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한류문화 수출하는 '한-터키 실크로드' 만들었어요"
박용덕 터-한 문화교류협회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현대사회에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은 문화상품이다. 미국이 영화 '주라기 공원' 한 편으로 벌어들은 돈은 한국이 한 해 동안 자동차수출을 해서 벌어들인 총수익을 능가할 정도다. 1차 농수산임업, 2차 광업 제조업, 3차 상업 운수업 금융업, 4차 지식정보산업에 이어 5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문화산업은 음악과 미술, 영화, 의상, 만화, 음식 등 분야에서 다채로운 문화상품들을 만들어 낸다. 빠른 교통수단과 정보통신 덕에 문화산업 제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통된다. 21세기의 엘도라도는 문화산업이다. 일찌감치 이를 간파한 인물이 있다.
<사진:박용덕 터키-한국문화교류협회 회장이 '한국-터키 친선 음악의 밤- 이스탄불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위해 이스탄불을 방문한 우리나라 음악인들에게 성소피아 성당을 안내해주고 있다. 거문고 명인인 정대석 서울대 교수(왼쪽 두 번째)와 김성진 전 서울시청소년국악관현악단장(세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다소 생소한 표현이지만 그의 직업은 '문화산업 오퍼상'이다. 음악이나 미술, 무용, 의상, 관광, 학술 등 문화 아이템을 유통시키는 일을 한다. 오케스트라 연주회와 미술 전시회, 의상발표회, 학술세미나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컨텐츠를 거래하는 '문화 무역'을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터키에서 사단법인 터키-한국문화교류협회와 비전문화관광무역회사, 한국인문화원 등을 운영하고 있는 박용덕(51)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박 회장은 17년째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이집트, 불가리아 등 중동 및 서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각종 문화 이벤트와 통역서비스, 관광 컨설팅, 기업 컨설팅 등 문화무역을 벌이고 있다. 순수한 수익사업만 따져서 많게는 연간 100만 달러 안팎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퇴근시간 무렵 이스탄불의 도로는 문자 그대로 주차장이다. 간선도로 뿐 아니라 작은 골목길까지 들어찬 차들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이스탄불의 중심인 탁심광장에서 서쪽으로 불과 20㎞ 떨어진 아레나 메가 문화예술센터까지 가는 데 무려 2시간 반 이나 걸렸다. 그나마 목적지를 1㎞ 정도 눈앞에 두고 차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결국 택시에서 내려 박 회장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마음이 바쁜 박 회장의 걸음이 빨라진다. 박 회장이 주선을 한 '한국-터키 친선 음악의 밤- 이스탄불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가는 길이었다.
"이번 연주회는 터키-한국문화교류협회와 터키한인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터키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사업회, 이스탄불 큐츠체크메제 구청이 공동으로 마련한 행사입니다. 우리 국악과 이스탄불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가 협연하는 연주회지요. 거문고 명인인 정대석 서울대 교수와 대금연주자인 송지윤씨, 장구의 최소리씨등이 무대에 오릅니다. 서양음악과 국악 간 만남의 장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온 김성진 전 서울시청소년국악관현악단 단장이 지휘를 하게 되고요. 김성진 지휘자와 정대석 교수님은 지난 2011년 10월 앙카라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밤' 공연에서 터키대통령교향악단과 연주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국악에 대한 터키 사람들의 반응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이스탄불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로 이야기가 됐었거든요. 한동안 성사되지 못하다가 이번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사진:정대석 서울대 교수가 '한국-터키 친선 음악의 밤- 이스탄불 국립 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교통지옥을 뚫고 온 1500여 명의 관객들이 객석에 앉아 있었다. 한국 동포들로 제법 눈에 뛰었지만 대부분 관객들은 이스탄불 시민들이었다. 첫 음악은 아리랑 팬터지였다. 아리랑은 언제 들어도 뭉클하다. 더군다나 이국땅에서 이국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리랑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금 연주자 송지윤씨가 자줏빛 저고리와 진회색 치마의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라는 곡을 연주한다. 청아한 대금 선율이 청각을 사로잡고, 화사한 한복이 시각을 사로잡는다. 이어서 정대석 교수가 직접 작곡한 '수리재'를 오케스트라와 함께 합주를 한다. 아름다운 거문고 선율이 따당땅땅 힘차게 연주회장에 울려 퍼진다. 우리 국악이 서양음악과도 저렇게 잘 어울리는구나! 한국과 터키 간 음악이 섞이고 우정이 녹아드는 훈훈한 밤이었다. 박 회장의 문화 비즈니스가 또 한 차례 멋지게 결실을 맺는 장면이었다.
<사진: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서 알록달록한 문양의 그릇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도시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곳곳에 로마와 비잔틴,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이 남긴 화려한 유적들이 널려 있다.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화려한 문물들이 번성했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마지막 왕궁이었던 돌마바흐체는 터키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산중 하나다. 19세기 중반 그림 같은 보스포루스 해변에 지어진 돌마바흐체는 기울어져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박 회장이 누구를 만날 약속이 있다며 도착한 곳은 돌마바흐체 궁전이었다. 정문의 직원들은 박 회장과 이미 안면이 많은 듯했다. 매표소를 거치는 관람객 통로와는 별도의 문을 열어주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박 회장은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오른쪽 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간다. 카펫이 깔린 널찍한 홀을 지나자 비서실 쯤으로 보이는 작은 방이 나타난다. 그곳 여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쪽 방의 문을 노크한다. 박 회장이 살짝 귓속말을 건넨다.
"황제 친위대장이 쓰던 방입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반대편 창밖으로 보스포루스 해안의 절경이 환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정면의 벽에는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파샤 아타투르크의 초상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문장이 걸려 있다. 이런 호사스런 방의 주인은 누굴까. 방의 주인은 박 회장을 보자 반갑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나누었다. 훤칠한 키에 콧수염을 기른 멋진 중년의 신사였다.
"케말 카라만 실장입니다. 이곳 돌마바흐체를 포함한 이스탄불 11개 왕궁의 재정을 통합관리하는 왕궁재무실장이에요. 국회 왕궁실 소속의 직책입니다. 지난 번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때 장소 협찬 등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 때 제가 엑스포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렀습니다."
카라만 실장은 박 회장의 터키 문화계 네트워크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왕궁재무실장을 맡기 전부터 오랫동안 박 회장과 공동으로 각종 문화 이벤트를 치러온 인물이었다. 특히 8년 전 돌아가신 그의 장인어른은 한국전 참전 용사였다. 박 회장이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문화행사들을 꾸준하게 이어가는 것을 보고는 각별한 애정으로 박 회장을 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가 10년 전 위스크다르 구청에서 근무할 때 처음 박 회장을 만났습니다. 그 때 이후 박 회장과 함께 이런저런 행사를 치렀는데 아주 성공적이었어요. 제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박 회장의 제안으로 터키와 한국을 연결시키는 문화 이벤트를 여러 차례 치렀습니다."
카라만 실장 방을 나와 박 회장과 함께 돌마바흐체 궁전의 뜰을 걸으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터키 문화계와 정계에 두터운 인맥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제가 터키 인맥을 형성하는 데는 참전용사들과의 인연이 크다고 할 수 있어요. 터키는 한국전쟁 당시 2만여 명의 군인을 파견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사를 파병한 나라지요. 그 참전용사들이야말로 한국과 터키를 연결하는 아주 끈끈한 고리라고 할 수 있지요."
"참전용사들이 박 회장의 터키인맥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나요."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과 터키가 나란히 4강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터키와 한국이 3위와 4위를 했지요. 더군다나 터키는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어요. 아주 온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답니다. 그 때 터키 참전용사협회에서 한국방문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터키 문화부에서 여섯 분의 항공료를 지원했어요. 한국에 갔을 때 숙식이나 관광 비용 등은 한국에서 지원을 해 주면 좋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비행기 표 할인을 받아서 티켓 넉 장을 더 만들고, 숙박과 관광 문제도 후원을 받아 해결을 해 주었습니다.
그때 참전용사들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문화부 장관실에서 기자회견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희 가족이 한복을 입고 참석을 했습니다. 세 살짜리 우리 큰 딸이랑 한복을 입고 참전용사들에게 큰절을 올렸어요. 한국인들이 참전용사들에게 전하는 보은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했지요. 그 때 그 장면이 터키 전 언론에 도배를 했습니다. 방송 메인뉴스로 뜨고, 신문 1면 기사로 실렸을 정도였어요. 한국으로 가서도 2주 동안 월드컵 경기 관람도 하고, 그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군부대도 방문하고, 여기저기 관광도 다녔습니다. 극진하게 모셨던 거지요. 터키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터키 16강 진출 소식을 듣고는 함께 환호하기도 했지요. 터키가 3위 성적을 올리고 귀국할 때는 제가 한국 사람들을 모아 탁심광장에서 터키국기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환영도 해주었습니다. 그 해 가을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참전용사 11분을 모시고 15박 16일 동안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참 성심껏 모셨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을 하신 분들이잖아요. 지극정성으로 참전용사들을 모시는 걸 보고는 터키 사람들이 저의 진정성을 인정해주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부 쪽 사람들도 알게 되기 시작했고요. 나중엔 제 돈까지 써가며 발 벗고 나서는 걸 보고는 도와주고 싶었나 봐요. 문화부 차관이 그러더라고요. 당신이 운영하는 비전 문화관광무역회사는 영리목적의 기업이라 공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어렵다, 그러니 공익적 목적의 사단법인을 하나 세우는 게 어떠냐고 했습니다. 지금의 터키-한국문화교류협회가 그래서 세워진 겁니다. 마침 터키 참전용사협회장 아들이 변호사였어요. 그 분에게 정관 초안 작업을 부탁했지요. 인가 과정에서 참전용사들이 쫓아다니며 도와주었습니다. 그 분들 덕에 2002년 12월 인가번호가 나왔어요. 외국인이 사단법인 인허가를 얻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한국인문화원을 설립한 이후엔 비로소 본격적으로 한국과 터키 간 문화교류 행사들을 벌이기 시작했지요."
<사진:이스탄불 중심가인 이스티클랄 거리를 달리는 빨간색 전차. >
박 회장의 사무실은 탁심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3~4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10층 정도 돼 보이는 건물 1층 입구에 터키어로 된 '터키-한국 문화교류협회'와 '비전문화관광무역회사'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문 앞에 한글로 '터키-한국 문화교류협회'와 '비전문화관광무역회사' 간판이 붙어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중앙 홀 널찍한 테이블에 10여 명의 터키인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한국어 교재가 펼쳐져 있었다. 이들 앞에서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박 회장의 부인인 양소영(42)씨다. 자신이 터키어로 만든 한국어 교재를 이용해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홀 안쪽 방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여다봤더니 그곳에서도 10여명의 터키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조용히 옆에서 따라다니며 안내를 해주던 박 회장에게 물었다.
"이곳 한국어 과정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나요."
"초급1과 초급2, 중급1과 중급2 등 모두 4단계로 구분돼 있어요. 오늘 오전은 전부 초급반 학생들입니다. 최근 이곳에서 열렸던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 이후 수강생들이 배 이상 늘었습니다. 평소 40여명이던 학생들이 지금은 100명 가까이 되거든요."
"K-POP이나 한국 드라마 등 한류의 영향은 없었나요."
"저의 문화 비즈니스가 터키에서 먹히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은 한국을 '형제 나라'로 인식하는 터키인들의 애정입니다. 그 애정에 부채질을 한 것이 바로 한류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5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의 터키 방문이 아주 결정적이었어요. 1957년 두 나라가 수교한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한 겁니다. 한류바람이 막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거든요. 노 대통령 방문을 계기로 국영방송에서 한국드라마가 방영되고, K-POP스타 팬클럽이 생겨나고, 한국문화 동호인 사이트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한국과 관련된 SNS 참여자들의 숫자가 10만 명을 넘어섰답니다. 저도 한류 바람의 덕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저희 한국인문화원의 한국어 수강과 한국유학 알선 건수가 부쩍 늘었거든요. 터키와 한국기업들의 경제 및 문화 컨설팅 의뢰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문득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이 머리를 스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한류문화 오퍼상인 박 회장이야 말로 스스로 행복하고 나아가서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돈벌이까지 잘 된다니 문화무역처럼 신통한 사업이 어디 있을까.
박상주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