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만인 대 만인 투쟁 시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고전적 전쟁 개념은 현대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세계 각국은 국가폭력을 동원해 치열한 전쟁을 벌여왔다. 이웃 나라를 침공하고 식민지 침탈을 감행했다. 반작용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했다. 오로지 국가권력의 온전한 독식과 독점의 궁극적 목적은 ‘적의 궤멸’이었다.
고대 문명 제국이 그렇게 명멸했고 중세는 종교를 앞세운 처절한 전쟁이 처러졌다. 근세들어 국가자본의 독점을 위한 대전으로 세계는 수천만 인류의 희생으로 얼룩졌다. 그 어디에서 공영을 전제로 이익분배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는 고등정치의 면모를 찾을 수 있겠는가.
전쟁의 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는 사실 무슨 ‘이즘’이나 ‘자유’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이기적인 권력에 의해 부추겨진 적개심과 혐오주의였다. 그렇게 국가는 덩치를 키우며 이른바 선진국이 되었고 세계 패권을 거머쥐었다. 지구의 한편에선 국민이 배제된 고도의 중앙집권 통치 및 경제 제도로 국가의 규모와 힘을 유지하면서 패권국에 맞서고 있는 현실이다.
우크라이나전쟁 종식의 중재자 역을 자임한 트럼프, 휴전을 놓고 저울질하는 푸틴, 뼛속까지 철저한 대외 의존을 통해 전쟁을 치른 젤렌스키까지 평화를 입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과연 말 그대로 평화주의자인가, 아니면 이익분배와 공존을 뒤로하고 독식과 독점에만 눈이 어두운 반정치적 권력자인가.
이러는 사이에 평화를 궁극으로 하는 국제정치의 규범은 무너졌고 패권국의 횡포로 국제적 이익분배의 질서는 나락으로 가고 있다.
국제적 이익배분의 질서 나락으로
만인 대 만인 투쟁의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트럼프가 던진 관세 폭탄으로 아메리카와 유럽대륙 그리고 동아시아가 들끓고 있다. 미국 정부는 3월 12일 미국에 수입되는 외국산 철강알루미늄에 대해 25%의 관세부과 정책을 시행했다.
2018년 트럼프 1기 정부와의 협상으로 연간 263만톤의 물량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받아온 한국도 기존 면세 쿼터가 폐기되면서 예외 없이 고율의 관세 폭탄을 맞게 됐다.
중국은 무역전쟁에 대한 즉시 반격을 예고했고, 캐나다는 약 30조원 규모의 미국산 철강·알루미늄 상품에 대한 25%의 보복관세 부과로 응수했다. 유럽연합(EU) 또한 4월부터 41조원 규모의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부과로 즉각적인 보복 조치에 나섰다. EU는 또 미국산 위스키에 50% 관세를 매기겠다고 하고, 미국은 유럽산 주류에 200% 부과로 받아치면서 관세폭탄은 생필품 영역에도 떨어질 전망이다. 국제경제의 중추국들과 미국 사이의 관세 충돌은 그야말로 총성없는 전쟁으로 관련국 모두의 기업과 노동자, 국민이 예비 희생자가 된 것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구시대 독재의 언어도 안팎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갈등 해소와 화해 협력의 분위기도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여기 한국에서도 1992년 이래 다져온 선진적 민주주의 법질서와 튼튼하다던 국민 안전 시스템마저 총구로 위협을 받았다.
모두가 과거 전쟁을 불사했던 국가권력의 독점욕 때문이다. 암약하던 파시즘의 망령은 곳곳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의 무차별 관세정책, 그리고 국내의 내란 양상은 전쟁의 목적과 수단을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인 그것과 다름없다. 국제정치가 외교의 선을 넘어 전쟁으로 가고 민주적 질서가 중앙집권적 독재로 회귀하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국가의 성공과 국민 안녕은 훨씬 더 멀어진다.
독재 회귀는 국가의 성공과 안녕에서 멀어져
3월 미 CNN·NBC 조사에 따르면 60% 전후의 미국 국민이 트럼프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지한다’라는 응답은 35% 내외였다. 묘하게도 우리의 중요 사안에 대한 여론조사 찬반 비율과 거의 일치한다.
중앙집권적 정치 시스템은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듯이 부패와 착취를 동반한다. 민주정치와 포용적 경제체제는 공정한 분배와 혁신을 가져왔다. 미국도 건국 이래 민주적 시스템을 밑거름으로 생산력을 높여 세계 1등 국가가 되었다. 권위주의 대 포용주의가 40 대 60으로 갈라져 갈 길이 먼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방향을 선택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