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시간과의 싸움' 중인 한국 사회
미국 달러 지폐 중 가장 큰 단위인 100달러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있다. 그는 “시간은 돈이다”라고 했다. 과학자이면서 사업가인 그로서는 ‘돈’에 비유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소중히 여겨라’는 뜻일 것이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시간 개념은 더욱 세분화 돼왔다. 학자들은 원시시대에는 해 뜨면 낮이고 어두워지면 밤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농경시절 시간단위를 거쳐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공장에서 30분단위 정도의 작업시간에 적응해야 했다고 한다. 점점 빨라져 지금은 초단위까지 생활에 스며들었다. 굳이 미세한 물리세계가 아니라도 1분 또는 1초만 늦어도 고속기차는 문을 닫고 떠나 버린다. 과거처럼 달려가서 올라타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대통령 담당 재판부가 구속기간 산정을 ‘날’이 아니라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은 늦은 감마저 든다. 더욱이 구속 피의자의 ‘인권’을 명분으로 삼았으니 크게 탓하기도 어렵다. 물론 ‘타이밍’은 최악이다. 다른 대부분의 형사소송 기간 기준을 ‘날’로 해놓고 수십 년간 적용하다 유독 윤 대통령에게만 ‘특혜성 기준’을 적용해 법의 공정성과 일관성을 훼손했다는 반론이 거세다. 검찰이 ‘즉시항고’를 포기하고 윤 대통령을 석방한 건 이와 별개로 정국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헌재의 선고 늦어질 경우 국론 분열 걷잡을 수 없이 커질듯
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지 100일이 넘었다. 3월 12일 밤10시27분 기준으로 100일째다. ‘날’이 아니라 ‘시간’으로 엄격히 계산하면 계엄선포 (12월 3일 밤10시27분) 첫 날의 시간은 1시간33분이므로 100일(2400시간)에 못 미친다.
초미의 관심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날짜다. 지난달 25일 윤 대통령 탄핵 사건의 변론을 종결한 헌재는 18일째(14일 기준) 숙의를 이어가고 있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때는 각각 변론종결 후 15일, 12일째 되는 금요일에 선고기일이 잡혔다.
윤 대통령 사건 선고기일도 변론종결 후 2주쯤 뒤 금요일인 14일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헌재는 이날까지 일정을 알리지 않고 있다. 늦어도 이틀 전까진 선고일을 공지해왔던 걸 감안하면 사실상 이번 주 선고는 물 건너갔다.
윤 대통령이 풀려나고 헌재 선고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용산 대통령실 관계자 발 ‘지라시’가 대표적이다. ‘헌법재판관들은 밥도 같이 안먹고 제각각 놀고 있다’ ‘조심스럽지만 최대 4대 4까지 보고 있다. 3명은 반대로 정했다’는 등이다. 반대로 ‘파면은 8대0으로 정해졌고 별개의견으로 내는 내용을 두고 평의 중이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거의 99% 탄핵되는 것으로 본다. 차기 주자 줄 서기에 들어갔다’ ‘인근 학교에 휴교령이 통보됐다’는 추측도 횡행한다.
여야 정치권과 지지자들은 마주보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 마냥 충돌 직전이다. 양측은 헌재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을 태세다. ‘헌재의 공정한 판결’을 주장하던 국민의힘 의원들 다수는 아예 노골적으로 “탄핵심판 기각”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 의원은 “헌재를 때려부수자”고까지 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도 “탄핵이 안되면 또 다시 계엄이 발동되고 내전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 경찰은 선고 당일 헌재 근처에 시위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기로 했고, 서울시교육청은 헌재 인근 초중고 11곳을 휴업하기로 했다.
다수 국민들과 법조계에선 헌재가 심리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얘기한다. 선고가 늦어질 경우 국론 분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이재명,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시간의 빠르고 느림은 상대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시간 전쟁’ 중이다. 3월 26일 선거법 위반 항소심 선고가 있다. 조기 대선이 실시되더라도 1심 선고와 비슷하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점점 여론의 압박은 거세질 것이다.
여권 지지층과 일부 중도층에서 ‘윤-이 동반사퇴’ 여론이 만만찮은 것도 부담이다. 더욱이 대법원이 ‘패스트트랙’으로 대법 선고를 확정지운다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결국 처한 상황에 따라 시간의 빠르고 느림은 상대적인 셈이다.
시간이 소중하긴 해도 억지로 당기거나 늦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톨스토이는 “시간은 신뢰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온다”고도 했다. 온갖 내우외환 속에서도 미래를 개척해 온 한국 사회의 주권자의 저력을 믿을 뿐이다.
차염진 정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