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랑기부제, 일본에서 배운다 | ②민간제안 130여개 안건 모금 허용한 사가현

모금 시민조직만 113개 … 연간 83억 모금

2023-06-14 10:53:45 게재

인구 80만 사가현, 지정기부 시초

1형당뇨 치료제 개발비 71억 모아

"내가 낸 기부금이 천연기념물을 보호하는데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한 기부자가 고향세를 모금 중이던 사가현에 이 같이 요청했다. 특정한 활동에 기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요구였다. 이 전화 한통은 2008년부터 시작한 일본의 고향세 제도를 '비영리민간단체(NPO) 지정형 기부'로 전환한 계기가 됐다. 인구 80만명인 사가현이 1788개 일본 지자체의 고향세 제도에 변화를 이끌었다.

일본 사가현에 근거를 둔 비영리민간단체 '1형 당뇨 네트워크'는 2014년부터 불치병인 1형 당뇨 치료제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을 계기로 사가현은 고향납세 모금 방식을 '지정기부'로 전환했고, 이 제도는 현재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진은 모금액이 가장 많은 2016년과 올해 1형 당뇨 네트워크의 고향세 모금 현황이다. 사진 공감만세 제공


◆A4 한 장이면 시민사회조직 결성 = 일본 규슈 북서부에 위치한 사가현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여행한 적 없는 현'을 조사하면 늘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지자체였다. 다른 지방 지자체들과 마찬가지로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이나 인근 후쿠오카 등으로 인구가 유출되면서 소멸 위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가현이 최근 고향세 제도의 모범 지자체로 부각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고향세 모금을 위해 주소지를 다른 지역에서 사가현으로 옮긴 비영리민간단체만 12개다.

사가현은 지정형 기부 제도를 도입하기 전부터 시민단체에 대한 보조금 지원사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덕분에 다른 지자체에 비해 민간단체들의 활동이 왕성했다. 기부자들이 요구하는 지정형 기부가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또 모금 주체를 기존 비영리민간단체뿐만 아니라 봉사단체 자치회 부인회 등 다양한 조직을 포괄한 시민사회조직(CSO)으로 확대했다. 특히 A4 용지 한장 정도의 서류만 내면 누구든 CSO를 만들어 등록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사가현에서 1년 이상 공익활동을 하고 정치·종교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활동이든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놓았다.

그 결과 사가현에서 고향세 모금을 위해 활동 중인 시민사회조직은 2022년 기준 113개나 된다. 또 이들이 모금을 위해 내건 사업은 130개, 모금액은 83억원에 이른다. 와시자키 료코 사가현 협력추진담당은 "고령화와 인구소멸 등으로 사회문제가 날로 증가하고 있어 이를 행정 영역에서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며 "사가현은 시민사회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기부자들이 뜻을 함께 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 힘으로 치료제 개발' 자부심 = 사가현의 지정형 기부 제도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1형 당뇨 네트워크'다. 이 단체는 불치병인 1형 당뇨의 치료제 개발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2014년부터 사가현에서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고 고향세 모금을 시작했다. 불치병인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아이들이 스스로 팔뚝에 인슐린주사를 찔러 넣는 현실을 알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2014년 모금을 시작한 첫해 두달 만에 1억원이 넘게 모였다. 모금이 가장 많았던 2016년에는 6억4000여만원이 모금됐다. 지난해까지 9년간 모금액은 71억8479만원에 이른다. 올해는 모금을 시작한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모금액이 목표액의 절반을 넘는 1억1000만원이나 된다.

이 단체는 모금한 돈을 도쿄대 국제의료연구센터 등 20~30개 연구기관에 분산 지원하고 있다. 이 단체 대표 이와나가 코조씨는 "정부도 하기 힘든 일을 시민단체가 시민들의 기부로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일본 국민들에게 생겼다"며 "고향세 제도를 통해 이 같은 꿈을 함께 꿀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소규모·긴급 모금도 가능 = 사가현의 어린이식당 사업은 민간에서 시작해 지자체 사업으로 확산된 사례다. 2016년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밥을 먹이려고 시작한 사업이다. 첫해 437명이 기부해 1억3278만원을 모금했다. 여기서 437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 사업은 대다수 국민, 대다수 시민이 함께하지 않았다. 고작 437명이 동의해 시작한 사업이다. 하지만 1년 만에 지자체가 관련 예산을 편성해 지원하기 시작했다. 처음 11개로 시작한 식당은 지금은 8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사업 형태도 진화해가고 있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지금은 푸드뱅크 사업, 장학금 지원 사업 등으로 확산 중이다. 그만큼 파급효과가 크고 사회적 영향력이 커졌다. 야마다 첸이치로 사가현 미래창고기금 대표는 "이런 제도를 행정에만 맡기면 확장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라며 "민간이 함께 할 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신속한 모금·집행도 장점이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사가현에서 고향세 모금활동을 벌이던 100여개 민간단체들도 형편이 어려웠다. 그러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이 시작됐고, 불과 며칠 만에 9000여만원이 걷혔다. 사가현이 사전에 모금액과 같은 금액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한 덕분에 1억8000만원을 단체들에게 지원해 활동을 도울 수 있었다. 이 모금 역시 불과 22명이 참여했을 뿐인데도 실행이 가능했다. 권선필 목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특정 분야 또는 지역에만 적용되는 소규모 프로젝트는 행정이 책임지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사가현은 이런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방안 중 하나로 고향납세 제도를 잘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향사랑기부제, 일본에서 배운다" 연재기사]

일본 사가현 =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김신일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