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75주년 … 미·러·중 새로운 핵경쟁
독일 주간지 슈피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75년이 지났다. 핵확산 금지 조약이 차례로 사라지고 있다. 러시아 미국 중국의 새로운 군비경쟁이 이미 구체화됐다. 산업국가가 핵폭탄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술은 이미 범용화됐다. 더 많은 나라들이 핵폭탄을 갖지 않은 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5개국은 타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다. 핵무기를 갖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이다.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 북한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곧 이란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핵무기가 고삐풀린 듯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아주 심각한 건 아니다. 냉전 이후 핵무기의 두려움은 대체로 사라졌다. 전 세계 주요 핵무기 보유국가들은 먼 옛날 신화적 동물처럼 겨울잠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현실을 기만하는 것일 수 있다.
최근 몇년 동안 군비축소 조약들이 차례대로 허물어졌다. 이란과의 핵협상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 영공개방조약(OST·상대국 군용기에 자국 군사시설 사찰을 허용) 등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주도 하에 와해됐다. 신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역시 만료될 전망이다.
오스트리아 군축 전문가인 니콜라이 소코프는 "각국이 얼마나 많은, 어떤 종류의 핵무기를 배치하느냐 고심하던 1950~6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네바다주에서 새로운 핵실험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네바다주 퇴역 핵실험장은 냉전 당시 1천여번의 지하 폭발로 생긴 크고 작은 분화구가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 핵실험을 하게 되면, 침묵의 30년 이후 새로운 핵무기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확실한 암시다.
반면 러시아는 냉전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핵무기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핵추진 순항미사일 '부레베스트니크'이 백해에서 사고로 폭발해 7명이 죽었다. 또 인공 쓰나미를 일으켜 해안 도시를 쓸어없앨 수 있는 핵추진 메가어뢰를 개발중이다.
미국과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중국도 핵무기를 늘리고 있다. 과거 무기통제조약들에 묶이지 않은 나라다.
새로운 핵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1970년 191개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나라들은 핵무기를 추진하지 않는다고, 핵을 가진 나라들은 핵무기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5대 핵강국들이 협약을 지킬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국제연합(UN) 고위 군축 대표인 이즈미 나카미츠는 "핵군축 조치는 중단됐다. 오히려 지금은 역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 적국을 가루로 만든다
2009년 4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프라하에서 "미국은 핵무기 없는 세상에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겠다고 약속한다"고 천명했다. 오바마는 같은 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0여년 뒤 전 세계는 새로운 군비경쟁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시작한 건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핵탄두 숫자와 전략적 공격무기 운반수단을 줄이기로 한 '신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2009년 만료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대체한 것이다.
하지만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비준을 받아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핵무기의 현대화 프로그램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미군의 첫 번째 스마트폭탄을 포함해 새로운 무기가 개발됐다. 핵폭탄 B61-12 모델은 350킬로그램으로 항공사진을 활용해 목표물을 정밀 타격할 수 있다.
내년 2월 신 전략무기감축협정이 만료된다. 미 정부는 협정 연장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이 협정이 종료되면 미러 핵강대국의 군비경쟁을 막는 마지막 장벽이 사라진다.
연장 여부 협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 가닥 희망의 줄기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 협상가였던 로즈 고테묄러는 낙관적이다. 그는 "만약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협정 연장은 거의 100%"라며 "트럼프 대통령 역시 단기간이나마 협정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다. 향후 10년 동안 핵무기 운송수단의 현대화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전망했다.
고테묄러는 "트럼프 대통령도 최소 한 가지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며 "과거 러시아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 연장조건으로 미사일방어영역을 걸고 넘어졌다. 하지만 현재는 그런 조건이 없다. 러시아는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협정을 지속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반면 새로운 군비경쟁이 지속되면서 미국은 이에 전념하고 있다. 내년 트럼프 대통령은 핵무기 관련 예산을 현행 373억달러에서 445억달러로 늘리길 원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군축특사인 마샬 빌링스리는 최근 "우리는 군비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적국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며 "미국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소련을 넉다운 시켰듯, 러시아와 중국도 뒤처지게 만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핵군축과 관련해 추가적인 이정표는 미국과 구 소련의 INF협정이다.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탄도 및 순항미사일의 생산과 실험, 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협정이 허용하는 거리를 초과하는 범위의 육상 순항 미사일을 개발하면서 이를 위반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협정 위반을 강력 비난했다. 독일을 포함한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도 항의했다. 결국 미국은 올 2월 INF를 탈퇴했다.
러시아 : 우리가 앞서 있다
핵무기와 관련해 미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국은 러시아다. 국내총생산(GDP) 기준에서 러시아는 크게 뒤처진다. 미국의 1/12 수준이다. 하지만 핵무기는 여전히 강력하다. 6000기의 핵탄두를 갖고 있다. 그중 1500기는 육상과 해상, 공중에 배치돼 있다. 러시아와 미국의 핵무기는 전 세계 총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양국의 핵무기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핵무기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필요가 없는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 반면 전 세계 다른 강대국들은 러시아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군축 전문가 소코프는 "군비경쟁에서 누가 앞서는지는 정하기 어렵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며 "순항미사일의 경우 육상인지 해상인지 공중인지에 따라 다르지만 러시아는 대체적으로 뒤처졌다. 미사일 방어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러시아는 극초음속 무기에서, 미사일방어시스템을 우회하는 수단에서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러시아가 미국과 동등함을 추구할 수 있다면, 그건 단연 핵무기 부문다. 러시아 입장에서 핵무기는 주권의 보증자다. 때문에 러시아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시스템을 뚫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이 2001년 탄도탄 요격유도탄을 제한하는 ABM조약에서 탈퇴한 뒤, 러시아는 전략적 안정에 제기하는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미국의 ABM 폐기는 현재의 핵경쟁에 이르게 한 원인이다.
러시아가 이미 보유하거나 개발중인 핵무기는 주목을 끈다. 사거리 제한이 거의 없는 '부레베스트니크' 핵무기 순항미사일이 있다. '포세이돈 핵어뢰'는 해변도시를 박살낼 수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인 '사르마트'는 남극에서 미국을 타격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극초음속 활공체로, 핵탄두를 실을 수 있다. 이미 실전배치됐다.
사르마트는 2021년 배치된다. 이런 무기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미국의 미사일방어시스템을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소재 '국제안보센터' 대표인 알렉세이 아르바토프는 "러시아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과거 뒤처졌다. 하지만 이젠 앞섰다. 우리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핵무기 전략이 공세적인지 방어적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2018년 미 국방부가 트럼프 백악관에 제출한 '핵태세검토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제한적이나마 핵 선제공격을 위협하고 실행한다"고 평가했다. 그 평가에 따라 미국은 낮은 폭발력을 가진 전술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핵 전문가들은 미국의 판단을 반신반의한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선제 타격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6월 '러시아연방의 핵억제력에 대한 기본원칙'을 세웠다. 외부의 의구심을 떨치기 위한 의도였다. 이 원칙은 '러시아연방은 핵무기를 억지력의 수단으로서만 고려한다. 핵무기는 극단적이고 강제적인 조치로만 사용될 것'이라고 돼 있다.
이는 2010년 이후 러시아 핵전략을 반복하는 것이다. 국제안보센터 아르바토프 대표는 "기본원칙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모호하고 이해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현존 군축조약에 대한 푸틴의 입장은 불확실하다. 러시아는 INF협약을 위반하면서 사실상 파기에 이르게 했다. 푸틴 대통령은 INF협약이 과거 소련의 '단독 군축'이었다며 비판했다. 그는 "당시 소련 지도자들이 그토록 불평등한 문서에 왜 서명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거대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뤄부포'는 비밀 핵실험장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끝에 있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개발한 중국의 첫 번째 원자폭탄이 1964년 이곳에서 실험됐다. 중국은 1996년까지 뤄부포에서 45번의 핵실험을 했다. 그곳은 심지어 한동안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중국은 자국의 핵무기에 자부심을 갖는다. 하지만 여전히 2등급 핵강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중국이 320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러시아와 미국 보유량의 약 1/20이다. SIPRI는 또 중국의 핵무기 중 즉각 배치가능한 건 없다고 본다. 게다가 중국은 1960년대 이후 선제타격을 배격하는 방어적인 핵무기 독트린을 추구하고 있다. 위장책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카네기칭화 국제정책센터의 군사전문가인 자오퉁은 "중국이 약소한 핵강국인지 여부를 우리는 전혀 모른다는 게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핵탄두 숫자를 공식적으로 공개한 바 없다"며 "현재 3위 핵강국으로 보이지만, 중요한 점은 중국이 핵탄두를 대량으로 늘리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특히 탄도미사일에 열중하고 있다. 전 세계 최대 규모다. 군축협약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중국은 특히 500~5000킬로미터 중거리 미사일 부문에 강점을 갖고 있다. 자오는 "중국에게 중거리 미사일은 전략적 대륙간 탄도미사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중국이 휘말릴 수 있는 분쟁은 지역 수준에서 발발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대만과의 분쟁이나 남중국해에서의 분쟁 등"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INF협정에 구속되지 않는다. 중국 핵무기의 대부분은 지상에 보관돼 있다. 따라서 적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때문에 중국은 점차 잠수함 기반 핵무기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우려는 미국이 점차 강력한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개발한다는 점이다. 2017년 북한의 핵프로그램이 수면 위로 올랐을 때, 한국은 미국의 사드 공중방어 시스템을 배치하기로 했다. 중국은 사드의 고출력레이더가 또한 자국을 염탐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강력 항의했다.
중국 내부에선 핵억지능력을 대규모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의 편집인 후시진은 "핵탄두 숫자를 1000기로 신속히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핵 선제공격은 없다'는 독트린은 마오쩌둥 시대로 거슬러오르지만, 이 역시 신성불가침은 아니다.
카네기칭화 센터의 자오퉁은 "중국 군부의 다수는 선제공격 배제 전략을 여전히 고수한다"며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권력관계를 매우 냉철하게 본다"며 "약자는 결국 강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덧붙였다.
중국이 향후 핵탄두 수를 두 배 늘릴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전략적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5와 둥펑-41에 실을 수 있는 다탄두 핵미사일도 포함된다.
중국은 군사력을 현대화해 미국과의 격차를 좁힐 때가 왔다고 보고 있다. 자오퉁은 "중국은 핵무기를 줄이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군사력을 제한하면 안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전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중국도 핵군축 협상장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성사되지 않았다.
미국의 전직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는 최근 "중국을 신전략무기 감축협정에 끌어들이는 건 이론상 괜찮은 구상"이라며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중국이 협정에 참여하면서 얻는 이득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불확실성
'국제안보센터' 아르바토프 대표는 "냉전 기간 동안 축적된 모든 핵무기는 히로시마에 투여된 원자폭탄의 150만배 정도였다. 오늘날엔 10만배로 줄었다"며 "그럼에도 인류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건 핵폭탄 숫자가 아니다. 핵보유국이 점차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이란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들 국가에게 핵무기는 일종의 보험이다. 그들이 핵폭탄을 들고 있는 한 상대방은 물리적 개입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 이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중요한 평화의 보증자가 사라졌다. 미·소 양국이 핵무기를 줄이게 된 결정적 이유는 75년 전 핵무기의 파괴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코프는 "지금 세대는 핵전쟁이 얼마나 두려운지 망각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핵의 사용이 불가피해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1970년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으로 마련된 핵확산금지조약이 사실상 실패 수순으로 접어들면서, 제3국가들을 중심으로 '핵없는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겼다. 2017년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UN 협상라운드에서 채택됐다. 현재까지 40개 국가가 핵무기금지조약을 비준했다. 50개국이 비준하면 효력이 발생한다. 내년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핵무기금지조약이 효력을 가져도 기껏해야 정치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다. 법적으로 별반 기대할 것은 없다. 핵무기 보유국들 중 금지조약에 서명할 나라들이 없기 때문이다. NATO 회원국 중 어느 나라도 참여하지 않았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군비경쟁은 이미 오래 전 시작됐다. 핵무기를 없애는 것은 현재로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