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원한 약달러, 미 경제엔 불안징조

2025-03-12 13:00:01 게재

올 들어 달러가치 2008년 이후 최대 하락 … 수출증대 장점보다 달러지위 의구심 역효과

미국 트럼프정부의 예측불가능한 경제·외교정책이 성장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달러가 2008년 이후 최악의 출발을 보이고 있다. 달러지수는 연초부터 지난주말 종가까지 4.2% 하락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의 같은 기간 4.8% 하락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이다.

미국 100달러 지폐 사진 타스=연합뉴스

연말연초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미국 디플레이션 진행 속도가 둔화되고 노동시장이 놀라울 정도로 회복세를 보이자 투자자들은 지난해 4분기부터 향후 금리인하에 대한 기대치를 낮췄다. 달러와 미국채 수익률은 꾸준히 상승했다. 동시에 글로벌 경제, 특히 유럽경제가 지지부진하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은 금리를 꾸준히 인하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최근 몇주 동안 대규모 관세 위협, 연방기관 인력·예산의 대규모 삭감, 지정학적 불확실성 고조 등 여러가지 상황이 미국 경제력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관세가 저성장과 높은 인플레이션의 조합인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달러가치 하락의 거의 대부분은 캐나다와 멕시코 상품에 대한 관세가 발효된 지난주 동안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4일(현지시각)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제품에 추가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면서 달러 하락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오히려 미국관세발 경제침체로 통화가치가 하락할 것이라던 캐나다달러와 멕시코페소화 가치는 지난주 달러 대비 상승했다.

관세발 달러가치 상승 예상 빗나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10일 온라인판 기사에서 “관세 자체는 달러가치를 상승시킬 가능성이 높다. 관세로 수입품가가 오르면 소비자들이 이를 외면해 해당 국가통화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다”며 “하지만 각종 무역장벽과 그에 따른 불확실성이 미국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면 금리가 낮아져 달러가 약세를 보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단기적으로는 기업들의 수입품 사재기도 달러에 하방압력을 가한다. 기업들은 대규모 관세 부과를 앞두고 해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올 1월 상품무역 적자는 1530억달러로, 전년 동월 920억달러에서 급증했다. 이러한 사재기 열풍은 고율관세 위협이 있는 한 계속될 전망이다.

미정부의 외교정책도 한몫하고 있다. 독일 10년만기 국채 수익률은 지난주 2.4%에서 2.8%로 급등했다. 차기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재무장 자금을 조달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이러한 높은 수익률은 투자자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유로화 가치를 상승시키고 있다.

한편 올해 유럽 증시는 달러 기준으로 14% 상승한 반면 미국 S&P500 지수는 2% 하락했다. 미국 주식시장 지배력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면, 투자자들의 달러 수요가 줄어들면서 달러가치가 하락할 수 있다.

미정부, 약달러정책 공식화?

“강달러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 1994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로버트 루빈의 이 간단한 메시지는 미국 통화정책 전환점이 됐다. 그 이전 수십년 동안 미국정부는 무역상대국의 통화약세로 자국 제조업체의 경쟁력이 약화됐다고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대표적으로 엔화 강세를 끌어낸 플라자합의가 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미 재무부는 루빈의 메시지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달러의 적절한 수준에 대한 논의를 아예 회피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 무역정책이 점점 더 보호주의로 흐르고 달러가치가 갑자기 약세를 보이면서, 30년간 이어져 온 미 재무부의 기조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정부 내에서도 각기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임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는 강달러정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 모두 달러강세가 미국산업에 문제가 된다며 약달러를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트럼프와 밴스는 매우 공격적인 무역정책이 환율시장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다. 달러가치는 엔화 대비 5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지난주 유로화는 달러 대비 4.5% 상승하며 2009년 이후 가장 빠른 상승세를 보였다. 이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10년 이상 지속된 달러강세 흐름이 급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각국의 통화정책과 글로벌 시장·무역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트럼프정부 내 일부 인사는 더 극단으로 밀어붙일 태세다.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장 후보로 지명된 스티븐 미란은 지난해 11월 다국간 환율 합의(동의하지 않을 경우 징벌적 관세 위협)부터 외국의 미국채 보유자에 대한 수수료 부과까지 달러가치를 절하할 수 있는 일련의 극약처방을 제시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재 시점에서 그같은 극단적 정책이 시행될 조짐은 거의 없지만, 변덕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이 주변의 설득에 쉽사리 넘어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예외주의 끝났나

분석가들은 최근 달러가치 하락이 긍정적인 상황이 아니며 미국우선주의 무역정책의 모멘텀이 약화되는 신호는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도이체방크 글로벌외환리서치 책임자인 조지 사라벨로스는 최근 투자자노트에 “예상치 못한 달러가치 하락은 관세가 인플레이션을 넘어서 영향을 미친다는 신호”라며 “무역을 저해하는 관세정책은 미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미국 경제성장 전망에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달러가치 변화는 트럼프정부의 정책혼란과 예측불가능성, 특히 변덕스런 무역정책과 정부효율부(DOGE)의 무차별 예산삭감을 반영하고 있다”며 “이런 맥락에서 외환시장이 미국과 다른 국가들 간 성장률 격차가 좁혀질 것이라는 점을 가격에 책정하는 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모간스탠리 전략가 매튜 혼바흐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10일 투자자노트에서 투자자들에게 “달러보다 유로화나 파운드에 유리한 장기 트레이딩을 유지할 것”을 주문하며 “이유는 ‘미국 예외주의’가 지속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퀀텀스트래티지의 전략가 데이비드 로슈도 이달 4일 CNBC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대규모 관세 부과로 미국예외주의가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며 “투자자들은 새로운 안전자산으로 떠오르는 엔화를 소유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가절하된 달러는 미국 수출품을 저렴하게 만들려는 트럼프정부에겐 희소식이지만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패권을 유지하겠다는 또 다른 목표엔 부정적일 수 있다.

도이체방크 사라벨로스는 “글로벌 투자자들 사이에서 달러가 안전자산으로서 지위를 잃고 있다는 신호로서 달러가치가 하락하는 것일 수도 있다”며 “달러와 위험자산 간 상관관계 약화, 저평가된 통화들의 이례적인 강세, 국내총생산(GDP) 대비 4%를 넘는 미 경상수지 적자 등이 이같은 추세를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달러패권 엄중한 시험대

그렇다면 달러약세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난 10년 달러강세로 신흥국들의 고통이 컸다. 기업과 정부가 달러로 차입하는 성향이 컸기 때문이다. 때문에 약달러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즉각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수입의존도가 낮지만, 달러가치가 하락하면 수입품 가격이 상승해 가뜩이나 힘겨운 인플레이션 관리 작업이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제1부총재 기타 고피나스는 “달러가치가 10% 하락하면 미국 소비자물가가 0.4~0.7%p 상승한다”고 추정했다.

지난 수십년 달러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예측이 무성했지만 그때마다 달러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미국채는 여전히 전세계가 선호하는 준비자산으로 달러가치를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 후보인 미란이 제시한 방식과 같은 달러약세 시도는 엄중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

필라델피아연방준비은행 총재 패트릭 하커는 이달 6일 트럼프정부의 정책이 이미 달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글로벌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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