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수원 화성행궁 봉수당 만세시위

'의로운 기생'들의 조직적인 만세운동

2019-01-30 11:30:44 게재

3.1운동 주도한 김향화, 2009년 독립유공자로 … 이병헌 비사에 '3월 1일 수원면에서 만세운동'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화성행궁 '봉수당'. 이곳은 100년 전 수원 기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이다. 기생들이 독자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수원이 최초였다.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지은 수원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위생검사를 실시하는 '자혜의원'으로 사용됐다. 당시 전통적 기생(예기)들은 관에 소속된 신분으로, 예술적 재능과 학문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런 기생들에게 위생검사는 치욕스런 일이었다. 수원의 기생들은 조선 왕조의 궁궐을 훼손해 병원으로 사용하고 강압적으로 위생검사를 받게 한 일제에 분노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수원 화성행궁 봉수당을 둘러보고 있다. 봉수당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위생검사를 실시하는 자혜의원으로 사용됐다. 곽태영 기자


◆'꽃중의 꽃' 기생 김향화를 아십니까? = 전국 각지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기생 김향화(1897~미상)는 동료들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단하고 태극기 제작 등 준비에 나섰다. 김향화는 서도홍 이금희 손상홍 신정희 김앵무 등 30여명과 정기검사일인 3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봉수당(자혜의원)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의원측이 내쫓자 병원 바로 앞에 위치한 수원경찰서로 자리를 옮겨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총검을 든 일본 순사들이 보는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모진 고문과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당시 일제 경찰도 놀라게 했던 수원기생들의 기개 있는 행동은 수원지역 주민들과 상인, 노동자들의 독립운동 열망을 불태우며, 일본인 상점과 가옥에 투석전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수록된 김향화. 수원박물관 제공

수원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김향화는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매일신보 1919년 6월 20일자에 '소요기생공판'이란 제목으로 김향화 공판 관련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당시 그의 재판을 보기 위해 '방청석에 사람이 가득했다'고 나온다. 김향화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19년 10월 27일 가출옥되었다. 모진 고문 등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상해 가출옥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그의 행적은 어디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조선미인보감(1918년)'에 따르면 김향화의 본명은 '순이'로 기생이 된 후 '향화' '행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경성에서 나고 자랐으며 기생이 된 후 수원예기조합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1919년 1월 고종이 타개했을 때도 누구보다 슬퍼하며 덕수궁 대한문 앞에 가서 소복을 입고 나라 잃은 설움을 통곡했다.

수원시는 이동근 학예사가 연구·발굴한 수원 기생의 3.1운동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하고, 후손 찾기 활동도 벌였다. 정부는 이듬해인 2009년 김향화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훈·포장을 지급했다. 하지만 훈·포장은 그의 후손을 찾지 못해 수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수원시 팔달산에 세워진 3.1독립운동기념탑(왼쪽)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오른쪽). 기념탑은 1969년 3월 1일 삼일동지회가 세웠다. 기념비는 1948년 8월 15일 수원군내 학생 수원읍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원래 일제가 방화수류정 인근 동공원에 세운 '노구찌 순국비'를 시민들이 부수고 그 자리에 세웠는데, 1969년 10월 15일 새 기념탑 옆으로 옮겨왔다. 곽태영 기자


◆청년·농민·기생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민중항쟁 = 수원지역의 3.1운동은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김향화로 대표되는 기생까지 참여한 점은 학계와 일반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3.1운동이 최초로 일어난 서울과 동시에 수원면에서도 3월 1일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됐다는 기록이다. 1966년 수원지역 민족운동가인 이병헌(1896~1976)이 편저하고 3.1동지회가 발행한 '3.1운동 비사'(1966년)에는 "3월 1일 수원 북문 안 화홍문 용두각(방화수류정)에 수백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 따르면 수원면에서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3월 16일 장날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 3월 23일 수원역 근처 서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등 4월 중순까지 만세운동이 계속됐다.

하지만 수원면의 3.1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은 "이병헌의 3.1운동 비사 기록 이외에 총독부 첩보 등 일본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좀 더 실사구시적인 연구를 통해 사실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원박물관이 2015년 펴낸 '수원,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에서 박 환 수원대 교수는 "수원지역 3.1운동은 삼일여학교 학감으로 있던 김세환(1889~1945)과 수원상업강습소 출신인 김노적(1895~1969), 박선태(1901~1938) 등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탄압도 이어졌다. 일본 소방대가 이병헌을 잡기 위해 북수리 천도교당에 난입했다가 교구 물품을 부쉈다. 또 일본 순경들은 3.1운동을 주도한 김세환의 근무처인 삼일여학교에서 주모자들이 모일 것으로 예상, 밤 12시경 습격했으나 허탕을 치자 학교 기물과 사무실을 파괴했다.

당시 수원군이었던 우정·장안면의 화수리 항쟁, 송산면의 3.1운동, 제암·고주리 학살까지 포함하면 수원지역 3.1운동은 평북 의주, 황해도 수안, 경기도 안성과 더불어 전국 4대 3.1운동 최대 발발지로 볼 수 있다. 한동민 관장은 "과거 수원군에 포함된 수원·화성지역 3.1운동의 특징은 일본 경찰 2명을 처단한 유일한 곳이란 점과 수원상업강습소 등에서 교육·노동운동을 매개로 한 청년과 농민, 기생 등 다양한 계층이 떨쳐 일어났던 민중항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인터뷰│염태영 경기 수원시장] "100년의 울림 기억해야 미래 기약"

[신년기획]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 연재기사

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곽태영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