나' 사장이 그의 아내이자 회사의 재무담당 이사인 장은숙(54) 여사와 함께 호떠이 호수를 걷고 있었다. 한 사장이 눈에 띄는 건물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을 해 주었다.

"베트남에 오래전부터 '건설 한류'가 불고 있어요. 하노이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큼지막한 빌딩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군계일학 격으로 가장 높은 저 건물이 그 유명한 경남랜드마크72 빌딩입니다. 경남랜드마크72와 키를 다투는 빌딩은 64층 높이의 롯데타워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메리어트 호텔과 다이아몬드 플라자, 소피텔 등 하노이의 랜드 마크 급 빌딩들은 모두 한국 건설업체들이 지은 것들입니다."

한치옥 사장이 자신의 방에서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엄이건축비나는 설립 첫해인 2013년 25억 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2014년 80억원의 실적을 기록하는 등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엄이건축비나는 경남랜드마크72가 자리 잡고 있는 꺼우저이 지역에 있었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물러선 조용한 거리의 아담한 빌딩에 입주해 있었다. 사무실은 30여명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풋풋한 젊은 직원들이 내뿜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한 사장이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한 방으로 안내를 했다. 방주인은 60대 중반의 중후한 한국인이었다.

"베트남 건축계의 최고 전문가인 곽경식 회장님입니다. 하노이 고층빌딩 건축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만 한 분입니다. 하노이 랜드 마크인 경남랜드마크72 건설 때 현장소장을 하셨어요. 당시 제가 실시설계 담당자로 곽 회장님과 함께 일을 했지요. 곽 회장님은 경남랜드마크72 뿐 아니라 하노이 최초의 고층건물인 30층짜리 하노이타워와 호떠이 호수 변의 웨스트 레이크호텔, 주상복합빌딩인 돌핀플라자 등 하노이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지으셨어요. 서울의 롯데호텔과 말레이시아의 그랜드 하야트호텔, 싱가폴의 레플호텔 등도 곽 회장님 솜씨입니다. 아시아 최고의 경험과 노하우를 갖춘 분이지요. 제가 회사를 설립하면서 모셔 왔습니다. 우리 회사의 김광석 부사장도 한국 건축업계에서는 최고로 꼽히는 베테랑 디자이너입니다. 대림건설과 청구건설, SK건설 등 대기업에서 설계를 담당하던 분입니다."

곽 회장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조금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엄이건축비나의 CEO(최고경영자)인 한 사장과 CFO(재무담당 최고책임자)인 장 이사의 책상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장 이사는 직원들 월급 챙겨주는 일과 사무실 운영비, 물품 구입비, 직원 활동비, 복지비 지출 등 회사의 안살림을 총괄하고 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부부가 한 방을 쓰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은 집과 회사 뿐 아니라 사회활동 및 취미생활도 함께 한다. 한 사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하노이 어린이 바둑교실을 함께 운영하고, 장 이사가 좋아하는 스포츠 댄스 동아리에도 함께 참여한다. 장 이사가 내온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사연을 들었다.

장 이사 : "학창시절 연세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연극 활동을 한 동안 했어요. 서울 계동의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에서 연습을 마친 뒤 성신여대 근처의 한 음식점에서 여성단원 두 명이랑 저녁 겸 술을 한잔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저의 테이블로 오더니 작업을 걸더라고요. 자기들은 남자 세 명인데 합석을 하자는 거였습니다. 그 세 사람 중 하나가 우리 신랑이었어요."

한 사장 : "저는 그때 이미 졸업을 해서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현대건설에서 분사한 현대알루미늄에 다니고 있었어요. 합석을 해서 신상파악을 하다 보니 연세대 후배더라고요. 그렇게 사귀기 시작해서 결혼까지 한 거지요."

한 사장은 프로1급, 아마 7단의 바둑 실력자다. 한 사장이 자신의 사 재를 털어 만든 하노이 바둑동호회 기원에서 베트남 어린이에게 바둑을 지도하고 있다. 한 사장 부부는 주말마다 어린이 바둑교실을 열어 한국과 베트남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장 부부가 집과 회사, 취미생활까지 꼭 붙어 다니면서 함께 하기 시작한 건 불과 2년 전 부터다. 그 전 10여 년 동안 한 사장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장 이사는 아이들 키우고 시민활동을 하느라 한국에서 살았다. 장 이사는 한국의 교육계와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인사다. 20년 가까이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참학)' 활동을 열성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참학은 1989년 9월 창립됐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이 모인 단체다. 입시위주의 주입식 경쟁교육보다 저마다의 소질과 개성, 꿈, 소망을 펼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이다.

장 이사 :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더라고요. 앞으로 우리 아이가 살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한 거지요. 작은 애 재성이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선행학습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그런 사교육 시장에 내맡기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한겨레신문 통해 참교육을 바라는 학부모 단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참학에서 미디어교육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전화로 참가 신청을 했지요. 그게 1994년 이었어요. 모임이 너무 신선하더라고요. 새로운 세계를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한 사장 : "정치적으로 1990년대는 정말 혼란스러운 시기였지요.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어요. 특히 1990년대 초중반에는 노태우 대통령의 200만호 주택건설 공약으로 건설 붐이 뜨겁게 일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시민운동을 할 때 저는 열심히 고층빌딩을 짓고 있었지요. 연세재단 세브란스 빌딩과 유화증권 사옥, 잠실 월드타워 등이 저의 손을 거친 빌딩들입니다."

장 이사는 참학에 가입한 지 1년도 안돼서 서부지회 문화부장을 맡았다. 이후 서울지부문화부장, 전국문화국장, 상담실장, 사무처장, 부회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KBS와 MBC의 시청자 옴부즈맨으로 활동하면서 방송출연을 하기도 했다. 2009년부터는 4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 참학을 이끌며 이명박 정권의 시장만능주의 교육정책에 맞섰다. 2년 임기의 참학 회장직을 연임한 최초의 사례였다.

장 이사 : "1만여 명 회원을 둔 단체를 이끌어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참학 회장 임기 4년은 저를 단련시키고 성숙시키는 기회였습니다. 조직을 이끌어가고 인간관계를 조율하는 공부를 많이 했지요. 지금 남편 회사 일을 돕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것도 그때 겪은 경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 사장 : "제가 베트남에 진출한 게 2004년 5월입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우리 부부는 베트남과 한국에서 떨어져 살았지요. 아내는 한국에서 애 키우랴 시민 운동하랴 바빴고, 저는 베트남에서 자리를 잡느라 바쁘게 살았어요. 그때 부부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을 지금 몰아서 보충하고 있는 거지요."

2013년 2월 장 이사는 두 번째 참학 회장 임기를 마쳤다. 그동안 지고오던 큰 짐을 모두 덜어 버린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인생 2막은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해 9월 장 이사는 베트남으로 건너왔다. 당분간 푹 쉬고 싶었다. 뒹굴뒹굴 책을 읽고, 베트남 여러 곳을 돌아 다녔다. 하노이 자전거 동호회에도 가입해 활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몸이 근질근질 해 질 무렵 남편이 도움을 청했다.

한 사장 : "회사 살림을 다독거리며 챙겨줄 손이 필요했어요. 사무실 운영비용과 건축 재료비, 직원 주거비 및 교육비 지원, 출장비 등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지출 항목들이 많습니다. 저는 공사 수주하고 현장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거든요."

장 이사 : "남편이 저에게 CFO 직함을 주더군요. 20년 가까이 참학 간부로 일을 하면서 기본적인 회계 업무는 익히고 있었어요. 회원들의 회비와 시민들의 지원금 등으로 운영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회계 정리를 엄격하게 하거든요. 그래도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기 위해 부랴부랴 회계학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니까 회계 일을 하는 재미도 쏠쏠 붙더라고요. 남자들도 뒷방으로 물러나는 나이에 시작한 일이잖아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아요. 밤늦게까지 배우고 공부하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는 바둑으로 치자면 끝내기 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한 사장 부부는 베트남에서 이제 포석 단계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 한국이란 좁은 판을 벗어나 베트남이라는 글로벌 무대로 인생포석의 장을 넓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은 넓고 포석의 수도 무궁무진하다. 바둑이나 인생이나 돌 놓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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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