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두번 ‘모세의 기적’…12㎞ 순례길 이어주는 노두길

2024-12-09 00:00:00 게재

섬의 나라 전남

겨울섬을 가다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 사업으로 4개 섬 잇는 탐방로 조성, 주민들이 땅 3평씩 기증해 12개 성소 세워

대한민국은 3000개가 넘는 섬을 가진 세계 10대 섬 보유국. 그 중 64%인 2165개가 전라남도에 있다. 전남을 ‘섬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다. 최근 섬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소중한 해저 자원과 생태의 보고이면서, 우리 영해의 시작이 되는 섬은 안보 수호의 첨병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남도의 입장에서는 소중한 휴식과 힐링의 공간이라는 관광적 가치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지역 관광의 차별화된 콘텐츠이면서 지역경제의 든든한 뒷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출 직후 하늘에서 본 소악/기점도. 왼쪽부터 소악도 선착장이 있는 진섬, 소악도, 소기점도, 대기점도이다. 섬들은 썰물 때 오갈 수 있는 노두길로 연결돼 있다. 사진 남준기

전남도와 함께 독특한 겨울 이야기를 가진 섬 세 곳과 섬 관광 이야기를 4회 연재한다. “2019년에 전남도에서 섬티아고 순례길을 만들었는데 5년 동안 7번 오신 분도 있어요. 처음엔 혼자, 다음엔 친구들과, 부인과 … 7번째 오셨을 땐 너무 고마워서 1만5000원짜리 생선 매운탕을 5000원에 끓여드렸죠.”

대기점도 선착장에 있는 1번 ‘건강의 집’(베드로의 집)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두길에 있는 8번 ‘기쁨의 집’
신안 소악도에서 하하호호 식당을 운영하는 섬 해설사 장명순씨의 말이다.

전남 신안군 소악도와 대·소기점도에서는 모세의 기적보다 더 멋진 기적이 하루에 두번씩 일어난다. 모세의 기적은 잠깐 바닷물이 갈라지는 정도였지만 여기서는 바다가 아예 사라진다. 밀물 때는 바다였다가 썰물 때는 섬들 사이로 거대한 갯벌이 펼쳐진다.

이 부근에는 병풍도-대기점도(큰딴섬)-소기점도(깍지섬)-소악도-진섬(소악도 선착장) 등 5개의 섬이 있다. 이 5개 섬들은 썰물 때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노두길로 연결된다. 원래 노두길은 큰 잡석을 쌓아서 만든 일종의 긴 징검다리 길이었다.

돌로 쌓은 노두길은 해초류가 끼면 무척 미끄러웠다. 그래서 해마다 한번씩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돌을 뒤집어주어야 했다. 근래 들어 그 위에 콘크리트를 깔아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이 길을 여전히 ‘노두길’이라고 부른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노두길을 오가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랬던 섬에 기적이 일어났다. 노두길을 걸으려고 일부러 배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2019년 전남도 ‘가고 싶은 섬’ 사업으로 이 노두길을 잇는 ‘기적의 순례길’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길을 기획한 사람은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만든 윤미숙씨다. 그는 전라남도 ‘가고 싶은 섬’ 전문위원으로 섬 가꾸기에 매달려온 마을 전문가다.

순례길 곳곳에 12개 작은 성지

‘순례자의 길’ ‘섬티아고길’로 불리는 12㎞의 순례길은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까지 이어진다. 4개의 섬은 3개의 노두길로 연결되고 순례길 곳곳에 12개의 작은 성지가 만들어져 있다.

1번부터 12번까지 작은 성지들은 원래 1번 ‘베드로의 집’, 2번 ‘안드레아의 집’, 3번 ‘야고보의 집’ 등 예수의 12제자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렇지만 이 성소들은 반드시 특정 종교를 위한 상징물은 아니다. 성소 지붕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고양이 물고기 새들이 앉아있다.

섬 해설사 장명순씨가 생명평화의 집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1번 ‘건강의 집’, 2번 ‘생각하는 집’, 3번 ‘그리움의 집’, 4번 ‘생명평화의 집’, 5번 ‘행복의 집’, 6번 ‘감사의 집’, 7번 ‘인연의 집’, 8번 ‘기쁨의 집’, 9번 ‘소원의 집’, 10번 ‘칭찬의 집’, 11번 ‘사랑의 집’, 12번 ‘지혜의 집’으로 부른다.

12개 성소 건축에는 11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공모를 통해 참여했다. 사업은 도 차원에서 진행했지만 주민들 참여 속에 이루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성소 12곳 가운데 6곳의 땅을 3평씩 기증했고 건축에 필요한 재료도 같이 날랐다.

12사도 순례길을 1번부터 걸으려면 압해도 송공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대기점도 선착장으로 간다. 송공항에서 대기점도로 가는 배는 오전 6시 5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하루에 4번 운항한다.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린다.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이지만 걷는 데 문제가 없다면 승용차는 안 가져가는 게 낫다. 1번(대기점도)에서 12번(진섬)으로 갈 수도 있고 12번에서 1번으로 갈 수도 있는데 순례가 끝난 뒤 출발지에 두고 간 차를 회수하는 게 훨씬 더 불편하다. 송공항 주차장은 무료다.

생명평화의 집에 ‘이효리 타투’

대기점도 선착장에 내리면 바로 1번 ‘건강의 집’이다. 예전부터 있던 작은 선창 대합실을 화장실로 개조하고 그 옆에 조그만 그리스식 돔 건축물을 세웠다. 바다 위에 떠있는 푸른 지붕과 하얀 벽체가 마치 산토리니에 온 느낌이다. 두 건물 사이에는 작은 종이 있다. 이 종을 치면서 순례길을 시작한다.

2번 ‘생각하는 집’은 대기점도 북촌마을에서 병풍도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이 마을에 유달리 많은 고양이를 상징하는 건축이다. 입구와 지붕에 고양이 조각이 새겨져 있다. 낮선 사람이 오면 마을 고양이들이 모여드는데 곁을 주지는 않는다.

3번 ‘그리움의 집’은 여기서 논둑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 4번 ‘생명평화의 집’ 가는 길은 큰진등산 옆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동남쪽으로 이어진다. 작가 박영균은 큰 버섯 모양의 남성에 불꽃 형상의 문으로 여성을 표현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바닥이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모자이크 조각이다. 자궁 안에는 생명평화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실상사 도법 스님과 함께 생명평화운동을 하는 안상수 전 홍익대 교수가 만든 문양이다. 종교를 초월하는 문양으로 생명과 평화를 기원한다.

“보세요. 가운데 동그라미를 기준으로 아래는 사람, 오른쪽은 네발짐승, 왼쪽은 새와 물고기, 위에는 나무가 있어요. 그 위에는 해와 달 …” 장명순씨의 현장 해설이 계속된다. 이 생명평화 문양은 가수 이효리가 생태계 보호를 상징하는 문신으로 새겨 ‘이효리 타투’라고도 불린다.

5번 ‘행복의 집’ 문 위에 있는 둥근 창은 돌절구를 잘라서 만들었다. 이 돌절구도 마을 주민이 기증한 것이다. 벽면에 쌓은 작은 조약돌도 주민들이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들이라고 한다. 프랑스 작가 장 미셸 후비오의 작품으로 프랑스 남부 작은 교회 양식이다. 지붕에는 물고기가 십자가 대신 올라가 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조형물 뒤로 해가 뜬다.

노두길 한가운데 ‘기쁨의 집’

여기서 노두길을 따라가면 바다를 지나 소기점도로 건너간다. 소기점도에는 6번 ‘감사의 집’, 7번 ‘인연의 집’이 있다. 8번 ‘기쁨의 집’은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두길 한가운데 세워졌다. 밀물 때는 노두길이 잠긴다. 밀물이라면 노두길 입구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 한 3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소악도로 건너가야 한다.

소악도 서쪽 바닷가로 난 순례길을 따라가면 9번 ‘소원의 집’이 나온다. 저녁이라면 여기서 서해 일몰을 볼 수 있다. 썰물 때 바닷가로 내려가 빨갛게 단풍색이 든 염생식물을 관찰해도 좋은 곳이다.

소악도와 진섬 사이 노두길은 다른 노두길보다 높아서 밀물에 잠기는 일이 별로 없다. 1년에 서너번만 잠기는데 30여년 전 소악도에 있던 초등학교 등하교를 위해 길을 높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섬으로 건너오면 10번 ‘칭찬의 집’, 11번 ‘사랑의 집’, 12번 ‘지혜의 집’이 있다. 마지막 12번 성소는 진섬에서 썰물 때 모래톱으로 건너갈 수 있는 ‘지혜의집’(가롯 유다의 집)이다. 여기에도 작은 종이 있다. 그 종을 치면 순례길이 끝난다.

가롯 유다는 자기 스승인 예수를 은전 30닢에 로마 병사에게 팔아넘긴 인물이다. 배신자 가롯 유다의 이름을 붙인 성소를 만들었다. 이는 12개 성소가 반드시 기독교나 가톨릭 신자들만을 위한 기도처가 아님을 상징한다.

“작은 교량으로 섬들 이어야”

소악·기점도 일대 바다와 갯벌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다. 람사르습지로도 지정됐고 환경부 습지보호구역, 전남도 갯벌도립공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12km 순례길을 이어주는 고마운 노두길 때문에 갯벌이 썩어가고 있다.

장명순씨는 “예전에 돌로 쌓은 노두길만 있었을 때는 갯벌이 딱딱해서 밤에 횃불을 들고 걸어다니면서 낙지를 잡았다”며 “지금은 죽뻘이 쌓여 허벅지까지 빠지니 갯벌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노두길 중간중간 콘크리트관을 묻었지만 이 정도로는 역부족이다. 밀물과 썰물이 자유롭게 오가야 갯벌이 건강해지는데 노두길이 조류를 막으니 죽뻘이 쌓이고 그 바깥은 침식이 심해졌다. 갯벌 곳곳에 전에 보이지 않던 굴껍질과 자갈층이 드러났다.

장씨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중요한 갯벌인데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콘크리트로 포장한 노두길을 걷어내고 바닷물이 오갈 수 있는 소규모 교량으로 섬들을 이어주는 사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소악·기점도에는 가게나 편의점이 없다. 마을버스 같은 대중교통도 없다. 대신 섬 곳곳에 민박집들과 마을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여러 곳에 나누어 자면 100명 이상 숙식이 가능하다. 섬 특성상 식사와 숙박은 미리 예약해야 한다.

신안 = 글 사진 남준기 환경전문객원기자

namu@naeil.com

홍범택 기자 durumi@naeil.com

홍범택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