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코로나 백신' 개발 신경전
러시아 깜짝 발표에 노골적 의구심 … 미국, 유럽 제약사들도 속도전
코로나19 백신개발을 놓고 세계 각국이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세계최초로 코로나 백신을 공식 등록했다고 깜짝 발표를 하자 미국 유럽 등지에서 노골적인 의구심을 표출했고, 러시아가 다시 반박하는 등 신경전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국립 전염병·미생물학 센터'와 국방부 산하 제48중앙과학연구소가 함께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이 보건부 승인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자신의 딸도 백신을 맞았다며 안전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 같은 발표에 대해 전문가들은 의구심을 제기했다.
해당 백신은 임상시험 최종단계인 3상 시험을 아직 거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통합 실시한 1상과 2상 시험도 38명을 상대로 이뤄진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결과도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백신 승인 발표가 나자마자 미국 영국 등의 전문가들이 의구심과 함께 우려를 나타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은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가 있다고 러시아가 입증했는지 의문스럽다"면서 "백신의 제조가 해당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니얼 살몬 미국 존스홉킨스대 백신안전연구소장은 뉴욕타임스(NYT)에 "러시아가 백신에 위약효과를 넘어서는 효과가 있는지와 접종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지를 검증하는 3상 시험을 건너뛰는 위험한 걸음을 내디뎠다"면서 "정말로 겁나고 위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다니 알트만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면역학과 교수는 "안전성과 효과성보다 부작용이 더 큰 백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악화시킬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보건당국은 이런 반응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하일 무라슈코 보건부 장관은 12일 브리핑에서 "외국의 동료들이 아마 어떤 경쟁심과 러시아 제품의 경쟁력 우위를 느끼면서 우리가 보기에 전혀 근거 없는 견해들을 밝히고 있다"면서 "하지만 러시아 백신은 일정한 임상 지식과 자료를 확보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가 백신을 개발한 기법은 잘 연구된 것이고 안전한 것"이라면서 "이 기법으로 이미 다른 제품의 합성과 생산이 이루어진 바 있다"고 설명했다.
또 "우리는 백신의 해외 생산도 제안하고 있다"면서 백신 개발에 투자한 러시아 국부펀드인 '직접투자펀드'(RDIF)가 외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백신 개발을 주도한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국립 전염병·미생물학 센터' 소장 알렉산드르 긴츠부르크는 이날 "오는 12월이나 내년 1월까지 매월 500만회 분량의 백신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춰 1년 동안 전 국민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발표에 대해 WHO는 환영하면서도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WHO는 11일 "러시아 당국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으며 백신의 WHO 사전자격인정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여러 백신 후보물질이 개발되는 속도에 고무돼 있으며 이들 일부가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입증되기 바란다"면서도 "절차를 가속하는 것이 안전성과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웃나라들의 반응도 갈린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 백신의 안정성에 대한 기본적인 데이터가 확보돼야 도입 및 접종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며 원론적인 입장만 밝힌 상태다.
이에 반해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10일 밤 TV 연설을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코로나19 백신 무상 공급을 제안했다"며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연구에 엄청난 신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어 "백신이 도착하면 내가 첫 시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나한테 잘 듣는다면 모든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도 성명을 통해 "필리핀은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 공급 그리고 생산에 있어 러시아와 함께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공방과는 별개로 세계 각국은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WHO에 따르면 세계 각국에서 개발 중인 코로나19 백신은 150개 이상으로 이 가운데 26개가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 돌입한 상태다. 나라별로는 미국, 중국, 영국의 주요 제약사들이 선두권에 있다는 평가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와 공동으로 백신을 개발 중인 미 바이오기업 모더나, 독일 바이오엔테크와 손잡은 미 대형제약사 화이자는 지난달 27일 동시에 각각 3만명 규모의 3상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3상 시험을 통과하면 보건당국 승인을 거쳐 백신을 곧 시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르면 연말에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존슨앤드존슨, 노바백스, 이노비오 등 초기 임상시험을 진행한 다른 미 제약사도 많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만간 3상 시험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전망이다.
중국 기업들도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시노백 생물유한공사와 함께 지난달 21일 코로나19 백신 3상 시험에 들어간 브라질 상파울루주 부탄탕연구소의 지마스 코바스 소장은 지난 6일 하원에 출석해 "10월 중에 코로나19 백신을 보건당국에 정식으로 등록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중국 국유 제약회사인 시노팜(중국의약집단) 역시 지난달 중순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이달 바레인에서 각각 3상 시험에 돌입했다.
영국도 백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함께 백신 개발에 나선 아스트라제네카는 초기 임상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조만간 3상 시험에 착수하기로 했다. 또 프랑스 사노피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양사가 공동 개발하는 실험용 백신을 9월부터 임상시험 할 예정이다.
이 같은 경쟁과 속도전은 백신개발을 앞당길 수 있지만 자칫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정치적 의도에 따라 백신개발 속도만 앞당길 경우 안전성이나 효과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을 뿐 더러 자칫 부작용까지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