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구 금지’ 뒤집기가 재소환한 ‘무능’ 키워드
정부, 여론 비판 거세지자 “사후 관리 위주로 진행”
만5세 입학-주69시간 근로 등 오락가락 정책 재판
R&D 예산 예타 폐지 등 냉온탕 정책 기조 이어져
여 당권주자들도 비판 … 야 “무책임·아마추어 국정”
국내 안전 인증 없는 제품의 해외직구 금지령을 정부가 철회하면서 ‘아마추어 정부’ 논란이 재점화됐다. 기존에 뜬금없이 발표했다가 단시간 내 철회됐던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주69시간 근로제, 외국어고 폐지 등을 줄줄이 상기시키며 여론 악화에 한몫을 하는 분위기다.
여권 내에선 총선 패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애써 쌓았던 점수를 이번 논란으로 다 말아먹었다는 한탄이 나온다. 여당 당권주자들은 한목소리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면서 현 정부와 거리를 벌리고 나섰다. ▶관련기사 17면
19일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은 “국내 안전인증을 받지 않은 80개 품목의 해외 직구를 사전적으로 전면 금지·차단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2차장은 “위해성이 없는 제품의 직구는 막을 이유가 없고 막을 수도 없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안전성 관리 관련해선 “사후관리 위주로 진행하고, 위해성이 확인된 확인된 경우에만 반입을 차단하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정부는 16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어린이용품, 전기·생활용품 등 80개 품목에 대해 국가통합인증마크(KC)가 없으면 해외 직구를 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알리익스프레스·테무같은 해외직구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유아용품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는 등 안전우려가 커지자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선택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정치권에서도 잇따라 비판적인 입장이 나오자 사흘 만에 ‘직구 금지령’을 철회했다.
정부의 냉온탕식 기조변화는 연구개발(R&D) 정책에서도 지적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성장의 토대인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전면 폐지하고, 투자 규모를 대폭 확충하라”고 지시했다. R&D 예타 완화나 선별적 면제는 정부 차원에서 거론된 바 있지만 R&D 부문에 한해 예타를 전면 폐지하기로 한 것은 예상을 벗어난 고강도 조치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같은 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올해 R&D 예산이 삭감되면서 논란이 확산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타 자체를 폐지하는 것는 예산낭비를 막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푸는 격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R&D 예산 삭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증액과 예타 폐지 역시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이밖에 의과대학 증원에 반발하며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들에 대한 처분도 두 달 이상 유예되면서 공정성·형평성 훼손 우려가 나온다. 대통령실은 19일 수련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등 행정처분 이행 여부와 관련해 “전공의들의 행동변화 여부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최근 법원의 결정을 통해 집단행동을 한 이유가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판단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공의들이 내년도 전문의 자격시험을 치르려면 수련병원을 이탈한 지 3개월 이내에 복귀해야 한다. 집단행동 시작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20일이 복귀 시한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개별적인 사유 소명에 따라 개인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전공의 행정처분은 이런 시점(이탈 3개월)을 전후로 한 전공의들의 행동 변화에 달려있다”며 “정부는 처분의 시점, 수위, 방식 등에 대해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올해 2월 29일을 시한으로 미복귀 전공의에 대해 면허정지 및 고발 등 사법절차를 예고했지만 총선을 앞두고 행정처분을 유예해준 상태다. 20일부터는 자격시험 응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전공의들이 잇따를 전망이다.
이같은 정책 혼선은 윤석열정부 초기에 홍역을 치렀던 만5세 초등학교 입학, 주69시간 근로제 등의 기존 뒤집기 사례도 재소환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정책 뒤집기가 이어지면서 준비 안 된 정부, 아마추어 정부라는 낙인이 찍혔다가 좀 나아지는가 했더니 또 시작되게 생겼다”고 우려했다. 총선 민심을 강타한 ‘무능’ 키워드가 이번 사태 때문에 또 한번 동력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야당도 “무책임한 아마추어 국정은 어느새 윤석열 정권의 특질이 됐다”(이해식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 “정부 정책을 잘못 설계하는 무능, 뒷일은 나 몰라라 일단 발표만 하고 보는 무책임”(배수진 조국혁신당 대변인)이라며 윤석열 정부의 무능을 콕 집어 비판했다.
이번 논란이 당권 경쟁을 앞둔 여권에선 현 정부와 ‘차별화’ 쪽에 힘을 싣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관전 포인트다.
당권 출마설이 끊이지 않는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18일 페이스북 글에서 “KC인증 의무화 규제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면서 “적용범위와 방식이 모호하고 지나치게 넓어져 과도한 규제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 전위원장에 앞서 유승민 전 의원도 “안전을 내세워 포괄적으로 해외직구를 금지하는 건 무식한 정책”이라고 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당선자도 정부의 정책 철회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졸속 시행으로 인한 부작용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가세했다.
김형선 이재걸 기자 egoh@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