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인도대륙은 '아시아 미학'을 담아내는 나의 캔버스"
뉴델리 'AA스튜디오컨설팅' 김창현 사장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맑고 투명하게 빛나리라.
그것이 타지마할이라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과연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노래한 그대로 타지마할은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타고르의 시어 그대로 황제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시간에 마술을 걸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이 사랑했던 황후 뭄타즈 마할의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타지마할은 황금빛 태양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타지마할의 돔은 마치 커다란 눈물방울을 형상화 한 것처럼 보였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묘 하나를 만들기 위해 22년간 2만여 명이나 동원했을까. 샤 자한은 국가재정을 탕진한 끝에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 성에 유폐되고 만다. 매일같이 아그라 성 창밖으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눈물로 여생을 마쳤다.
타지마할까지 안내를 자청한 김창현(43) 사장은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다소 야윈 얼굴에 두툼한 뿔테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인도 뉴델리에서 건축설계 및 자문회사인 'AA스튜디오컨설팅'과 인테리어 자재 판매회사인 'AA인테리어솔루션스'를 운영하고 있다. 건축설계와 인테리어 시공, 건축자재 판매 등 3가지 사업을 하면서 연간 30억 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김 사장과 함께 타지마할을 찾았으니 '세계 7대 경이로움' 중 하나로 꼽히는 타지마할에 대한 건축 전문가의 특급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타지마할은 중앙의 육중한 돔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돔 주변에 배치된 첨탑 4개는 시각적인 조형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출입문과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정교한 문양들은 강한 햇빛을 차단하면서도 바람은 통하게 하는 지혜를 담고 있지요. 우리나라 한옥 격자문의 창호처럼 빛을 한번 걸러줌으로써 은은한 실내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아시아적 미학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시아적 미학이란 무엇인가. 동양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한국의 건축은 기본적으로 천지인(天地人)의 개념이다. 즉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은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이 안기는 공간을 의미한다. 인도의 힌두건축은 건물에 머리와 몸통, 팔다리의 개념을 부여한다. 자연 속에 사람이 안기는 조화의 개념이다. 그러나 서양은 인간의 편의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파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아시아의 건축물은 서양보다 훨씬 은유적이고 은근하다.
아시아적 미학은 건축가 김창현이 품고 사는 화두다. 건축을 할 때 자연과의 조화 속에 편안하게 사람이 안기는 환경 친화적 공간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서울산업대학(현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설계학과(92학번)와 건국대 건축대학원(96학번) 등 상아탑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동서양 2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각 나라의 건축물들을 현장에서 공부한 끝에 스스로 정립한 지향점이 바로 아시아적 미학이다. 회사 이름조차도 'AA' 즉 아시안 이스세틱스(Asian Aesthetics)로 정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김 사장은 하고많은 나라들 중에 왜 하필 인도에 회사를 차렸을까. 인도만큼 전략적 장점을 지닌 나라도 드물다. 인도는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인도의 문화 속에는 동서양이 함께 녹아 있다. 인도의 건축물들은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의 전통과 특색을 담아내고 있다. 건축설계를 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상상력을 충족시켜주는 요인들이다.
델리 남부의 하우즈 카스 지역은 서울 강남에 해당하는 부촌이다. 인도의 부자들과 문화 예술인, 외국인들이 몰려 사는 지역이다. 인근엔 그린 파크와 굴모하르 파크, 디어 파크, 로즈 가든 등 유서 깊은 공원과 아름다운 숲이 들어서 있다. 14세기 초 만들어진 왕궁 저수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AA스튜디오컨설팅은 사무용 건물들이 몰려 있는 하우즈 카스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은행과 헬스센터 등이 들어서 있는 5층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20여 개의 책상이 들어서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건축 설계 사무소라고 해서 예상했던 넓은 제도용 테이블과 그 위에 펼쳐진 설계도면, 큼지막한 T자 등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책상마다 2~3대씩의 컴퓨터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요즘은 설계를 모두 컴퓨터로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김 사장의 방은 한쪽 면 전체가 유리창으로 덮여 있었다. 창밖 가로수들의 짙푸른 잎사귀들이 유리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실외 가로수들이 멋진 실내 장식품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또 다른 한쪽 벽면은 온통 책으로 덮여 있었다. 건축 관련 책 뿐 아니라 인문 사회 과학 여행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서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예쁘장한 소파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한국과 인도를 밀접하게 연결하는 일등공신은 기업들이다. 현재 인도에 진출한 우리기업은 450여개 정도다. 자동차, 전기전자, 건설, 무역 등의 업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데 이어 중소기업들도 계속 인도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인도에 진출한 이들 한국기업들은 AA스튜디어가 짧은 기간에 경영 안정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 사장은 2005년 6월 AA스튜디오컨설팅을 개업한 이래 10년 동안 인도 중남부 하이데바라드의 현대자동차 R&D센터 인테리어, 첸나이의 우리은행 지점 건물 인테리어, 뭄바이의 미래에셋 지점 디자인 및 감리 등의 실적을 쌓았다. 인도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공장이나 사무실 건물 등을 지을 때 인도 건축계에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김 사장에게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12년 뉴델리 한국문화원 리모델링 공사와 2013년 인도주재 한국대사관 별관 증축 공사를 수주한 사실은 건축가로서 그의 실력이 최정상급이라는 사실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
물론 김 사장은 인도 현지기업 고객들도 상당수 확보하고 있다. 방갈로르 출판계의 거물인 강가람 북뷰로와 남인도 최대 철강회사인 가비야파 등이 김 사장의 단골고객들이다. 방갈로르의 '클럽 파이어플라이(Club Firefly)'와 미술관 '갤러리 하우스', '강가람 북 뷰로 갤러리 하우스' 등이 김 사장의 작품이다. 한국과 인도, 다국적 기업 등 다양한 고객층의 신뢰가 그의 최고 사업 밑천이다.
"저의 고객들은 인도사회 최고 실력자들입니다. 만일 제가 한국에서 사업을 했다면 한국사회의 성골이나 진골들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 건축업계에서는 실력만으로 승부를 할 수가 없어요. 학벌과 출신, 계보에 따른 이너서클이 존재합니다. 인도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에게 누구도 그런 거 물어보지 않습니다. 인맥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인도대륙이라는 넓은 공간은 협량한 관념과 좁은 시야를 벗어나서 더 넓은 지평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굵직굵직한 공사들을 수주하면서 AA스튜디오는 급성장을 했다. 특히 대사관 별관 증축 공사를 했던 2013년 매출은 80억 원까지 치솟았다. 20여 명 정도이던 직원이 5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일이 늘어날 때마다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뽑았던 것이었다. AA스튜디오는 2013년 12월 이전까지는 방갈로르에 있었다. 델리와 첸나이에는 지사를 두고 있는 방만한 형태였다. 사람의 몸에 군살이 많이 붙으면 이런저런 병이 생기는 것처럼 기업도 마찬가지다. AA스튜디오에도 여기저기 누수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인도인 경리과장이 9000만 원 정도를 빼돌리는 횡령 사건이 발생했다. 은행 계좌를 확인하던 중 영문을 모르는 돈이 빠져 나간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전기공사를 하는 인도 협력업체와 짜고 벌인 일이었다. 세무 분야에서는 부실이 적발됐다. 세무사가 자료 정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적지 않은 액수의 세금을 내지 않고 있었다. 세무사를 새로 고용해 밀린 세금을 자진 납부했다. 매출 20억 원 이상 규모의 기업은 세무관리 집중 대상이기 때문에 부실한 납세가 적발 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세금추징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노무 쪽에도 문제가 생겼다. 한 자동차 회사의 연구소 건물 프로젝트를 수주했을 때였다. 공사 발주 업체에서 산재보험 납부 영수증을 요구했다. 인도에서는 직원 20명 이상의 업체는 산재보험 국민연금 등 2개를 납부해야 한다. 그런 규정이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직원의 규모만 늘리고 있었던 것이다. 5년 치 체납액과 벌금을 합해서 5000만 원 정도를 한꺼번에 납부해야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우선 방만한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했다. 2013년 12월 회사를 뉴델리로 이전했다. 첸나이 지사를 폐쇄하는 등 강도 높은 군살빼기 작업을 시작했다. 50여 명이던 직원을 16명으로 줄였다. AA스튜디오의 뉴델리 시대를 소수 정예요원 체제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동안 저는 건축가였을 뿐입니다. 경영자로서는 아마추어였어요. 여러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경영자로서의 사고를 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설계도면만 바라보는 건축가가 아니라 회사 운영의 전반을 들여다보는 경영자로서의 일을 챙기고 있습니다."
AA스튜디오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일복도 터지기 시작했다. 2015년 가을에만 프랑스계 다국적 IT기업인 캡제미니(Cap Gemini)가 발주한 295만 달러 규모의 디자인 및 시공 프로젝트를 따낸 것을 비롯해 홍콩 금융그룹인 HSBC 인도지사로부터는 10만 달러 규모의 PC 테이블 납품계약, 우리은행 미얀마 지사로부터는 20만 달러의 규모의 디자인 및 시공 계약을 수주했다.
"무엇보다도 캡제미니 프로젝트를 따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습니다. 캡제미니는 인도에서만 직원 8만여 명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적 기업입니다. 캡제미니는 50여 개 국에 흩어져 있는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업무처리 아웃소싱) 인력을 인도로 집중시키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사무 공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빌딩 설계와 인테리어, 사무집기 납품관련 대규모 입찰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따낸 프로젝트는 방갈로르와 첸나이, 살렘의 디자인 및 시설 공사들입니다. 앞으로 인도 전역에서 켑제미니의 사무소 및 교육센터 공사가 줄줄이 이어질 겁니다. 그때 추가로 공사를 따낼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한국의 건축자재와 사무용품 등을 납품할 수 있는 길도 열 수 있게 됐고요."
김 사장의 집은 사무실에서 도보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분 좋은 향초 냄새가 코에 끼친다. 거실로 들어서자 늘씬한 키의 백인 여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김 사장의 아내 나탈리 쿠아드란티 킴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들 미노(7살)와 지노(5살) 형제도 달려와 아빠 품에 안긴다. 나탈리가 정성껏 준비한 저녁이 준비돼 있었다. 놀랍게도 구수한 된장국과 배추김치, 깍두기, 멸치볶음 등 한국음식으로 차려진 저녁상이었다. 어린 미노와 지노가 된장국은 물론 김치까지 맛있게 먹는 모습이 신기했다.
"우리 집 식단은 글로벌 식단입니다. 한국식과 유럽식, 인도식뿐 아니라 태국, 멕시코 요리도 등장합니다. 물론 한국식과 유럽식 음식들을 가장 많이 먹지요. 덕분에 아이들은 편식 없이 아무 음식이나 잘 먹어요."
가족끼리 대화도 한국어와 영어, 독일어가 한 자리에서 섞이고 있었다. 김 사장 부부는 영어로 대화를 했다. 지노와 미노는 아빠와는 한국말을, 엄마와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두 아이는 한국어와 독일어, 영어, 인도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하는 셈이다. 김 사장과 나탈리의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스케치 한 장이 묶어준 인연입니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중 지방 여행중에 라다크 주도인 레(Leh)에서 나탈리를 만났어요. 스위스 리바 산비탈레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가봤던 곳이어서 반가웠습니다. 제 스케치북 속에 들어있는 리바 산비탈레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하더라고요."
건축가 김창현 사장은 인도 사회의 '건강한 경계인'이다. 거대한 인도대륙의 다양성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약한 경계인'이 아니라 그 풍요로움을 주체적으로 즐기는 '건강한 경계인'인 것이다. 인도는 하루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적이 없다. 김 사장은 이런 인도의 다채로움 속에서 예술적 자양분을 흠뻑 취하면서 살고 있다. 3개 국어를 사용하는 가족과의 대화와 매끼마다 달라지는 다국적 식단도 그를 '건강한 경계인'으로 깨어있게 하는 요인들이다. 한 번 지구별 소풍을 왔으면 김 사장처럼 통 크게 세계를 누리면서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