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발 새로운 세계질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영국 가디언지 "동-서양 권력균형 전환 가속화 … EU는 추잡한 싸움, 패자될 듯"
지난달 하순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강력한 적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미래 평화의 시기, 정치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판단하기엔 아직 설익다. 연극의 초반부만 보고 전체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의미없다.
영국 일간 가디언지는 12일 "하지만 각국의 지도자와 외교관, 지정학 분석가들은 전 세계가 세기적 전환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며 "한쪽 눈은 코로나19와의 일상의 전투에, 다른 한쪽 눈으로는 코로나19 위기가 어떤 지각변동을 일으킬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념과 권력지형, 지도자, 각국 체제는 세계의 여론 무대에서 혹독한 시험을 치르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지구촌 모든 이들은 나름의 교훈을 이끌어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시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기존의 확실함과 확신은 사라질 것이다.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날은 과거에 알던 날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건의료 부문 투자를 크게 늘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전 대표이자 외무장관을 지낸 지그마어 가브리엘은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국가의 역할을 낮잡아봤다"고 한탄했다. 그는 "다음 세대는 글로벌화에 대해 모자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의 한 공공시설물 담벼락엔 '정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정상이 애초에 문제였기 때문'이라는 낙서가 쓰여 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각국 지도자들은 이제 코로나19 이후 세계질서 전환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UN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헤스는 "강대국들 관계가 지금처럼 악화된 때가 없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한데 뭉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패배할 것이라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싱크탱크들 내에서는 국제적 협력에 대한 논쟁이 아닌, 중국과 미국 가운데 누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리더인지를 놓고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영국의 경우 노동당 지도부는 즉각 국가와 노동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며 지지를 구하고 있다. 공공서비스의 범주를 배달노동자와 소규모 상점주인에게까지 확대했다. 가디언은 "나폴레옹은 한때 영국을 '장사치들의 나라'(a nation of shopkeepers)로 조롱했다"며 "하지만 현 상황에서 그같은 조롱이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고 전했다.
영국에서 현재와 비교되는 과거는 2차 세계대전이다. 영국 역사학자 폴 애디슨이 쓴 '1945년에 이르는 길'(The Road to 1945)에 보면 2차 대전이 영국을 어떻게 좌파로 전환시켰는지 알 수 있다. 애디슨은 책에서 언론인 JL 호드슨이 1944년 9월 쓴 일기를 인용한다.
호드슨은 "실업과 빈민가, 굶주린 자들에 대한 더 이상의 변명은 없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영국인이 더 이상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음을 보여줬다. 전쟁에 쏟은 비전과 에너지, 발명품, 협력 등의 단 절만만 있다면 못할 게 뭔가. 지금의 상황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고루한 사람들의 주장을 박살냈다. 무거운 세금과 식량배급제는 좋든 싫든 영국민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적었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도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국가의 역할을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권보다는 시민사회에서 인식전환이 두드러지고 있다. 쌀쌀맞기로 유명한 영국인들이 공동체 연대의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영국인들은 집 문밖에서 가재도구 등을 두드리며 이들을 응원하고 있다. 그동안 영국이 잃어버린 사회적 자본이 부활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를 위한 더 치열한 토론은 없는 상황이다. 가디언지는 "브렉시트로 힘을 소진한 영국은 자기성찰에 더 많은 힘을 쏟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과 미국, 아시아에서 전환기 논쟁은 확대되고 있다. 공공의 삶은 정지됐을지 모르지만 공공의 토론은 더 뜨거워지고 있다. 모든 것이 논쟁의 주제가 됐다. 경제와 공공 보건의료 사이의 균형 찾기, 중앙화 또는 지역화된 보건의료 시스템의 상대적 장단점, 글로벌화의 취약점, EU의 미래, 포퓰리즘, 권위주의 체제의 내재적 장점 등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글로벌 리더십 경쟁도 유발하고 있다. 호평을 받는 나라들은 코로나19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국가들이다. 대사관 밖에서 격리중인 외교관들은 자국의 위기 대응법을 옹호하는 데 바쁘다. 자국 비판엔 날선 반박을 하기도 한다. 국가적 자부심과 국민 건강이 위태롭다. 각국은 이웃나라가 얼마나 빨리 코로나19 감염곡선을 평탄화하는지 눈여겨보고 있다.
글로벌 비영리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ICG)은 "코로나19는 국제정치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것"이라며 "우리는 현재 두 개의 경합하는 논리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세계 각국이 코로나19를 이기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잘 방어하기 위해 서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ICG는 "코로나19 위기는 자유주의와 비자유주의 국가들 중 극한의 사회적 고통을 누가 더 잘 다루냐를 경쟁하는 혹독한 시험대가 됐다"며 "또 팬데믹 상황이 벌어지면서 세계보건기구(WHO)나 UN과 같은 국제조직의 운영능력뿐 아니라 이 기구들을 떠받치는 가치와 정치적 협상에 대한 기본 가정들도 시험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많은 이들은 동양이 논리싸움에서 서양을 이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피로사회'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 씨는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 기고에서 "유교적 전통에서 비롯한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 승자"라며 "아시아 국민들은 유럽보다 정부에 덜 반항적이고 더 순응적이다. 그들은 국가들 더 신뢰한다. 일상생활은 보다 더 조직적이다. 무엇보다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아시아인들은 디지털 감시체제를 받아들였다. 아시아에서는 바이러스학자와 전염병학자뿐 아니라 컴퓨터공학자와 빅데이터 전문가들도 코로나19에 맞서 싸운다"고 적었다.
그는 "중국은 디지털 감시국가를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항해 성공한 모델로 홍보할 수 있다"며 "중국은 자국 체제의 우월성을 보다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또 "안전의식과 공동체 유대관계에 끌린 서구 유권자들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준비를 갖출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은 이미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 '코로나19 진앙'에서 '세계의 구원자'로 재빨리 변신했다. 젊고 확신에 찬 새로운 세대의 중국 외교관들은 자국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 전 대사로 현재 우파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몽테뉴연구소에 몸 담고 있는 미셸 뒤클로는 "중국은 자국의 정치체제를 홍보하기 위해 코로나19에 맞서 승리했다는 식의 염치없는 논리를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버드대 국제정치 교수인 스티븐 월트는 중국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코로나19는 서방의 권력과 영향력을 동양으로 이동시키는 흐름을 가속화할 것"이라며 "한국과 싱가포르는 최선의 대응을 보여줬고, 중국은 처음의 실수 이후 상황에 잘 대처했다. 유럽과 미국 정부의 대처는 매우 회의적이었기에, '서구'라는 브랜드는 약발이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많은 유럽 좌파들은 권위주의 체제의 확산을 우려한다. 대표적으로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의 얼굴을 한 새로운 형태의 야만주의가 서구에 등장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이와 반대로 인도 전직 총리 만모한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고 현재 인도 아소카대학 방문교수인 시브샨카르 메넌은 "현재까지 과정을 보면 권위주의 또는 포퓰리즘 정부가 팬데믹을 다루는 데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며 "초기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나라들, 즉 한국과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포퓰리즘이나 권위주의 지도자들이 운영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미 스탠퍼드대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위기 대응법의 성패를 가른 것은 이 나라는 권위주의, 저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며 "핵심 요소는 체제가 아니라 그 나라의 능력, 무엇보다 정부에 대한 신뢰"라고 지적했다. 그는 독일과 한국을 그에 부합한 대표사례로 지목했다.
한국은 중국과 달리, 스스로를 코로나19 위기를 최선을 다해 방어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홍보하고 있다. 한국 언론에선 독일이 한국을 따라 코로나19 대규모 검사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미국 컬럼비아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수출의존국인 한국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서구가 글로벌 공급망을 전면 재검토할 경우 장기적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료장비 생산의 집중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명백히 드러났다. 그 결과 적시(just in time) 수입은 줄어들 것이고 국내 원천을 가진 생산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승자라는 명예를 얻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시장을 잃을 위험이 있다.
가디언은 "현재 패자는 '권위주의 정권은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한 스티브 배넌을 논외로 치면, EU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에서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측은 유럽통합론자들이다. 프랑스 싱크탱크인 '자크 들로르 연구소' 부소장인 니콜 네소토는 "EU는 준비도 부족했고 무기력했으며 소심했다. 물론 보건의료 부문이 유럽의 경쟁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단이 없는 것도, 책임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고 비판했다.
가디언은 "유럽 각국이 본능적으로 취한 첫 번째 조치는 국경을 폐쇄하고 의료장비를 각자 쟁여두는 것이었다. 유럽은 결핍의 시대를 맞아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이탈리아는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지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로나19 논쟁은 북유럽과 남유럽 간의 추악한 싸움으로 번졌다. 유럽 공동의 코로나대응채권 발행 여부나 유로존 구제금융기금이 발행하는 신용의 취득 조건을 어떻게 설정할지 등을 두고서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이탈리아가 코로나19 위기를 틈타 폐기된 유로본드 발행안을 다시 꺼내드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북유럽 국가들은 이 채권이 남유럽 국가들의 무책임한 부채를 구제해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탈리아 총리 주세페 콘테는 유로본드 채권 구상을 제안하면서 EU에 "유럽은 역사적 약속을 갖고 있다. 만약 EU가 이 구상에 실패한다면, 유럽은 허물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포르투갈 총리 안토니오 코스타는 네덜란드 재무장관 왑케 호엑스트라의 발언을 "역겹고 옹졸하다"고 비판했고, 스페인 외무장관인 아란차 곤잘레스는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는 1등급 선실에 있다고 해서 홀로 무사할 수는 없다는 점을 네덜란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전 총리 엔리코 레타는 이탈리아를 돕는 데 반대하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들 나라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의 반감이 거세지고 있다"며 "독일 관세청이 국경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대량의 안면마스크를 통관 거부한 다음날 구조장비를 실은 러시아 트럭들이 로마 거리를 지나갔고, 중국에서 보낸 수백만장의 마스크가 이탈리아인들에 전달됐다. 극우정당 동맹을 이끌고 있는 마테오 살비니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그같은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봐라, 우리에게 EU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U의 현재 입장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살비니의 국경폐쇄 구상은 아직 국민적 여론을 등에 업지 못했다. 콘테 총리의 인기가 워낙 높아 쉽사리 그를 흔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콘테 총리는 이탈리아 공화국 역사상 가장 지지도 높은 정치인이다. 마리안 벤트와 같은 독일 개별 정치인들 역시 이탈리아 환자 다수를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에서 독일 서부 쾰른까지 이송할 수 있게 협력하면서 유럽 남북의 갈등의 골을 메우고 있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늘어나고 위기가 아프리카로 확산되면서 EU의 담론은 현재까지 경제구제방안에 어떻게 자금을 조달할지를 놓고 볼썽사납고 이해타산적인 논쟁에 집중되고 있다.
현재 유럽에게 가장 큰 위로는 대서양 건너 미국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저녁 기자회견마다 미국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EU 외교안보 대표 호세프 보렐을 보좌하는 나탈리 토치는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가 영국의 글로벌 파워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코로나19 위기가 미국의 글로벌 파워 몰락을 상징하는 또 다른 '수에즈 운하'가 될지 관심이라고 말했다.
보렐 자문관은 "EU가 처음엔 불안했지만 현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코로나19 협력문제에서도 승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난립하던 국가적 결정의 첫 번째 단계 이후, 유럽은 EU가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전 세계는 처음에 제멋대로 위기에 대처했다. 많은 나라들이 경고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움직였다. 코로나19 위기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협력이냐 분열이냐를 놓고) 현재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아직 이겨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