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안산 수암동 비석거리 만세운동

'비폭력' 시위였지만 강렬했던 독립의지

2019-02-25 12:01:19 게재

"독립하면 관공서는 국가, 국유지는 소작인 소유" … 토지분배 실현 의식도 표출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428번지 일대. 과거 '비석거리'로 불렸던 곳이다. 100년 전 이곳에서 수암면 소속 18개리의 주민 2000여명이 모여 3.1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비석거리'는 조선시대 안산군에 부임했던 군수·관찰사 등 지방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가 모여 있어 붙은 지명이다. 이곳에 있던 비석들은 현재 안산읍성 객사 및 관아지 터로 옮겨져 당시 만세운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수암어린이집 앞 작은 뜰에 세워져 있는 '비석거리 3.1운동 기념비'가 당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수많은 민중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수암마을전시관 뒤편 안산읍성 객사 터. 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 수암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현재 이 일대는 안산읍성 및 관아지 성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곽태영 기자


◆전체 주민 8000명중 2000명 넘게 참여 =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쯤 유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 등이 당시 수암면에 거주하던 18개리의 주민 약 2000여명을 이끌고 비석거리(비립동)에 모였다. 이곳에 모인 군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안산향교, 수암면사무소(현 관아지 터) 수암경찰관주재소, 안산보통학교 일대를 돌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체험 5년 안산의 졸업생 지도'(동경지도연구회, 1932) 기록에 따르면 1916년 수암면의 인구는 1592호 8120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남자가 4112명이었다. 전미영 안산문화원 학예사는 "당시 경기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인원이 비석거리에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남자들 가운데 노인과 아동을 제외한다면 2000여명이란 숫자는 면민 대부분이 당시 시위에 참석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안산지역 3.1독립만세운동 연구조사보고서(안산문화원·안산향토사연구소, 2008)'에 따르면 당시 만세운동은 전날인 3월 29일 비석거리에 모이라는 통문을 각 마을의 구장(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이 곳 뿐만 아니라 3.1운동이 농촌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특징은 시위에 마을 구장(이장)이 적극 가담했다는 점이다.

수암어린이집 앞 공터에 세워진 비석거리 3.1운동 기념비. 곽태영 기자

◆시위 전날 마을마다 격문 나붙어 =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도 마을마다 이장들이 지식인, 청년들과 협의하고 시위운동 계획을 주민에게 알리거나 격문을 붙여 참여를 유도했다. 당시 안산지역에서는 수암동 비석거리 외에도 군자면 장곡리(3월 29일, 4월 4일), 반월면 장터(4월 1일), 대부도지역(4월 1일)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수암리 비석거리 만세시위의 특징은 20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지만 폭력적으로 번지지 않고 평화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전미영 학예사는 "시위가 고조될 때마다 주민들을 설득해 비폭력 시위로 유도, 큰 유혈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시위 주동자는 모두 극심한 옥고를 치렀지만 평화적으로 시위가 전개돼 유족들이 대부분 살아있어 고증이 잘 이뤄졌다"고 말했다. 인근 화성 제암·고주리의 경우 폭력적 항거가 벌어지자 일제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 남아 있는 유족이나 기록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1959년 옛 비석거리 모습(수암마을전시관, 이현덕 제공)


비석거리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익수(1870~1926)는 안산 월피리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3월 30일 인근 성포리 주민들로부터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비석거리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비석거리로 간 그는 시위대 선두에 서서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경찰이 무력진압에 나서자 흥분한 군중들이 과격해졌지만 그는 군중들에게 비폭력을 호소하며 평화적으로 시위로 이끌었다. 다음날 반월면에서도 주민 600여명을 이끌고 평화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독립이 되면 관공서는 국가의 재산이 된다"는 논리로 폭력시위를 주장하는 군중들을 설득했다.

안산 와리(와동)의 대지주였던 홍순칠(1877~1932)은 1919년 3월 29일 와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 다음날 비석거리 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홍순칠은 이 과정에서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라며 농민들을 설득해 만세운동에 참여토록 했다. 그는 비석거리로 가는 도중 수암면 남쪽 밭에서 후일 불참자를 문책하기 위해 참석인원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는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청산하고 토지분배의 실현이란 농민(소작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수탈 소작료인상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이었다.

수암리의 이봉문(1890~?)은 마을 앞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 솔선해 참여한 뒤, 이날 밤 시위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다른 주민들과 같이 몰려가 항의하기도 했다. 경찰에 붙잡혀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조선이 독립하면 지금보다 더욱 행복하게 될 것을 믿고 독립을 희망했기 때문에 시위운동에 참가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라고 당당하게 답변했다.

◆일제 강점기 안산의 계몽·교육운동 영향 = 이현우 안산문화원 향토사 전문위원은 "안산의 3.1운동이 부각되지 못한 이유는 사망자가 거의 없기 때문인데, 면사무소를 불태우지 않은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땅 건물 등이 모두 우리 것이란 생각에서였고 주동자들이 모두 재판에서 떳떳하게 독립의 당위성을 얘기했다"며 "시위는 평화적으로 했지만 독립의지는 강렬했다"고 말했다. 실제 유익수 홍순칠 등 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은 모두 옥고를 치렀고 고문을 심하게 당해 감옥에서 사망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안산지역 3.1만세운동에서 봉건적인 체제를 뛰어넘는 의식, 평화적인 시위가 벌어진 배경에는 일제 강점기 안산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교육·계몽운동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 전문위원은 "안산에서는 최용신으로 대표되는 학교·야학 설립 등 활발한 계몽·교육운동이 전개됐는데 이 같은 맥락에서 3.1운동 당시 봉건체제를 뛰어넘는 농민적 인식, 비폭력 만세운동을 이끌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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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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