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광복절 두 동강 낸 용산의 고집

2024-08-13 12:59:59 게재

‘용산의 고집’이 가장 중요한 국가적 행사인 8.15 광복절 경축식마저 두 동강 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독립유공자 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논란이 불거진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를 13대 독립기념관장에 임명했다. 역대 11명 독립기념관장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이 아닌 경우는 김삼웅, 한시준과 김 관장 뿐이다.

대표적인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의 단체인 광복회는 김 관장의 역사관을 문제삼아 15일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한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불참한다면 1965년 광복회 창립 이후 정부 광복절 행사에 불참하는 건 처음이다. 광복회는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이 일본이라고 한 사람을 어떻게 민족혼을 세워야 하는 독립기념관장에 앉힐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25개 독립운동가 선양 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민주당 등도 불참의사를 밝혔다.

광복회 “건국절 추구하는 정부 태도 안바뀌면 광복절 행사 불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광복회장은 “친일을 반민족이 아니라는 사람을 관장으로 임명한 것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배를 합법화시켜주고 독립운동을 헛수고 헛발질로 치부하는 것으로 이는 후손들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마디로 1948년 건국절을 만들겠다는 의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부가 근본적으로 1948년 건국절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광복회는 광복절 행사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건국절’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이 아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김형석 관장은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을 시작해 1948년에 완성했다고 본다”며 논란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뉴라이트가 아니라며 사퇴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밀정이 자신을 밀정이라고 하느냐”라며 비판을 이어갔다.

건국절 논쟁은 새삼스런 건 아니다. 2008년 이명박정부는 광복절 행사를 ‘건국 60주년 행사’로 추진하려 했으나 광복회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유인촌 문화관광부장관이 정부를 대표해 광복회를 방문해 사과했다.

이번 논란도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윤석열정부는 ‘이명박정부 시즌 2’로 평가될 정도로 정부 주요 요직에 뉴라이트 인사나 이명박정부 시절 사람들을 중용하고 있다. 정부와 서울시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이다. 광복회 등은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나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이런 흐름 속에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윤 대통령도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해 관련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이승만의 건국을 위한 준비운동으로 정의한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이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관련 단체의 반발이 뻔한 데 윤 대통령이 ‘반쪽’ 광복절을 감수하면서까지 인사를 강행하는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대통령에게 인사권이 있으니 토 달지 말라”는 뜻일까. 어차피 ‘반대를 위한 반대’이니 무시해도 좋다는 판단에서일까. 윤 대통령 자신의 역사관에 기반한 소신행보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윤 대통령과 용산 참모들은 이번 사태를 가볍게 치부해선 곤란하다. 이종찬 회장이 윤 대통령을 향해 “배신감을 갖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하고 ‘밀정’이란 표현까지 썼다. 이 회장은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지지 시국선언’을 하고 멘토를 자처했던 사람이다. 광복절 참석 거부를 ‘정치적’으로 해석해선 곤란하다.

광복절 행사 파행으로 치러지면 국정 더 꼬일 것

여야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국정은 파행 상태다. 최근 국회에서 시급한 민생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는 등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런 시점에서 대한민국 정체성과 관련된 광복절 행사가 반쪽으로 치러지고 역사논쟁이 정쟁으로 흐를 경우 국정파행은 더 꼬일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의 말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여서 평가와 해석이 다양할 수 있지만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 소모적인 정쟁에 휘말려선 답이 없다.

윤석열정부는 지난 총선에서 중간평가를 받았다. 총선 패배의 주요 원인이 ‘불통’이었다.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보듯 보수 지지층 내에서도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김형석 관장의 자격여부와 별개로 윤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단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차염진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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