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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 담론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

2024-09-27 13:00:01 게재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선언하고 통일에 관한 모든 내러티브와 상징들을 지우기 시작한 이래 한국에서도 통일전망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사실 통일의 비전은 여러 면에서 약화되고 있다. 김정은정권이 통일을 부정하는 반면, 북한 주민들은 막연하게나마 통일 한반도에서 꿈꿀 수 있는 보다 나은 삶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은 각종 의식조사에서 통일보다 평화공존을 원하는 국민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다. 정부는 통일이 헌법적 의무라고 상기시키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섣부른 통일포기 선언이 아니더라도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한국 국민들의 평화적 두 국가론 사이에서 한반도의 통일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가 약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협력관계를 심화하고 이제는 북중러 연대를 강조하면서 남북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한반도 통일은 국제정치 진영대결과 결부되어 더욱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한반도 통일의 미래와 유럽모델

한국의 공식 통일방안은 1989년 노태우정부가 제시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초석이 되었다. 이후 김영삼정부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공식화한 이래,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경쟁관계에서 한국의 공식적 통일방안으로 기능해왔다. 무엇보다 노태우정부 하에서 여권과 야권의 초당적 지지, 정부와 시민사회의 소통 속에서 정치권과 국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했기에 현재까지 존속해올 수 있었다.

화해협력, 국가연합, 통일국가완성의 3단계로 구성된 통일방안을 보면, 현재의 남북관계는 화해협력 단계에도 진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통일방안 마련 당시 화해협력의 걸림돌이 되는 북핵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국제정세는 공산권의 몰락으로 한국에게 예외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통일방안이 현실을 정확히 예견하는 시나리오가 될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당시에는 통일방안을 따라 한국정부가 노력해야 할 정책의 좌표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이후 한국 정부들은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통일방안을 둘러싼 비전을 재해석하거나 통일단계를 미세조정하는 등 변화를 꾀했지만 근본적인 교체를 시도하지는 못했다.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되는 정치 속에서 초당적 합의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양극화의 사안 중에 대북정책은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통일이 조속히 실현될 역사적 사건은 아니지만 각 정부가 욕심내는 새로운 통일방안의 수명은 임기 5년을 넘지 못하는 현실이다.

통일은 한민족이 하나의 근대 주권국가 형태를 완성하는 일이다. 얼핏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세계의 많은 국가들을 살펴볼 때,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수립한 경우는 대단히 적다. 혈연적 역사적 문화적 공동체인 민족은 주권국가 수립단계에서 여러 민족이 합쳐져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거나, 하나의 국가 안에 여러 민족이 연방을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럽 중세는 단일한 기독교 왕국을 이루었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다수의 주권국가로 분열되었다. 보통은 강력한 제국이 출현해 분열된 왕국을 수습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였지만 근대 유럽은 독특하게 다수의 국가들이 각자 주권적 권리를 주장하며 다원적 세계를 이루었다. 국가를 만들고 그 안에 속한 구성원들을 국민으로 재탄생시켰다. 국가를 만들고 다음으로 국민을 만든 것이다. 유럽 전체와 민족, 국민 간의 경계는 상황에 따라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

유럽이 만들어낸 주권국가체제는 대단히 예외적인 독특한 체제다. 예외적이지만 치열한 경쟁체제였기 때문에 유럽 밖으로 강대국들이 뻗어나가 세계를 유럽의 모델로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이 유럽의 국가모델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켰다. 유럽의 폭력적 제국주의가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비서구의 민족들은 1민족 1국가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한국은 단일 민족으로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어온 매우 예외적인 국가였는데 식민지를 겪고 나서 분단되었다.

비유럽국가들이 국가 건설의 꿈을 안고 씨름하는 동안 막상 주권국가의 특허를 보유한 유럽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연합을 만들어 단일국가모델을 넘어서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앞에 유럽국가들의 안위까지 흔들리는 지금, 유럽은 그간의 분열을 딛고 더욱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미래의 국제질서에서 개별국가가 아닌 국가연합이 더 힘을 축적하여 새로운 정치모델을 제공할 것인가.

한반도의 통일은 한편으로 삼국통일 이후 1300여년 동안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어온 민족의 원상회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모델에 따른 주권국가를 새롭게 형성하는 일이다. 문제는 유럽형 주권국가는 1민족 1국가의 중앙집권형 국가일 수도 있고, 연합이나 연방 형태의 국가일 수도 있으며, 한 민족이 두개 이상의 국가를 이루는 일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국제질서의 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 한민족은 어떠한 미래 한반도 거버넌스를 꿈꾸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까.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어떤 전략들에 국력을 쏟아붓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까.

흡수통일 유혹 크지만 비극으로 끝날 수도

북한을 염두에 두고 한국 전략의 위계를 따져본다면 국가대전략 다음에 외교안보전략, 대북전략, 북핵전략, 통일 전략일 것이다. 세계 10위권을 맴돌고 본격적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 못하는 한국의 발전전략을 최우선으로 두고 외교안보, 경제전략, 북한에 대한 전략 전반, 그리고 북한의 핵으로부터 한국의 안전을 확보하고 비핵화를 이루는 전략이 그 다음일 것이다. 통일이 헌법적 의무라고 해서 다른 전략보다 더 시급하게 추진할 수도 없고, 다른 전략을 우회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어렵다. 더욱 강력한 국력과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면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때 통일의 기회가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압제적인 세습독재국가이며, 경제적 발전 전망이 어두운 북한을 볼 때 북한의 급변사태에 의한 흡수통일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가 악화되고 북한 주민의 불만이 급증하더라도 정치세력화된 반대 집단이 북한의 정권에 타격을 가하기에 북한의 정치 안정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을 지정학적 지경학적 자산으로 보는 중국과 러시아 역시 북한의 급변사태를 좌시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할 가능성이 높다. 정권의 생명을 넘어 물리적 생명이 위험에 처한다면 핵무기를 가진 북한정권은 관심전환의 수단으로 극단적인 공세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흡수통일은 설사 실현되더라도 통일 준비가 없는 한반도에 더 많은 갈등과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동서독은 경제격차가 상대적으로 작고 교류협력이 오랜 기간 진행되었지만 통일을 넘어 통합으로 가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고 평가된다. 동독 출신의 메르켈 총리가 통일독일을 안정적으로 통치한 사실과 비교해 볼 때, 통일 한반도가 안정적으로 북한 출신 대통령을 선출할 준비가 됐다고 할 수 있을까. 예멘의 경우를 볼 때 통일 이후 다시 분리와 내전을 거듭하는 상황은 준비되지 않은 통일의 비극을 보여준다.

창의성 더 발휘돼야 할 새로운 통일모델

한반도 통일은 한국의 대북전략 북핵전략과 궤를 같이해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한 교류 협력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통일을 지름길로, 우회전략으로 삼을 수는 없다.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원칙은 첫째, 어떠한 경우라도 전쟁이 발발해서는 안된다는 것, 둘째, 흡수통일의 사태에 대비는 하되 지향해서는 안된다는 점, 셋째,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교류협력의 단계를 우회할 수 없기에 통일을 목표로 삼되 대북 전략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 넷째, 통일의 형태와 한반도의 미래 거버넌스를 위해 변화하는 국제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창의적이고, 모범이 되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담론은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통일비용, 통일편익, 통일대박, 적대적 두 국가론, 통일포기 등 시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어느 것도 한민족을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단기적인 상황평가에 기초한 정권별 통일방안들 역시 시대의 흐름에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어려운 국가전략과 대북전략을 꾸준히 추진하되, 한국의 통일 모델을 보며 많은 국가들이 새로운 미래 통치형태를 꿈꿀 수 있도록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미래의 유럽, 미래의 미국과 중국, 미래의 3세계 국가들이 한반도 통일모델을 희망으로 삼고 평화와 번영을 추구한다면 통일의 가치가 배가되지 않을까.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