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유럽에 '파생상품' 시한폭탄 터뜨릴까
100조 채권시장 기반한 500조 파생상품 … 이탈리아 금융권 위기 심화
인터넷매체 제로헷지에 따르면 2008년 80조달러였던 국가채무는 현재 100조달러로 급증했다. 적자에 허덕이는 국가들은 혹독한 재정긴축과 공공자산 매각, 공공서비스 축소, 공무원 감축 등을 시행하고 있지만 균형재정 달성은 멀기만 하다. 오히려 부채가 계속 늘고 있다.
재정긴축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은 상당수 나라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채무불이행(디폴트)이나 부채조정은 해결방안 목록에 올라 있지 않다. 이유는 뭘까.
금융블로그 피닉스캐피털에 따르면 글로벌 채권시장의 거품규모는 약 100조달러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10조달러에 달하는 채권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채권 수익률에 기반한 파생상품 거래 규모는 500조달러에 달한다는 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채권시장의 채무재조정이나 디폴트를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U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2%에 불과한 그리스에 대해 지속적으로 구제금융을 해주는 이유도 바로 파생상품 시장의 붕괴를 우려해서다.
제로헷지는 "브렉시트 이후의 금융시장을 보면 유럽 국가들의 채무재조정 요구가 거세질 것임을 알 수 있다"며 "EU는 그동안 경제난으로 부채탕감을 요구하는 나라들에게 'EU를 떠난다면 금융 파국이 벌어질 것'이라고 위협해왔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영국이 EU를 떠나겠다고 결정했지만, 금융 파국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은 이제 역으로 '부채탕감이나 재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EU를 떠나겠다'고 반박에 나설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게 바로 파생상품 시장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파생상품 거래(72조8000억달러)를 자랑하는 도이체방크가 최근 휘청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번째 도미노는 이탈리아?
'부채탕감이나 재조정은 없다'는 EU의 규정에 대해 첫 번째 도전자로 나선 나라는 이탈리아다. 6월 27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라프는 "브렉시트의 첫 번째 도미노가 무너졌다"며 "이탈리아 은행의 주가가 무너지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400억유로(약 52조원)의 구제금융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부는 특별채권을 발행해 직접 은행 자본확충에 나서는 방안을 연구중이다. 동시에 '베일인'(bail-in, 예금주·채권자 손실분담)의 일시중단을 원하고 있다. 이는 EU가 금지하고 있는 조치다.
인터넷매체 제로헷지는 지난달 29일 "이탈리아 마테오 렌치 총리는 EU로부터 '부채탕감'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EU의 규정을 어긴다 해도 자국 금융권 살리기에 직접 나서게 될 것"이라며 "렌치 총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유럽의 정체성을 위해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또 "이탈리아는 브렉시트를 발판으로 EU 규정을 피하려고 할 것이고, 만약 실패한다면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협박할 것"이라며 "독일이 '이탈리브'(Italeave, 이탈리아의 EU 탈퇴) 가능성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관전포인트"라고 덧붙였다.
이탈리아 위기, 브렉시트 탓인가
이탈리아 금융권 위기가 브렉시트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이탈리아 은행들은 이전부터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유럽 금융권을 악화시킨 건 올 1월부터 전격 시행된 베일인 제도로 보는 게 옳다.
제로헷지는 "은행이 부실해질 때 예전처럼 세금으로 구제금융하는 대신, 예금주와 채권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면서 은행 주식이 외면받기 시작했다"며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베일인 제도의 전면적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지난해 말 4개 지역은행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되면서 베일인 제도가 시범적용되자 수천명 예금주의 피같은 돈이 허공으로 사라졌다"며 "결국 이탈리아 정부가 이들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약속하면서 소란은 가까스로 진정됐다"고 덧붙였다.
결국 베일인 제도는 취지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예금주와 채권자들이 은행을 외면토록 하면서 가뜩이나 취약한 금융권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은행권 자본확충 비율마저 높아졌다.
이탈리아 재무부 정책심의관이었던 로렌조 코르도그노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정책 의도는 유럽 은행들의 건전성 강화였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건전성 악화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위기 때엔 유연한 정책이 필요한 법. 완고한 EU 역시 정책 변경의 선례가 있다. 2011~2012년 유로존 재정위기 전만 해도 ECB는 국채 매입을 할 수 없었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부유럽 국가들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면서 이들 나라의 국채금리가 치솟았다. ECB는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대규모 자산 매입) 대열에 결국 동참하면서 현재 매달 800억유로에 달하는 금융자산을 사들이면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
텔레그라프는 "브렉시트는 아직까지 채권시장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지는 않고 있다"며 "ECB가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채권수익률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어 "만약 이탈리아가 EU 탈퇴를 강행할 우려가 높아질 경우 EU는 베일인 제도를 대폭 손질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리셋(초기화) 단추를 누를 때
하지만 사안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베일인 제도를 고친다면 이탈리아는 당장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유럽 전체의 금융시스템은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100조달러 국채시장에 세워진 500조달러 파생상품 시장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초기화(리셋) 버튼을 누르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동원하느냐가 관건이다. 베일아웃(기존 구제금융 방식)과 베일인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부채탕감' 역시 채권자들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막대한 파생상품 시장을 붕괴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변호사이자 미국 '공공금융연구소'(PBI) 소장, '부채의 늪'(Web of Debt) 저자인 엘런 브라운은 "ECB의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브라운 소장은 3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브렉시트와 파생상품 시한폭탄' 글에서 "다른 수단이 실패한 상황에서 파생상품 시장 붕괴로 인한 디폴트 파국을 막으려면 각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ECB가 그간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통해 구입한 국채를 휴짓조각으로 만든다면 유로존 각국 정부는 다시 지출 여력을 갖게 된다"며 "이렇게 되면 ECB가 추가적인 양적완화에 나설 필요도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화폐 공급량이 지나치게 많다면, 세금과 이자, 수수료 등의 형태로 다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며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법은 돈을 소비할 사람들의 호주머니에 직접 돈을 집어넣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