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은 시민계급의 실용미술이었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7)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이에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과 과도기적 매너리즘 미술을 살펴보았다.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미술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된 문예부흥 운동의 종식과 함께 종언을 고했으며, 17~18세기는 범유럽적으로 바로크, 로코코미술이 약 200년간 유행하였다. 예술 사학자 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예술은 사회사의 일부’라는 거시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렇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이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듯이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에 따라 17~18세기의 미술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변형되고 발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17세기에 유행했던 바로크미술을 살펴본다.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과 동시대 미술이지만 그 궤를 달리한다. 전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네덜란드를 제외한 3개 국가는 모두 구교국가로서 극적인 명암 대비, 역동적인 구도, 화려한 장식성 등의 바로크적 유사성은 공유하나 나라별로 차별성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들 3국과는 다른 신교국가로서의 차별성은 있으나 바로크적 유사성이 있다. 그렇다. 17~18세기 바로크 미술은 각국이 처한 시대적 배경, 정치적 상황, 문화적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는 ‘1 지붕 4가족’ 같은 미술이었다.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북유럽국가 중 네덜란드의 독립과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의 여파는 결정적이었다. 네덜란드의 남부지역(벨기에, 가톨릭)과 달리 북부지역은 도시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인 루터 주의와 칼뱅주의 중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반 스페인적이며 도시 상공인 중심의 칼뱅주의를 받아들였다. 화려한 성상, 성화 등을 우상숭배로 배격하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중심이며 엄격한 금욕주의는 네덜란드의 독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종교미술의 퇴조를 불러왔다. 아울러 대서양 시대는 동, 서인도회사의 설립 후 무역과 금융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의 부상, 국왕이 없는 공화정의 실현, 새로운 미술시장의 형성을 가져왔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베스트팔렌조약의 결과)한 1648년을 전후로 약 50년간 번영과 시민계급 중심의 ‘실용미술’이 함께 발전하는 ‘네덜란드 황금기 (Dutch Golden Age)’를 맞이했다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은 시민계급의 ‘세속화’가 중심
그렇다면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배경과 특성은 어떠한가?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은 주체, 대상, 주제 면에서 여타 3국의 바로크 미술과 그 배경이 다르다. 첫째, 미술의 주체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공화국을 세우고 대서양 시대 해상강국을 주도한 시민계급이었다. 이제 미술의 후원자, 의뢰자, 구매자는 교황 왕족 귀족 등이 아닌 부를 축적한 상공인이었으며 화가도 교회나 궁정 소속의 화가가 아닌 길드, 공방 소속, 또는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둘째, 미술의 대상도 시민계급이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교황 국왕 왕족 귀족 등이 아닌 상인 농민 군인 하녀 집시 등이었다. 셋째, 미술의 주제나 내용도 시민계급의 일상생활이나 자연생활을 그린 세속화가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미술의 중심이다 보니 미술의 양식도 여타 3국의 바로크 미술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빛과 어두움, 명암의 대비 등의 바로크적 미학은 공유하지만 역동적인 구도, 화려한 장식성 등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이는 성서 중심의 신앙생활, 엄격한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칼뱅주의, 시민계급의 다양한 취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신화 성서 교황 황제 중심의 종교화나 역사화 대신 시민계급 중심의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세속화’의 장르화가 이루어지고 자연주의적 사실주의적 실용주의적 그림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들은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면서 감상 포인트가 된다.
네덜란드 세속화는 시민계급의 ‘사회적 지위와 부’의 상징
필자는 지난해 8월 6일부터 9일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반고흐미술관, 렘브란트 박물관,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현대미술관 등을 둘러보면서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은 건축보다 회화가 중심이었다. 교회 건축물은 대부분 개신교회였다. 이는 16세기 칼뱅파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성당은 물론, 성상 성화 조각 제대 제단화 등을 대규모로 파괴한 ‘이콘 파괴 운동(Iconoclasm)’, 즉 성상 파괴 운동의 결과였다. 도시 곳곳의 분위기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당시의 종교개혁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었다.
회화는 시민계급이 중심이다 보니 프랑스 바로크 미술과 같은 역사화-초상화-풍경화-정물화 등의 위계는 없어 보였다.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 델프트 등의 도시를 둘러보면서는 예술과 권력, 자본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였다. 이 도시들은 벨기에의 브뤼허, 안트베르펜(안트워프), 헨트(겐트)와 함께 대서양 시대 무역 금융업 상공업 등으로 번영했던 도시였다. ‘네덜란드 황금기’에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에게 미술은 부의 상징이었다. 사실 그리스·로마-중세-르네상스-바로크 미술은 왕실, 교회, 메디치 가문과 같은 후원자들의 권력 과시 수단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로 네덜란드 미술은 부르주아들이 부를 과시하는 상징 수단이 되었다. 아무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 델프트와 더불어 벨기에의 브뤼허, 안트워프, 겐트는 플랑드르 미술,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 여행 겸 힐링 여행에도 최적인 도시인만큼 독자들께 강추한다.
렘브란트의 ‘야경’, 네덜란드 ‘시민적 바로크 미술’의 진수
네덜란드 바로크회화의 거장은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프란스 할스, 루이스 달, 하르멘 스텐베이크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황금기’를 빛낸 화가이면서, 이탈리아의 카라바조, 벨기에의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빛낸 거장이다. 그는 부유한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초상화 인기 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아내와의 사별 후 방탕한 사생활, 지나친 수집벽, 로코코미술의 등장에 따른 인기 하락으로 1656년 파산선고를 받은 후 말년에는 끼니까지 거르는 등 곤궁한 삶을 살았다. 렘브란트의 80여 편이 넘는 ‘자화상’, ‘돌아온 탕자’, ‘마리아의 죽음’ 등의 명작에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녹아있다.

그의 대표작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자랑하는 ‘야경(The Night Watch)’이다(그림 1). 명예의 갤러리 (Gallery of Honour) 룸에 걸려있는 모사품과 별로도 대형 원작(363cm x 437cm)은 복원작업이 이루어진 유리방 안에 있어 관람객들이 지나가다 감상할 수 있다. 야경은 렘브란트 인생처럼 반전이 많은 작품이다. 첫째는 작품의 제목이다. 원제목은 스페인과의 80년 전쟁 시기에 도시방어를 맡았던 ‘프란스 바닝코크 대위와 민병대’였다. 원래는 낮 장면인데 밤 장면처럼 변색이 되어 야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는 작품에 대한 평가다. 의뢰자들끼리 돈을 모아 제작한 집단초상화인데 누구는 얼굴이 잘 나오고 누구는 잘 나오지 않았다는 논란으로 렘브란트는 인기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후 네덜란드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초상화로 재평가되면서 거장으로 부활했다. 작품과 화가의 동시 반전이다.
셋째는 작품의 예술성이다. 그림의 왼쪽에서 스포트라이트처럼 바닝코크 대장과 부대원들에게 비추는 빛은 민병대의 역동성을, 황금빛 옷을 입고 민병대의 상징인 수탉을 들고 있는 소녀에게 비추는 빛은 수호천사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마치 연극 무대의 반전 효과처럼 느껴진다. 렘브란트가 ‘빛과 어둠의 대가’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벨라스케즈의 ‘시녀들’만큼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야경’은 역동적인 구도, 빛과 어둠의 극적대비(키아로스쿠로) 효과에 독창적인 연출까지 가미된 네덜란드 ‘시민적 바로크 미술’의 진수다.
페르메이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 네덜란드 장르 회화의 걸작
다음은 역시 네덜란드 황금기에 활동했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베르베르)다. 아쉽게도 그의 생애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청화 도자기인 ‘델프트 블루(Delft Blue)’로 유명한 소도시 델프트에서 길드 소속의 화가로 활동했으며, 43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정도다. 암스테르담의 현존하는 렘브란트 하우스(박물관)와 굳이 비교할 일은 아니나, 델프트에는 페르메이르의 집터에 파란색 하트모양의 아름다운 조형물이 델프트가 페르메이르의 도시임을 알려준다. 그가 남긴 작품은 37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유 따르는 하녀’, ‘델프트풍경’,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등의 명작을 남겼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유 따르는 하녀(그림 2)’는 네덜란드 장르 회화의 걸작이며 시민적 바로크 미술의 전형이다. 이 그림은 제목처럼 한 하녀가 조용한 주방에서 우유를 따르고 있는 장면이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섬세하고 하녀의 얼굴, 우유병, 빵 조각 위로 떨어지는 빛은 일상 속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특히 항아리에서 흘러내리는 우유가 정지된 순간처럼 보이는 것은 투명한 색과 빛을 활용한 착시 기법으로 압권이다. 이 그림은 은밀한 상징을 담고 있다. 항아리, 우유, 빵은 당시 네덜란드 회화에서 성적인 상징물이며, X-ray 검사에서는 그림 속에 큐피드의 흔적이 있어 하녀가 페르메이르의 연인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페르메이르만이 아는 비밀이다. 한편, 이 작품은 하녀가 두른 앞치마에 당시에는 금보다 비쌌다는 청금석에서 추출한 울트라마린(군청색)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미술 안료 상인이었던 그의 장인 덕분이었다고 한다. 11명의 아이를 둔 가장으로 평생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그림을 보면서 가슴 한편이 짠했다.
스텐베이크의 ‘바니타스 정물화’는 ‘모멘토 모리’의 상징

다음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하르멘 스텐베이크의 ‘바니타스 정물(그림 3)’이다. 스텐베이크는 델프트에서 태어나 숙부에게 그림 수업을 받고 화가의 삶을 살았다고 하나, 그의 생애도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바니타스(Vanitas) 라는 말은 라틴어 성경 구절인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바니타스 정물화는 사물이 지닌 상징성을 통해 삶의 덧없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죽음의 불가피성, 세속적 욕망의 무의미함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앙의 해골은 죽음을, 회중시계, 램프는 인생의 짧음을, 일본도는 권력을, 소라 껍데기는 부유함을, 술 항아리 피리 나팔 등은 쾌락을, 책은 인간 지식과 학문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어떤 부유한 상인은 저 해골과 시계는 빼고 내 집에 걸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헛되고 부질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림은 인생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경계하는 성찰의 메시지와 올바른 삶에 대한 도덕적 경고를 전한다.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은 시민계급 중심의 혁명적인 미술
이렇게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시민계급이 중심이 되는 시민적·바로크 미술을 추구함으로써 유럽 미술사에 독보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는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과 달리 당시로서는 혁신을 넘어 혁명적 수준의 미술임을 말해준다. 즉, 바로크 미술의 기본적인 미학을 공유하면서도 교황 왕족 귀족이 아닌 일반 시민의 소소한 일상과 사회적 현실에 시선을 돌려 인물 자연 사물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은 미술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일반시민의 일상, 노동, 가족, 여성 등을 대상으로 한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의 ‘세속화’의 장르화가 이루어 짐으로써 ‘실용미술 시대’를 열었다. 둘째, 화가의 전문화, 실내 장식용 소형 그림, 화상을 통한 그림의 거래 등 ‘미술시장’이 함께 성장하는 전기를 조성하였다. 셋째, 자연광과 순간의 묘사는 인상주의 미술, 서민의 삶, 노동, 자연의 사실적 묘사는 사실주의 미술 등 후대 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황금기 이후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은 18세기 해상제국 영국의 부상, 프랑스 미술의 영향력 확대 등으로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유럽의 바로크 미술과 함께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유럽 미술의 중심은 프랑스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715년 루이 14세의 사망은 절대왕정 중심의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 미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귀족 중심의 장식적이고 우아한 로코코미술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