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내란 피고인 윤석열 형사재판과 청산되지 못한 역사
내란 피고인 윤석열에 대한 형사재판이 본격 개시됐다. 지난 3년 ‘왕’처럼 군림하며 국정을 농단하던 윤석열과 비선 논란의 중심에 있던 김건희에 대한 엄정한 법의 심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만큼 헌정질서를 전복하고 국가를 혼돈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그들의 범죄사실을 확정하는 데도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8명의 재판관이 5가지 소추 내용을 모두 인용한 평결을 내놓았으니 재판의 진행도 순조로울 성싶다.
그러나 아직 방심은 이르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의 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한마디 사과도 없이 상왕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내란에 연루됐던 피고인들 역시 증거를 인멸하고 법의 심판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책동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란특검 임명을 거부하던 한덕수 권한대행이 돌연 내란혐의 피의자 이완규의 헌법재판관 지명을 감행한 것 또한 내란 뒷수습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지난 겨울 국민들은 윤석열이 ‘참으로 못할 짓이 없는’ 인사라는 점에 경악하고 전율했다. 집권당이 극우세력에 기대 헌재를 공격하고 윤 대통령을 비호하던 장면도 똑똑히 목도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과도기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한 대행의 출마설이 나오고, 헌법과 헌재를 부정하며 탄핵반대를 외치던 인사들이 대선에 나서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한 대행을 비롯한 내각과 국민의힘이 지금 당장 할 일은 육참골단(肉斬骨斷) 윤 대통령과 인연을 끊고 다시 한국정치의 희망이 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라는 영화 ‘내부자’의 대사같은 윤석열식 정치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국민을 계몽하고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는 오만의 DNA를 버리지 않으면 국민의힘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권력을 향한 무한질주, 무엇을 남겼나
송병준은 일제강점기 어용단체 일진회를 조직해 친일여론을 조성하고 일제의 국권 침탈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07년 일제가 군대해산, 일본인 고문정치를 강요하는 정미7조약을 획책할 때 그는 이완용 등과 함께 나라의 빗장을 열어주는 매국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1925년 죽을 때까지 권력과 명예를 향해 온 몸으로 질주했다.
지금까지도 한국정치론의 수작으로 꼽히는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를 쓴 그레고리 핸더슨은 송병준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가 막스 베버가 말하는 ‘모든 지배에서 벗어난 자’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전통 신분질서가 무너지는 틈새에서 구태의연한 사고를 거부하며 ‘영리한 상놈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 송병준은 민족반역자라는 추한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밖에 없었다. 권력 기술에 능했을지 몰라도 공동체를 지켜낼 양식과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우리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를 내전 상태로 몰아가면서 반민주, 반평화를 선동했던 자들에게서 다시 그의 악령을 봤다. 트럼프 취임식으로 달려가 국내정치에 외세를 끌어다 붙이는 추태를 마다하지 않고 내란 수괴 혐의의 윤 대통령 체포를 방해하던 국회의원들, 국가를 전복하려던 반역자를 풀어준 법관, 음으로 양으로 윤석열을 엄호해온 비뚤어진 검찰이 그들이다.
국민들이 더욱 분노한 지점은 국정을 책임지고 사회적 균형을 잡아야할 정치세력과 종교, 언론이 오히려 국론분열을 부추기는 데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지배 엘리트들이 특수계급이라도 된 양 자기들만의 성채를 구축하고 보통의 국민들을 ‘따듯한 솥 안의 개구리’로 만드는 것은 우리 역사를 파멸로 이끄는 우매한 짓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분명히 했듯 민주주의를 지켜 낸 것은 맨몸으로 국회를 지켜낸 시민, 은박덮개로 추위를 가리며 정의를 지켜낸 용기있는 국민들이었다. 윤석열같은 내란과 외환 혐의자를 석방해 거리를 활보하게 하고, 형사재판을 비공개하는 식의 특혜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헌신을 배신해서는 안된다. 메카시즘적 선동에 휘둘리고 근거없는 분노에 휩쓸렸던 사람들도 이제는 진실을 확인하면서 민주혁명이라는 역사의 대세에 동참해야 한다.
‘잔인한 4월’ 넘어 민주혁명 완수해야
영국 시인 엘리어트(T.S. Eliot)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황폐함과 상실감을 이기고 라일락을 키워내야 하는 역설을 담아낸 것이다. 4월은 한국인에게도 아린 기억이 많다. 4.3 제주 사건(1948년), 4.19 혁명(1960년), 그리고 세월호 참사(2014년) 등이 그렇다.
이 화사한 4월, 이제 이런 희생과 고통을 넘어 민주주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화해와 통합을 말하기 앞서 무도한 권력을 단죄하고 사악한 극우 기득권 엘리트들로부터 다시 맞은 ‘서울의 봄’을 지켜내고 국정동력 회복하는 데 힘을 합해야 한다. 한줌 권력으로 어떤 악행도 덮어버릴 수 있다는 못된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재앙으로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