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불확실성, 달러 신뢰도 뒤흔든다
유럽서 달러조달 의구심 제기 … 전문가들 “현재 달러대안 없지만, 장기적으로 패권 저문다”
달러패권은 지난 80여년 굳건했다. 위태로운 순간이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미국발 위기에도 달러패권은 견고했다.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도 있다. 최근 미국 트럼프정부의 각종 정책이 달러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물론 달러패권이 단기적으로 허물어질 것이라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위협에 처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2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과 감독당국 관계자 일부가 시장 불안정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달러유동성 지원을 계속 의존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익명취재원 6명을 인용한 로이터는 “ECB 등 유럽 금융기구 관계자들이 트럼프정부가 연준에 달러 지원 중단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시나리오에 대해 논의했다”며 “현재 연준 독립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트럼프정부가 향후 연준에 압력을 가해 달러 자금 지원을 중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는 ECB와 감독당국의 정기적인 고위급 정책결정자 모임이 아니라 실무진들이 참여하는 비공식 모임에서 제기된 의견이다. 하지만 로이터는 한 참석자를 인용해 “유럽이 연준 지원에 의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조만간 공식적인 논의로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논의가 미국당국의 국제협력 감소 가능성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ECB 관계자들은 연준이 달러 지원 보장을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연준 역시 그같은 가능성을 시사한 바는 없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또 ECB 등은 연준을 대체할 만한 좋은 대안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 ECB 연구에 따르면 유로존 은행들의 자금조달 중 약 17%가 달러로 이뤄지고 있다. 또 연준의 긴급 지원으로 위기 가능성을 줄인 사례도 많다. 가장 최근인 2023년 크레디트스위스가 유동성 위기에 놓이자 연준이 스위스중앙은행에 수백억달러를 제공해 이를 진화한 바 있다.
로이터는 “트럼프정부의 일부 정책으로 미국정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유럽 관리들이 달러 지원 중단 가능성을 비공식적으로 논의해 왔다”며 “이는 글로벌 금융 안정의 기반인 달러 시스템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매체는 “연준이 달러 지원을 축소한다면 세계시장과 금융안정성, 실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또 미국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달러패권을 위협하며 미국채 수요를 감소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지난 100년의 가치, 몇달 만에 흔들
학계에서도 트럼프정부가 달러패권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UC버클리 경제학·정치학 교수로 ‘과도한 특권: 달러의 흥망성쇠’ 저자인 배리 아이켄그린은 “거의 100년 동안 달러의 지배력을 뒷받침해 온 가치와 체제가 트럼프와 그 측근들로 인해 불과 몇달 만에 존속을 의심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22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 ‘달러는 계속 통화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을까’에서 “1950년대 초반 이후 미국의 세계수출 비중은 18%에서 11%로 크게 감소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세계경제의 성공적인 재건에 상당히 기여했다는 점에서 건강하다고 볼 수 있다”며 “하지만 국제무역을 제로섬게임이라고 확신해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미국의 세계무역 비중을 감소시킨다면 이는 건강하지 못하다. 미국 무역을 파괴하는 ‘미국 우선’ 관세정책은 달러패권 약세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미국의 무분별한 금융제재도 달러패권에 위협적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금융제재 대상은 2000년 912명에서 2021년 94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는 달러에서 다른 통화로의 다각화를 촉발할 수 있다.
또 트럼프 이전 정부에서는 동맹국들의 협력 아래 금융제재가 부과됐다. 하지만 트럼프정부는 동맹국들에게도 관세나 제재 등의 경제무기를 꺼내들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트럼프의 2번째 임기 동안 유럽과 더 많은 의견불일치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계속 독자적인 길을 간다면, 미국의 제재 노력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나라들의 통화가 달러 다각화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재정전망도 달러패권에 부담을 지운다. 미의회예산처 장기예산전망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99%에 이른 연방부채는 2034년 116%, 2044년 139%, 2054년 166%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감세조치를 연장한다면 부채는 더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미국채를 보유한 외국투자자들이 계속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는 외국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5년·10년만기 미국채를 100년만기 저금리증권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또 지난해 미 대선에서 트럼프 고문으로 활동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등은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고 미국수출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해외의 미국채 매입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트럼프 경제자문위원장으로 지명된 스티븐 미란도 미국채를 보유한 외국기관 투자자들에게 이자지급액의 일부를 원천징수하는 방식의 ‘사용자 수수료’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전제는 달러의 국제적 지위를 뒷받침하는 초석”이라며 “달러가치 하락을 목적으로 미국채의 해외 매입을 제한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금세 통제불능상태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동맹국들에 대한 위협도 큰 리스크다. 아이켄그린 교수는 “미국이 동맹국들에 등을 돌린 것으로 인식되면 달러의 글로벌 역할은 위축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1960년대 독일과 일본정부는 미국과의 방위동맹, 특히 자국에 주둔하는 미군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 달러의 국제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 오늘날 한국과 대만 일본은 미국 안보우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외환보유액 중 불균형적으로 막대한 비중을 달러로 보유하고 있다”며 “트럼프정부가 오히려 러시아를 중시하는 유화정책을 펴면서 동맹정치가 달러 입지에 중요하다는 개념은 실시간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신뢰할 만한 파트너인가
세계적인 금융싱크탱크 ‘공적통화금융기구포럼(OMFIF)’도 “트럼프가 달러패권을 약화시키고 있다”며 “이는 미국과 세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OMFIF 미국지부 의장인 마크 소벨, 미국기업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연준 전 국장인 스티븐 카민은 이달 10일 “가까운 미래 달러의 세계 지배력에 대한 실행가능한 대안은 없다”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달러패권의 장기적인 하락을 가속화하고, 그 과정에서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먼저 “미국 재정상태는 이미 지속불가능에 가까운데, 트럼프정부는 세금인하를 계획하고 있다. 정부효율부의 대규모 예산삭감으로 미국경제가 잠재적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는 허구적인 주장을 펴고 있지만, 이미 과도한 부채와 적자는 더 높아질 것”이라며 ‘달러의 글로벌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지 전세계가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을 짚었다. 소벨 의장은 “외국정부가 보유한 달러자산의 약 3/4은 미국과 군사적 유대를 맺고 있는 국가들이 갖고 있다. 달러패권은 미국이 나토(NATO)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같은 기관을 지원하고, 자유무역과 세계무역기구(WTO)를 지지하고, 냉전기간 소련과 싸우면서 민주주의와 영토보전을 수호하는 등 오랜 관행을 통해 구축됐다”며 “이제는 이 모든 것이 공격 받고 있다”고 말했다.
소벨 의장은 전세계가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여기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사례로 독일 차기총리로 유력한 기독민주당 대표 프리드리히 메르츠의 발언을 꼽았다. 메르츠 대표는 지난달 총선승리 직후 “나의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우리가 점차 미국에서 실질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유럽을 가능한 한 빨리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OMFIF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달러 대안이나 해결책을 더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시장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며 “달러 지배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은 달러의 국제적 역할뿐 아니라 미국 자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