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사형 45년 만에 재심

2025-02-20 13:00:32 게재

서울고법 “민간인 군법수사, 가혹행위 인정”

유족 “10.26 사건, 역사적 논의 진화해야”

법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을 열기로 했다. 1980년 김 전 부장에게 사형이 집행된 지 45년,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지 5년 만이다.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이재권 부장판사)는 19일 김 전 부장의 내란목적 살인 등 혐의에 대한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민간인인 김 전 부장을 수사한 군 수사관들의 폭행과 가혹행위가 증명됐다는 이유다.

재판부는 “기록에 의하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 소속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수사하면서 수일간 구타와 전기고문 등의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며 “이는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피고인에 대해 폭행,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형법 제125조의 폭행, 가혹행위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수사관들의) 직무에 관한 죄가 사건의 실체관계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데 고려할 사정은 아니다”라면서 “재심대상 판결 중 피고인에 대한 부분은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증명됐음에도 공소시효가 완성돼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해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지 6개월 만인 이듬해 5월 사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시해 사건이었다.

유족들은 2020년 5월 “10.26 사태와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에 재판부는 재심 청구 약 5년 만인 지난해 4월 이후 10개월간 세 번에 걸쳐 재심 개시 여부를 검토해 왔다. 이 심문에는 과거 김재규를 변호한 안동일 변호사가 직접 출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 피고인의 변론을 7명이 했는데 이제 저만 생존해 있다”며 “유일한 증인이 돼 이 자리에 섰다는 점이 감개가 깊다”고 했다.

그는 “제가 막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당시 군법회의는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며 “당시 과연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돼 재판했는지 참으로 통탄해 마지않는다”고 회상했다.

이어 “당시 법무사(지금의 군판사)는 재판 경험이 없는 대령이었는데, 다른 방에 있는 판사와 검사 10여명이 스피커를 통해 재판 과정을 듣고서는 쪽지로 진행을 코치했다”며 “권력이 쥐여준 시간표에 따라 재판이 진행됐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오욕의 역사이며 참으로 치가 떨리고 뼈아픈 경험이었다”며 “지성인과 지식인, 공직자가 자기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면 이같이 절차적 정의가 무너지고 신군부(전두환 정부)가 집권하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비통해 했다.

심문에선 1979년 12월 1심 군법회의에서 김재규가 한 최후진술 녹음 일부가 재생됐다.

“유신 체제는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종신 대통령 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체제” “더 이상 국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중략) 그 원천을 두들긴 것입니다”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이 나라가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등 김재규 생전 목소리가 법정에서 재생됐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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