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내란혐의 대통령’의 유산
석달 전 출입처를 대통령실에서 서울경찰청으로 옮겼다. 지인·동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용산 탈출을 축하한다”였다. 처음엔 지지율 내리막인 정권을 취재하느라 고생했다는 뜻이었는데 12.3 내란사태 후엔 ‘천만다행’이라는 뜻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위헌적 군·경 동원으로 내란 피의자 신세가 됐다. 탄핵소추까지 당했다. 국정의 중심이어야 할 대통령실은 침묵 상태다. 한마디로 출입처가 쑥대밭이 되기 직전에 운 좋게 빠져나왔단 소리다.
덕담 아닌 덕담에도 한켠에선 자괴감이 가시지 않는다. 윤 대통령을 대선 때부터 2년 반 넘게 매일같이 지켜보고도 그가 어떤 지경까지 갈 수 있는 인물인지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용산에서 소모한 에너지와 감정이 헛된 것이 돼버린 기분이다. 기자뿐이랴. 윤 대통령은 온 국민의 정치적 상상력을 퇴행적으로 극한까지 확장시켰다.
하룻밤의 내란사태로 대미 관계는 어느 때보다 흐려졌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가 불확실성의 늪에 빠졌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의 ‘아메리칸 파이’는 낯뜨거운 추억이 됐다. 20만명이 혜택을 봤다는 ‘대출 갈아타기’나 각종 반도체·IT 산업 지원, 노동조합 회계투명성 강화, ‘대왕고래’ 프로젝트처럼 그나마 관심을 받던 크고 작은 정책들도 얼마나 일관되게 추진될지 알 수 없다. 잘 되더라도 윤 대통령의 공이라고 입에 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윤 대통령이 역사에 어떻게 기억될지는 경우의 수가 일찌감치 좁혀진 듯하다. 그간의 치적과 기대 성과 대신 내란수사·탄핵심판 결과가 그의 수식어로 남을 것 같다.
되짚어보면 윤 대통령이 이번에 남긴 가장 값비싼 유산은 ‘초보자에게 국정을 맡겨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정치를 모르는 초보자가 정치를 경시·혐오할 때 어떤 선택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준 것이 12.3 내란사태였다.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부터 “여의도 문법은 모른다” “정치공학적 조언은 잘 안 듣는다” “경기장의 선수는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며 여의도 정치에 거부감을 보여왔다. 그는 취임 후에도 거대야당을 ‘이권 카르텔’ ‘종북’ ‘반국가세력’ 등으로 부르며 적대했다. 정적과 공존하거나 필요에 따라 손을 잡을 만한 감각도 경험도 없었다. 윤 대통령이 만약 지역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 봤다면, 비례대표 배지라도 한번 달고 의회정치를 해 봤다면 역사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세밑에 벌어진 여객기 참사는 내란사태와 더불어 2024년을 최악의 해로 기억되게 한다. 이 와중에 정부의 사고수습과 피해자 지원을 당부하면서 “국민 여러분과 함께하겠다”는 ‘내란죄 혐의’ 대통령의 낯 두꺼운 SNS 메시지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재걸 기획특집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