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이집트에서 40년간 '대한민국 컨텐츠' 팔았어요"
국산기술 도입 계면활성제 제조업 시작, 11년째 흔들림 없는 흑자기조 이어가
조경행 텍스켐 이집트 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스핑크스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반 만 년의 세월을 한 결 같이 한 자리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 뒤쪽으로 자리한 쿠푸왕과 카프레왕,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들도 변함없이 웅장하고 미려한 모습 그대로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 무슨 수로 이토록 대단한 건축물들을 만들어 냈을까.
그러나 인류 최대 문화유적 중 하나인 기자 피라미드 주변은 적막감이 들 정도로 썰렁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연일 장사진을 이루던 매표소 앞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이른바 '아랍의 봄'은 이집트에도 불어 닥쳤다. 이듬해 2월 이집트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는 30년 간 권좌에 앉아있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한다. 2012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무르시가 당선됐지만 대통령 권한과 이슬람주의를 강화하는 '현대판 파라오 헌법'을 추진하면서 국민 분열을 초래한다. 무르시를 지지하는 이슬람 세력과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세력 간 심각한 충돌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혼란은 군부의 개입을 불러왔다. 군부가 무르시의 권한을 박탈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시킨 것이다. 그 이후 이집트에서는 무르시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 무력충돌이 이어지고, 민선 대통령을 퇴진시킨 군부에 대한 항의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최근 이집트 정정불안으로 외국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진 가운데 기자 피라미드에서 한 낙타 관광 상인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집트에서 40년을 살아온 조경행(68) '텍스켐 이집트' 사장과 함께 기자 피라미드를 찾았다. 스핑크스 앞에도, 피라미드 주변에도 관광 호객꾼들만 서성일 뿐이었다. 이 정도면 가히 황제 관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산한 기자 피라미드를 돌면서 조 사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수년간 이집트 정정불안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습니다. 다행히 최근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어요. 해외 관광객들도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는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인구도 9000만 명이나 되는 나라입니다. 일시적인 정치 혼란 때문에 한 동안 경제도 어려울 수 있겠지만 반드시 살아나게 돼 있습니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하기에 좋은 나라입니다. 지정학적으로도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시장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곳입니다."
후진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리스크는 정치 불안이다. 이집트 역시 후진국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다. 조 사장처럼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느 우리 동포 사업가들은 이런 후진국 리스크를 안은 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과 기술을 팔고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던 자기 나라의 컨텐츠를 팔아서 먹고 산다. 이집트나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같은 나라들은 문화유산이나 자연 등 관광자원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첨단기술과 제품들을 세계시장에 내다 판다. G-20 권역의 경제력을 갖춘 한국 역시 여러 가지 좋은 컨텐츠를 보유한 나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자제품과 자동차, 선박, 의류 등 품질 좋고 착한 가격의 공산품과 기술을 전 세계로 수출하면서 돈을 번다.
<사진:조경행 '텍스켐 이집트' 사장이 텐스 오브 라마단 공단에 있는 공장 뜰에서 직원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텍스켐 이집트는 대구에 있는 KD CHEM과 합작으로 섬유용 계면 활성제를 생산하고 있다.>
조 사장은 '메이드 인 코리아'의 제품과 기술을 이집트에 팔면서 알짜배기 기업을 일군 동포 사업가다. 명지대 경영학과 65학번인 조 사장은 1974년 카이로대학 경영대학원으로 유학을 왔다가 눌러 앉아 사업을 시작했다. 1977년 이집트 북부도시인 포트 사이드에서 무역업을 시작한 조 사장은 이집트 시장에 한국산 원단과 의류, 신발 등을 팔면서 기반을 쌓았다. 2001년 지금의 텍스켐 이집트를 설립하면서 섬유용 계면활성제를 생산하는 제조업을 시작했다. 최근 이집트 정정불안에도 불구하고 흑자 기조를 유지하는 단단한 사업기틀을 다져 놓고 있었다. 조 사장은 현재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카이로 지회장도 맡고 있으며, 1995~1997년엔 이집트 한인회장을 맡는 등 해외동포들 간 사업정보 교류 및 유대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40년 가까운 이집트 생활은 한 마디로 중동지역에 한국을 세일즈 하는 세월이었습니다. 이십 수년 동안은 한국에서 만든 물건을 사다가 팔았고, 10여 년 전부터는 한국의 기계와 기술, 원료를 들여와 이곳에서 직접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있는 KD CHEM과 합작으로 섬유용 계면 활성제를 생산하고 있어요. 젊은 시절 카이로 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지요. 한 마디로 저의 일평생은 한국의 우수한 컨텐츠를 이집트에 세일즈 한 세월이었노라고 자부 할 수 있습니다."
조 사장의 공장은 카이로 근교에 위치한 텐스 오브 라마단에 입주해 있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때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군에게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단도시였다. 이집트가 라마단 기간엔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예상을 깨고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거둔 승리였다.
깔끔한 흰색 페인트로 단장을 한 공장 벽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TEXCHEM EGYPT'라고 적혀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넉넉한 마당을 안은 3층짜리 공장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1층엔 각종 화공약품들과 실험기구들이 들어찬 연구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2층은 사무실 공간, 3층은 직원들의 기숙사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조 사장의 방은 2층에 있었다. 쉴 틈 없이 들락거리는 직원들과 손님들 때문에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조 사장이 한숨 돌릴 여유를 찾은 모양이었다. 손수 인스턴트커피를 타가지 와서 회의용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사장실 벽엔 'TEXCHEM EGYPT'와 'KD CHEM CO LTD'라는 상호를 나란히 인쇄한 달력이 걸려 있었다.
<사진:텍스켐 이집트 공장 직원이 지게차를 이용해 계면 활성제 용기를 옮기고 있다.>
"KD CHEM은 대구에 있는 저희 파트너 회사입니다. TEXCHEM EGYPT는 KD CHEM의 박경호 회장님과 제가 합작으로 설립한 회사예요. 저희 공장은 KD CHEM의 우수한 기술을 이집트로 도입해서 100여 가지의 계면 활성제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계면활성제 제조 기술은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매년 흑자를 내고 있어요. 물론 2012년~2013년 이집트 정치상황 악화로 흑자폭이 30% 정도 감소하기는 했지요. 거래업체도 많을 때는 250개 정도나 됐는데 혁명 후엔 170~180개 정도로 줄었습니다."
조 사장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무실 빌딩 바로 뒤편이 곧바로 공장 건물로 연결돼 있었다. 공장 안에서는 직원들이 지게차를 이용해 파란 플라스틱 용기를 한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섬유용 계면 활성제가 들어있는 용기였다. 그런데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공장 한쪽의 지붕이 뜯겨져 있었다. 그 사이로 훤하게 하늘이 내다 보였다.
"이곳에서 서너 블록 떨어진 곳으로 공장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지금 이 공장은 4000㎡인데 너무 좁아요. 새로 이사를 하는 곳은 8000㎡로 이곳의 두 배 넓이입니다. 큰 공장 설비를 옮기기 위해 천장을 뜯어냈습니다."
조 사장은 무슨 계기로 이집트에서 제조업을 시작했을까. 하고 많은 제조업 중에서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계면활성제를 생산하는 제조업을 시작한 연유는 뭘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집트에서 무역업을 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이집트 정부가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 쿼터를 점점 줄이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제조업 육성을 위한 각종 지원책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외자 유치를 위해 외국인들에게 땅이나 집도 살 수 있게 허용하고, 공장 설립도 할 수 있도록 풀어주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라면 제조업을 할 만 하겠더라고요. 제가 무역업을 할 당시 주 품목 중 하나가 원단이었어요. 그 때 저와 함께 무역을 하던 이집트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원단 공장을 차렸습니다. 게다가 이곳 원단 제조 공장에 한국 기술자들이 100여 명 이상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폴리에스테르 등 원단 제조 분야에서는 우리나라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거든요. 원단 제조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계면 활성제입니다. 당시엔 전부 비싼 독일 제품을 수입해서 쓰고 있었어요. 몇몇 사람들이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당신이 한국 기술 들여다가 계면 활성제를 제조하는 건 어떠냐. 제가 원단 무역을 하면서 맺은 인적 네트워크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대구에 있는 KD CHEM과 공동투자로 공장을 세우게 된 겁니다. 예상이 적중했어요. 최근 이집트 사태 이전까지는 매월 꾸준하게 10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렸으니까요."
조 사장의 차를 타고 이집트 북쪽의 무역도시인 포트 사이드로 가는 230㎞의 여정에 올랐다. 수에즈 운하의 지중해 쪽 출입항인 포트 사이드는 조 사장에게는 청춘을 불사른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1977년부터 2000년까지 이십 수년 간 무역업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카이로에서 수에즈 운하의 중간지점 항구도시인 이스마일리아까지는 시원한 10차선 도로가 뻗어 있었다. 이집트 군부에서 건설한 도로라고 했다. 이스마일리아부터 포트 사이드까지의 4차선 도로는 수에즈 운하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씩 산더미처럼 화물을 실은 컨테이너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운하를 지나는 육중한 배들은 마치 육지 위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사진:조 사장이 이집트 북부의 포트 사이드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자신의 고객인 무하메드 카림 을화텍스 사장과 함께 식사를 할 생선을 고르고 있다. >
포트 사이드는 바다와 육지 모두 분주하기 짝이 없는 항구도시였다.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쪽의 포트 사이드와 아시아 쪽의 포트 푸아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중해 바닷물을 받아들이는 깔때기처럼 보였다. 조 사장과 함께 포트 푸아드로 건너가는 페리선에 올랐다. 양안 사이엔 4척의 무료 페리선이 수시로 손님과 차량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1977년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만해도 포트 사이드는 폐허였어요.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포격을 받은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힐튼 호텔 벽에 쑹쑹 뚫려있던 포탄 자국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포트 사이드를 재건한 인물은 사다트 대통령입니다. 76년 포트 사이드를 자유무역항으로 지정했거든요. 포트 사이드는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 등 3개 대륙을 잇는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세계 물류의 숨통격인 수에즈 운하의 입구에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 무역 및 물류기지로 육성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자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지요. 사다트의 구상대로 포트 사이드는 급속한 성장을 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인구 50만 정도로 쪼그라들었지만 한때는 백만 이상 나가던 번성한 무역항 이었습니다. 포트 사이드가 자유무역항으로 지정되던 76년이 마침 제가 졸업하던 해였어요. 잠시 학교로 가려고 생각도 해봤었지요. 그런데 당시 강사월급이 18만원 밖에 안됐습니다. 그해 9월 결혼을 했는데 그 돈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어렵겠더라고요. 이곳 포트 사이드로 다시 돌아 와서 무역회사를 차렸지요."
포트 푸아드에 내려 아시아 땅을 잠시 서성인 뒤 다음 페리선을 타고 다시 포트 사이드로 돌아왔다. 조 사장을 따라 도착한 다음 행선지는 딸라띠니 스트리트에 있는 한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문에 광진 코퍼레이션이라는 영문 간판이 붙어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이집트 사람이 반갑게 조 사장을 반긴다.
"제가 무역업을 할 때 제가 데리고 있던 6명중 한 명입니다. 무역업 정리하면서 직원들 모두를 독립시켜줬어요. 광진 코퍼레이션도 제가 쓰던 상호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겁니다."
사방 벽으로 화려한 빛깔의 여성 드레스들이 잔뜩 진열돼 있었다. 이집트에서도 저토록 화사한 드레스를 사가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이건 나들이옷이 아니라 집에서 입는 옷이에요. 제가 이집트 여성들의 복식 문화를 바꾸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건 '바틱'이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전통의상입니다. 바틱을 이집트 여인들의 나이트가운이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으로 자리 잡게 한 게 바로 접니다. 1989년 바이어 몇 사람을 데리고 자카르타에 갔다가 우연히 반 컨테이너 정도 수입을 하게 됐는데 뜻밖에 대박상품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은 이집트 여인들 대부분이 대 여섯 벌의 바틱을 가지고 있답니다. 다림질 할 필요 없고, 치마 단만 조정하면 아무나 입을 수 있는 편안한 옷입니다. 가격도 저렴해서 인기가 시들지 않고 있어요. 한참 잘 팔릴 때는 여름 한 철에만 500만~1200만 달러씩 들여왔답니다. 20년 이상 이집트 시장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상품입니다."
자신의 사업으로 세상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준다는 건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인가. 지구촌 각 나라의 상품들을 바둑판 위의 바둑돌 옮기듯 이리저리 옮김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무역업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해외무대에서 고국의 상품과 기술을 판매함으로써 그 나라 제조업도 키우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하는 조 사장 같은 사업가들은 얼마나 복된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박상주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