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서울 성북구
독립운동가 가족을 품은 마을 정릉동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 말년 보내 … 숨은 독립운동가 발굴, 8명 신규추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내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으로 더 알려진 정릉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 가족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여사와 유관순의 오빠 백노 유우석이다. 둘과 함께 역시 정릉에 살았던 이규창 선생과 조화벽 지사도 세간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아나키스트의 아내 = 성북구 정릉2동 226-33번지. 평범한 빌라 4층에는 사업가 이종철씨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할머니와 아버지 기억을 안고 산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1889~1979) 여사와 둘의 장남 이규창(1913~2005) 선생이다.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뒤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과 달리 22살 차이가 나는 아내는 오랫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여사는 열아홉이던 1908년 만 19세 나이로 우당과 결혼한다. 결혼 2년만에 명문가인 남편 집안은 전 재산을 처분해 낯선 땅으로 떠났고 그는 남편에 앞서 혼자 갓 낳은 딸을 안고 만주로 출발했다. 이국에서의 삶은 팍팍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적의 총에 맞고 가난에 쪼들리다 자식과 손녀를 병마에 앞세우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배웅도 못했고 1년 뒤 제사에 참석하는 길에는 임신 중에 4살짜리 딸과 함께 움직이면서 신발 밑창에 비밀서류를 숨겼다 발각당해 일본 경찰에 압송되기도 했다.
1925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이은숙 여사는 아들과 딸 남편을 뒤로 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막내 아들을 혼자 낳아 키우며 고무공장 여공생활, 삯바느질과 삯빨래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매달 중국으로 돈을 보냈다. 박수진 성북문화원 운영과장은 "우당은 명문가 출신 전형적인 선비라 돈을 버는 데 익숙지 않았고 이은숙 여사가 날품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932년 남편이 다롄에서 체포된지 이틀만에 사망했지만 끝은 아니었다. 1935년 큰아들이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잡혔고 곧 서울로 압송됐다. 이규창 선생은 13년형을 받았고 공덕리 경성형무소, 서대문형무소, 광주형무소를 떠도는 아들 뒷바라지 역시 이은숙 여사 몫이었다.
여사의 삶이 가장 안정기에 접어든 건 한국전쟁 피난길에서 돌아와 정릉동에 정착한 때다. 둘째 사위가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1945년 일본이 패망선언을 한 직후 출옥한 큰아들이 함께 살았다. 1919년 향년 91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정릉은 그의 안식처였다. 박수진 성북문화원 과장은 "이웃들은 독립운동가의 부인인지 알지 못하고 평범한 동네 할머니로 알았다고 한다"며 "정릉에 살던 1975년 팔순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기록한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펴내고 독립운동가 아내의 삶에 대해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성북문화원은 이은숙 여사와 남편 이회영 일생을 창작 뮤지컬 '아나키스트의 아내'에 담아 공연을 하고 DVD로 제작하기도 했다.
◆초 한자루 켜놓고 부모·여동생 제사 = 성북구 정릉동 604-16번지에는 몇해 전까지만 해도 지붕이 무너져 내릴 듯한 낡은 기와집이 있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일대에 들어서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집은 3.1운동의 대명사로 꼽히는 유관순의 오빠 백노 유우석(1899~1968)이 기거하던 곳이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로 유관순 열사가 체포될 때 또 한 사람이 일경에 끌려갔다.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던 유우석이다. 그는 학생대표 자격으로 교사들과 함께 시위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 태극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5월 법정에서 동생과 마주치지만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8월 말 출옥한다.
이듬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고 1922년 졸업한 뒤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하는 등 학업을 이어가는 와중에 조국수호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일본 당국에 체포됐고 퇴학을 당했다.
1923년 백노가 연을 맺은 조화벽(1895~1975) 지사도 독립운동가다. 강원 양양지역 3.1운동 불씨로 불린다. 감리교 전도사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는 3.1운동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시절 선배들과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인쇄, 개성지역 3.1운동을 10여차례 주동했다. 고향 양양으로 돌아간 뒤에는 가방에 숨겨간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강원지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던 양양 3.1운동이 씨앗이라 불리는 이유다.
1923년 결혼한 뒤 부부는 유우석의 가족 모두와 함께 양양으로 떠난다. 조 지사는 유관순의 동생인 관복과 관석을 양육했고 1926년 원산 루시여학교 교로 일하면서는 독립운동을 하며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한 남편 옥바라지를 한다. 백노는 이후에도 1929년 1932년 1934년 항일활동을 하다 구속됐고 1936년 전후에는 무려 7번이나 구금, 고초를 당했다.
조화벽 지사는 1932년 양양으로 돌아와 정명학원을 설립해 1944년 폐교될 때까지 후학 600여명을 배출했고 해방 후 건국운동을 하다 소련군 박해에 월남한다. 백노는 통일운동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의회 산업분과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지만 이승만 정권때 노농당(勞農黨)을 창단, 노선을 달리한다. 5.16 군사정부가 노농당을 해산한 뒤에는 독립운동 유가족 구호활동을 하다 1968년 정릉동에서 숙환으로 눈을 감았다. 아내 역시 7년 뒤 같은 집에서 별세했다. 강성봉 성북문화원 사무국장은 "매년 3월 1일 부모님과 여동생을 기렸는데 너무 가난해서 초 한자루만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며 "성북동은 한용운, 종암동은 이육사로 큰 줄기가 형성돼있지만 독립운동가 가족이 평범한 주민과 어울려 살았던 정릉동은 그야말로 '독립운동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에 주소 둔 독립운동가 발굴 = 성북구와 성북문화원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 숨은 역사를 잇는 작업과 함께 지역에 주소를 둔 항일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발굴하는 작업을 몇년째 이어오고 있다. 수형기록과 정보문서 신문기사 등 각종 문헌자료를 토대로 한 숨은 독립운동가 발굴은 특히 성과가 있었다.
2017년에는 최용덕 나중소 오세덕 장군 등 96명을 새로 발굴, 독립유공 포상을 받지 못한 이들을 중심으로 면밀히 검토해 국가보훈처에 19명 포상신청을 했고 그해 8월 8명이 선정됐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지방정부 단위에서 8명이나 선정된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수많은 애국지사의 독립운동과 삶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성북구의 항일 독립운동 기록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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