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공급망 블록화, 비효율성 불가피

2022-08-05 10:31:33 게재

▶ 8월 3일자 '반도체 공급망 온쇼어링은 불가능'에서 이어집니다

반도체 공급망 구축 러시는 미중 기술전쟁에서 촉발됐다. 2019년 미국 트럼프정부는 중국 기술기업 화웨이가 미국의 반도체 기술을 활용할 수 없도록 제재했다.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였다. 미국의 극단적 조치에 중국은 범국가적 캠페인으로 맞대응했다. 미국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주요 분야의 공급망을 자체적으로 구축한다는 국가적 목표를 세웠다.

이런 움직임은 2020년 말 글로벌 흐름으로 발전했다. 전례없는 반도체 부족 상황으로 주요국의 자동차 생산이 큰 차질을 빚으면서다. 글로벌 경제성장률과 일자리가 큰 위협을 받았다.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부족으로 2021년 GDP 중 2400억달러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미국 자동차 생산량은 전년보다 770만대 줄었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공급망 확보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와 금속 화학 산업가스 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반도체 부족에 경제성장, 일자리 위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설계도구와 제조 패키징 재료 장비 등의 분야를 망라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엔 최소 50개의 관문(chokepoint)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는 특정 부품이나 장비, 재료가 한 국가 또는 한 지역에 65% 이상 집중된 경우로 정의된다.


BCG에 따르면 미국은 반도체 설계도구와 최소 23개 유형의 필수장비를 지배한다. 일본은 웨이퍼와 포토레지스트 등 주요 재료, 유럽은 산업용 가스의 지배적 공급자다.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공급한다. 대안이 아예 없는 장비다. EUV 장비는 7나노미터 이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집적회로 위에 복잡하고 정교한 패턴을 그리는 장비다. 반도체 기업들이 생산용량을 늘리고 싶어도 ASML의 장비생산 지연으로 애를 먹는다.

ASML은 여러 모델의 장비 생산 대기시간이 2년으로 확대됐다고 밝혔다. 리소그래피 장비에 들어가는 렌즈와 미러 등 필수부품의 공급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EUV 장비 속 진공실에서 EUV 빛을 만드는 건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독일 산업용 레이저 제조사 '트럼프', 광학전문기업 '자이스'가 ASML 장비에 필수부품을 공급한다. 자이스는 "극히 미세한 불규칙성이라도 렌즈의 수차(aberrations)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수차는 점 물체에서 나온 여러 가닥의 광선(빛살)이 결상광학계를 지나 상을 만들 때, 그 광선 모두가 상점에 모이지 못하고 일부가 벗어나는 현상이다. 자이스 CEO 안드레아서 페케르는 "우리 회사의 EUV 미러는 레이저빔을 반사해 달 표면에 있는 탁구공 크기의 물체를 조준할 정도로 정교하다"고 자랑한다. 자이스와 ASML은 30년 가까이 단짝처럼 협업하고 있다.

ASML이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다른 광학 협력업체를 찾는다고 할 때, 공동개발 작업으로 가시적인 결실을 맺기까지 최소 5~10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일본 렌즈 제조사의 한 CEO는 닛케이에 "향후 수년의 기간이 주어져도 자이스를 대체할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쉽고 신속히 복제할 수 있는 공급망이나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치 않은 반도체 제조공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과 용제는 이른바 'PPT'(part-per-trillion) 농도에 다다라야 한다. 즉 1/1조의 농도를 맞춰야 한다. 산업용 가스의 순도는 99.9999% 수준이어야 한다. 이른바 '6N'으로,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단계다. 반도체재료 유통기업 '와리 인더스트리얼'에 따르면 실리콘 웨이퍼의 경우 칩이 놓이는 기초 원판 재료는 무려 9N 수준에 다다라야 한다. 순도 99.9999999%다.

플루오로폴리머의 한 종류인 'PFA'를 공급하는 일본 다이킨공업의 한 중역은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칩 제조공장뿐 아니라 주요 화학품, 정밀부품 등 전체 공급업체들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며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 수년이 걸리지만, 화학물질 공장은 그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화학품이 야기할 수 있는 피해와 관련한 광범위한 환경평가, 화학품을 다루는 데 필요한 각종 규제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실제적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수백억달러를 투자해도 쉽게 극복하기 힘들다.

중국은 2014년 '중국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 1단계를 시작했다. 이른바 빅펀드다. 1387억위안(207억달러)을 투자했다. 2019년 추가적으로 2040억위안을 투자했다. 첫번째 단계에서 민간과 지방정부들로부터 5000억위안 이상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빅펀드의 2번째 단계에선 1조위안의 투자금을 끌어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덕분에 중국의 반도체 생산량은 늘었다. IC인사이트 데이터에 따르면 2021년 국내 수요의 16.7%를 자체 공급했다. 10년 전엔 12.7%였다. 하지만 여전히 갈길이 멀다.

전세계 반도체 과잉생산 가능성

닛케이아시아는 "주요 국가들이 자국에 반도체 공급망을 새로 구축한다는 건 전세계 과잉생산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들은 "각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반도체공장이 건설되는 것이라면 이는 비경제적 투자"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전자제품에 대한 소비지출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사방에서 경기침체 이야기가 들린다. 최소 단기적 측면에서 반도체 수요전망은 불확실해졌다.

독일 반도체 부품 기업인 '머크일렉트로닉스'의 공급망 부사장인 케빈 고먼은 각국의 반도체 공장이 경제성을 띨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만약 핵심 고객사들이 리스크를 함께 부담하는 조건에선 반도체 공급망의 지역화가 나름 합리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의 반도체·재료 부사장인 옌스 리버만은 "공급망을 온셔어링하려는 노력은 매우 많은 비용, 매우 장기적인 여정을 요한다"며 "새로운 공장의 가동률이 수요를 맞춘다는 조건, 그 수요가 충분히 높다는 조건에서만 정당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반도체업계는 장기적으로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일상의 아이템들이 서로 연결되고 정교해지는 상황이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점차 전기차로 바뀌고 결국 자율주행차로 가게 될 것이다. 2021년 6000억달러 규모였던 반도체시장은 2030년 1조달러 규모가 될 전망이다.

미국 반도체 공급업체 '인테그리스'의 CEO 베르트랑 로이는 "반도체시장이 1조달러 규모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반도체 공급망의 일부를 지역화하면서 적절한 레버리지를 가져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모든 국가가 모든 생산라인을 한곳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ASML은 글로벌 생태계와 연계되는 조건이라면 반도체와 관련한 지역별 투자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비효율성은 불가피하다. 이 기업 대변인은 닛케이아시아에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는 비효율로 이어진다. 결국 고객과 기업, 정부는 고비용과 혁신둔화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구획화가 가져올 고비용, 혁신둔화

대만 반도체 화학품 공급업체 '산푸 케미컬'의 CEO 사이먼 우는 "지정학적 갈등과 무역장벽은 반도체산업이 발 디뎠던 세계화를 허물고 있다"며 "자유무역 시대는 이제 사라졌다. 각국과 업계는 향후 닥칠 어려움을 직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우 CEO는 "특정 천연자원이나 핵심기술을 통제하는 나라들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노려 그같은 자원을 보호하고 지렛대로 쓰려고 할 것"이라며 "반도체기업들이 할 수 있는 건 잠재적 공급 차질을 완화하기 위해 동맹국과 협력국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지역,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서 수입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인광석이 없다면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인산을 생산할 수 없고, 형석이 없다면 플루오로폴리머를 생산할 수 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 모든 광물과 천연자원을 우리 옆으로 옮길 수 없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보스턴컨설팅그룹 반도체·재료 대표 J. T. 수는 "반도체 부족 상황은, 불필요하더라도 일부 시설을 지어야 하는 때임을 시사한다. 반도체업계는 충격을 흡수할 완충재를 가져야 한다"면서도 "한나라 한지역이 100% 자급자족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반도체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배한다는 건 현재도, 미래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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