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각국 중앙은행을 움직이다
자연재해 대응 통화정책 수립 추세 … 대손충당금도 늘려
세계적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신간 ‘플래닛 아쿠아’에서 “지구온난화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도시문명이 실시간으로 붕괴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리프킨은 “2050년 무렵이면 47억명이 생태적 위협이 심하거나 극심한 국가에 거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리프킨이 전하는 이야기는 공포스럽다. 43~50℃에 이르는 기록적인 기온이 세계 전역에서 측정되고 있다. 캐나다 산불이 쏟아낸 연기로 미국 뉴욕 상공이 주황색으로 변할 정도였다. 오늘날 26억명이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리프킨의 우려는 현재진행형이다. 초강력 허리케인 ‘밀턴’이 미국 플로리다를 강타하면서 원유가격이 4% 가까이 급등했다. 로이터통신은 10일 중동의 불안에 허리케인까지 겹치면서 브렌트유 선물이 3.7% 상승한 배럴당 79.40달러까지 올랐다고 보도했다. 미국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는 3.6% 상승한 75.85달러에 마감했다.
로이터통신은 ‘밀턴’의 내습 이후 플로리다주 내 7900여개 주유소 중 1/4에서 휘발유 품귀 현상 발생했다고 전했다. 또한 340만 가구와 사업체에 전력 공급이 중단된 것으로 전해졌다. 허리케인 ‘헐린’으로 이미 큰 피해를 본 상황에서 2주 만에 ‘밀턴’까지 불어닥치면서 미국의 소비위축과 물가상승, 경기둔화 등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중앙은행 통화정책에 영향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기후위기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기후위기는 어떻게 중앙은행의 업무를 복잡하게 만드나(How climate risk will complicate central bankers’ jobs)’라는 분석 기사를 통해 “심각한 기상 현상이 심화되고 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영향도 커지고 있다”면서 “미국 남동부의 열대성 폭풍은 기후변화가 경제에 어떤 피해를 미칠 수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사례”라고 전했다.
세계적인 재보험사인 스위스리(Swiss Re)에 따르면 자연재해로 인한 재산피해는 지난 20년 동안 실질 기준으로 연간 2배 이상 증가했다. 2023년의 경우 자연재해로 인한 전세계 피해는 2800억달러에 달했다.
격심한 자연재해는 공급과 수요, 금융흐름, 그리고 통화정책에 이르기까지 경제 전반에 파급효과를 미친다. 세계 중앙은행·감독기구 간 글로벌 협의체인 ‘녹색금융협의체(NGFS)’의 보고서는 홍수와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자연재해는 집과 지역 인프라와 생산현장을 파괴한다. 이들을 재건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든다. 기업과 가계는 지출을 줄이게 되고, 향후 경제 성장 전망을 약화시킨다.
기상재해, 농업에 타격
FT는 “극심한 기상재해는 무엇보다도 농업생산에 타격을 입힘으로써 식량가격을 상승시킨다”면서 “이는 전반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FT는 “특히 농업 의존도가 높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그 영향이 더 크다”고 덧붙였다.
유럽중앙은행(ECB)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PICIR)의 연구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로 인해 2035년까지 식량가격 인플레이션이 연간 1~3%p 오를 가능성이 있다.
FT는 “대부분의 연구들이 기후변화를 가속화할 수 있는 ‘기후 임계점(climate tipping points)’ 돌파의 위험을 여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FT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이러한 중요한 기준점을 무시하면 (기후변화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심각하게 과소평가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FT는 중앙은행들이 녹색전환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FT는 “에너지 전환과 공급망의 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인플레이션과 생산량의 변동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면서 “단기적으로 탄소가격 책정과 기후변화 대응 비용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앙은행의 과제는 심화되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통화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ECB는 이미 기후 요인을 통화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ECB는 홈페이지를 통해 “기후위험이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 금융 안정성, 통화정책 등 거시경제 지표에 영향을 미친다”면서 “우리는 이러한 위험과 그것이 더 광범위한 경제와 금융 안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ECB는 “기후변화가 어떻게 신용등급에 반영되는지 평가하고 있다”면서 “통화정책 실행 프레임워크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ECB는 기업 채권 매수와 담보 프레임워크, 위험 관리에서 기후위기를 주시하고 있다. 또한 유로시스템 대차대조표에서 기후 변화와 관련된 재정위험을 줄이고, 경제의 녹색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탄소배출량을 투명하게 밝히고 이를 줄이는 기업들에게 인센티브도 제공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우리는 기후변화를 통화정책 운영에 통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서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에 부응하는 더 많은 조치들이 취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중앙은행뿐 아니라 시중은행들도 기후위험에 대비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기후위험에 대비한 ECB의 단속(ECB Cracks Down on Risks From Buyouts to Climate under Buch)’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유럽 은행들이 ECB의 압력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잠재적 손실을 대비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돈을 따로 비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출기관의 약 55%가 대손충당금을 마련할 때 기후 및 환경 위험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조사 때의 16%에서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클라우디아 부흐 ECB 감독위원회 의장은 지난 6월 ECB 컨퍼런스에서 “기후 및 환경 위험 분야에서 진전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은행이 금융자산에 대한 새로운 회계기준(IFRS9)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한은 ‘녹색점수’ 최하위권
그렇다면 세계 중앙은행들은 기후요인을 얼마나 정책에 반영할까? 영국 런던의 비영리 연구단체인 ‘포지티브 머니(Positive Money)’는 지난달 26일(현지시간) '2024 녹색 중앙은행 점수표'(The Green Central Banking Scorecard: 2024 Edition)를 발표했다. ‘포지티브 머니’가 발표하는 ‘녹색 중앙은행 점수표’는 주요20국들의 연구와 정책 제언, 통화정책, 금융정책 등 4개 분야에서 기후환경 요인을 얼마나 고려하는지를 평가해 순위를 매긴 것이다.
올해 순위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가 ‘B+’ 등급으로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이어 유럽중앙은행(B등급)과 브라질(B-), 중국(C+)이 각각 4, 5, 6위에 올랐다. 한국은행은 ‘D-’ 등급으로 최하위권인 16위를 기록했다. 지난 2022년 13위에서 2년 만에 3계단 추락했다.
한은은 올 1월 지속가능성장실을 신설하는 등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강화했다. 2021년엔 ‘기후변화 대응 TF’를 꾸려 석탄 및 화석연료 투자 제한, ESG투자 확대 등의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한은의 이런 노력은 글로벌 기후위기 대응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포지티브 머니는 “한은이 녹색금융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데 있어 녹색채권 발행량이 부족했다”며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기후변화가 물가와 경제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경제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초대 국립기상과학원장을 지낸 대기학자 조천호 박사는 지난달 23일 창원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기후위기는 인류가 만든 인재이고 우리는 기후가속페달을 밟고 있다”라며 “지구의 가열 정도는 우리가 어떤 세상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기후위기는 곧 경제위기로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석열정부는 태양광·풍력 발전에 대한 투자를 등한시하고, 원전을 확대하고, 신재생에너지 등 탄소 중립 분야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경제위기가 한꺼번에 닥치면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