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밸류업정책의 시금석 두산과 SK
두산그룹은 지난달 11일 사업구조 재편계획을 발표했다. 두산에너빌리티 자회사로 돼 있는 두산밥캣을 떼어내 두산로보틱스와 합병시키는 것이 골자다.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합병비율은 1 대 0.63으로 정해졌다. 두산밥캣 1주당 두산로보틱스 0.63주의 주식으로 교환하게 되는 것이다. 두산밥캣은 매년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 알짜기업으로 꼽힌다. 반면 두산로보틱스는 설립 이후 한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 이렇게 알짜회사와 적자기업을 합친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게다가 합병비율도 공정한지 의문이 제기된다.
SK도 지난달 17일 SK이노베이션과 SK E&S를 통합한다는 내용의 재편방안을 내놨다. 이 역시 합병비율이 쟁점으로 대두됐다. SK그룹이 발표한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비율은 1 대 1.1917417이다. 비상장회사인 SK E&S에 비해 SK이노베이션의 가치가 낮게 평가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현행법상 상장회사는 원칙적으로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주가에 의해 가치평가를 하게 돼있다. 주가가 자산가치보다 낮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산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도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국제 석유가격 흐름으로 말미암아 SK의 주가가 자산가치보다 낮다는 분석이 많다. 그만큼 주주들로서는 손해를 보는 셈이다. 반면 SK E&S의 지분 90%를 보유하고 있는 지주회사 SK에게는 유리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연금과 금융감독원이 제동 건 상황
이처럼 재벌그룹이 계열사를 옮기고 붙이는 과정에서 거의 어김없이 잡음이 일어난다. 공통점은 주주들을 희생시키고 대주주에게만 유리한 불공정합병이라는 지적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12일 두산그룹 개편방안에 대해 “자본시장법의 상장회사 합병비율 조항을 최대로 악용한 사례”라고 비판했다. 두산밥캣이 좋은 회사라고 믿고 오래 보유하려던 수많은 주식 투자자들이 로봇 테마주로 바꾸든지 현금청산을 당하든지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비판이다.
SK의 경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비판한 데 이어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급제동을 걸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을 반대하기로 한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의 가치가 시장가치로 평가돼 일반주주들에게 불리하게 산정됐다고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가 판단결과다. SK의 국민연금 지분은 올해 6월 말 기준 6.2%로 지주사 SK가 가지고 있는 지분 36.2%보다 훨씬 낮다. 그렇지만 53.49%를 차지하는 소액주주와 힘을 합치면 절반을 넘는다. 따라서 SK그룹으로서는 당장 국민연금부터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자칫하면 합병계획이 좌절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두산의 경우 금융감독원에서 버티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합병계획이 석연치 않다고 보고 증권신고서를 물리쳤다. 그리고 정정보고서를 내라고 요구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필요하다면 몇번이고 정정보고서를 요구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두산은 벌써 2차례나 제출했다. 이것으로 매듭지어질지 아직 미지수다.
재벌기업의 합병비율 논란은 잊을 만하면 불거진다. 지난 2014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합병의 공정성을 둘러싸고 국내외적으로 거센 논란이 일어나 국제소송으로 번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동원그룹도 지난 2022년 동원산업과 비상장법인 동원엔터프라이즈의 합병을 추진하면서 합병비율에 관한 논란을 야기했다. 결국 합병비율을 스스로 조정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재벌들, 투자자 입장에서 공정한지 돌아봐야
이처럼 거듭되는 재벌의 ‘불공정합병’ 문제로 한국의 주식시장은 크게 멍들어 왔다. 소액주주를 비롯한 국내외 투자자들의 불신이 크다. 그 누가 아무리 한국 증시의 ‘밸류업’을 외쳐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
두산과 SK의 이번 사업재편 계획에 대한 처리는 한국 자본시장과 기업밸류업 정책의 앞날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 합병이 공정하게 정리된다면 향후 자본시장의 합리적 발전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번에도 재벌측의 일방적인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큰 실망을 낳을 수도 있다.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두 재벌은 투자자의 입장에서 공정한지 스스로 돌이켜봐야 한다. 금융감독원 및 국민연금 등 책임있는 당국도 이들 재벌의 합병 문제를 원칙에 입각해 투명하게 처리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자본시장에는 희망이 남는다.
차기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