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내 인생엔 메마른 사하라사막이 짙푸른 초원이었어요"
'모로코의 풍운아' 최규석 꼬레 마리네 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아담한 쌍발기 한 대가 모로코 카사블랑카 공항 활주로에 기다리고 있었다. 900㎞ 남쪽 서부사하라의 대서양변에 있는 탄탄으로 가는 45인승 비행기였다. 23년 째 모로코를 무대로 선원송출 사업을 하고 있는 최규석(51) 꼬레 마리네(Coree Marine co. ltd) 사장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최 사장은 한때 탄탄을 무대로 원양어선 70척과 선원 1000여명을 관리하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선박 5척에 선장 5명을 관리하는 수준으로 선원송출 사업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최 사장은 최근 카사블랑카에 한모 트레이딩(Hanmo Trading co. ltd)을 설립, 우리나라의 양식기술을 모로코에 접목시키는 수산물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다. 최 사장의 아프리카 인생 제 1막의 무대가 탄탄이었다면, 카사블랑카는 제 2막의 무대가 되는 셈이다. 최 사장은 탄탄과 카사블랑카, 그리고 유럽을 자신의 앞마당처럼 오가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최 사장은 지난 2006년부터 현재까지 모로코 아가딜 한인회장도 역임하고 있다.
<모로코에서 선원송출 사업을 하고 있는 최규석 꼬레 마리네 사장이 모로코 서사하라 대서양변의 탄탄항구에서 출항을 앞둔 선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용기(뒷줄 맨 오른쪽) 선장과 김상준(맨 왼쪽)의 모습도 보인다.>
"카사블랑카와 탄탄을 오가는 이 비행 노선은 고객의 90%가 저의 사업 파트너이자 선주사인 Omnium Marocain De Peche(OMP)와 관련된 고객들입니다. 사실상 OMP 전용노선이나 다름없어요."
비행기는 서부 사하라 지역 중심지인 굴민에서 30여 분간 중간기착을 했다. 몇 사람 내리고 또 몇 사람 새로 태운 비행기는 카사블랑카를 떠난 지 1시간 40여 분만에 목적지인 탄탄에 도착했다. 짙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대서양과 새 하얀 모래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하라 사막이 맞닿는 지점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제가 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은 게 1990년 1월 12일입니다. 대서양 해외 선원 송출회사인 (주)그레이트 마린 지사원으로 탄탄에 발령을 받았거든요. 이곳에 도착 하던 날 혼자 만세를 불렀습니다.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어요. 제 꿈은 아프리카에 있었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었어요. 남들에겐 메마르고 거친 사막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짙푸른 초원이었습니다."
공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 사장 회사 직원의 차를 타고 탄탄 항구로 갔다. 탄탄 항구에는 똑 같은 모양의 원양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다른 항구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고깃배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배마다 출항을 준비하는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OMP는 350t급 어선 54척을 소유한 아프리카 최대 원양 종합수산회사입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포함해서 어획물 생산규모 4위에 올라 있는 회사이지요. 이곳 탄탄항에 대형 도크와 자체 선박수리시설, 대형냉동고, 어획물 처리 시설 등을 갖춘 종합수산회사입니다. 카라키나라키 모하멧 OMP 회장은 모로코 수산업을 개척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지요. 저와는 23년간 동고동락 해왔어요. OMP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고유가로 인한 극심한 불황과 조업부진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권과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한동안 조업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겪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 회사 선장들 미불금이 10억 원 가량 발생하기도 했어요. 다행히 최근 조업을 재개했고, 미불금 문제도 원만하게 합의를 끝냈습니다."
최 회장의 사무실은 탄탄항구 보세구역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담하고 깔끔한 1층짜리 건물로 들어서자 여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카사블랑카에서 벌이고 있는 새로운 사업 때문에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최 사장을 대신해 회사 행정을 처리하고 있는 카미사라는 여직원이었다. 최 사장의 방에는 책상 하나와 작은 응접세트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자신을 거쳐 간 역대 선장들의 사진과 이름이 빡빡하게 붙어 있었다.
"제 가슴 속에 뜨겁게 간직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꿈을 성취한 무대가 바로 이곳입니다. 마이너스 3만 원으로 시작한 인생입니다. 한국을 떠나던 날인 1987년 3월 14일은 제 생일이었어요. 한국에서 마지막 생일파티를 하고 김포공항으로 나갔는데 병역 확인증이 없더라고요. 당시엔 출국하려면 동사무소에서 발급하는 병역 확인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출국한다고 날마다 술판을 벌이다가 어디서 잃어버렸던 거지요.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공항에서 3만원이 들었어요. 당시 서산에 사는 둘째 누나와 매형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었습니다. 매형이 그 돈 3만 원을 내 줬어요. 부채 3만 원을 안고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전초기지였던 라스팔마스로 떠난 거지요.
라스팔마스는 큰 형님과 외삼촌이 사업을 하고 있는 곳이었어요. 저보다 15살 위인 형은 새우잡이 배 3척으로 수산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조그마한 선식업체를 운영했고요. 제가 원광대 전기공학과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갔습니다. 다시 복학을 하려는데 자꾸 전공에 대한 회의가 들더라고요. 이 길이 과연 내 길인가. 전기공학이 제 적성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때 마침 라스팔마스에서 큰 형이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해외 진출이 쉽지 않은 때였어요. 두말할 것도 없이 좋다고 했지요."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리 순탄하기만 한 것인가. 최 사장에게 라스팔마스로 밀려오는 대서양의 파도는 높고 거칠기만 했다. 그렇게 잘 나가던 큰 형님 사업이 갑자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업가와 동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습니다. 물불 안 가리고 일자리를 찾은 끝에 얻은 일이 부두의 '도방' 이라는 일이었어요. 부도난 선박회사의 배들을 압류해서 부두에 묶어 놓는데 그 배를 지키는 경비일을 도방이라고 합니다. 물도 전기도 없는 배에서 밤에는 경비 생활을 하고, 낮에는 서반아어를 배우러 학원에 다녔습니다. 선장이 배를 운전하는 조타실을 브리지라고 합니다. 브리지에서 야간 당직을 섰어요. 한 밤중 추운 브리지 바닥에서 구부리고 잠을 잘 때면 강아지만한 쥐들이 들락거렸어요. 정말로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라스팔마스에 입항한 원양어선에서 완도 중학교 출신 동창 두 명을 만났습니다. 어엿한 2등 항해사로 들어온 친구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 친구들 배로 점심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먹었던 밥은 내 생애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처음 배로 올라갔을 때 주방에서 품기던 구수한 밥 냄새를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1989년 부산소재 선원 송출사인 그레이트마린의 라스팔마스 현지 직원으로 입사를 하면서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라스팔마스 한인교회 유회가 열렸어요. 한인들 수백 명이 모이는 큰 행사였지요. 그 야유회 행사의 사회를 제가 보게 됐습니다. 대학 생활과 군 복무 시절 레크리에이션의 단골 사회자였거든요. 그 때 당시 라스팔마스에서 가장 큰 재력가였던 그레이트마린의 회장님도 참석을 하셨었어요. 그분이 저를 유심히 살펴보셨나 봐요. 당시 서울에 있는 쟁쟁한 대학 출신들을 제치고 제가 입사를 했습니다. 훗날 부산 본사 전 직원 회식자리에서 회장님이 '거친 선원들을 다루는 데는 저 같은 유연함과 재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하시더군요."
<카사블랑카는 최 사장이 한모트레이딩이란 회사를 설립. 모로코에서의 인생 '제2막'을 펼치는 무대다. 카사블랑카 항구의 소형 연안선 부두의 야경이 아름답다.>
한 번 풀리기 시작한 그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웠다. 세상이 그를 위해 움직이는 듯 보였다. 1990년 라스팔마스를 입출항 기지로 삼고 조업을 하던 모로코 국적 선박들이 일제히 자국으로 모항을 옮겼다. 그동안 자체 입출항 관리 능력이 없어 스페인 라스팔마스 항구를 이용해 왔으나 자국의 입출항 시스템을 갖추고 난 뒤 모로코 국왕이 자국으로 하역 기지를 옮길 것을 명령한 것이다.
"그레이트마린에 입사를 한 지 일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모로코가 외환확보 차원에서 실시한 정책이었습니다. 그레이트마린이 상대하던 선주사가 지금 저의 파트너인 OMP입니다. 모로코 국적사인 OMP도 이곳 탄탄으로 기지를 옮겼습니다. 그때 그레이트마린에서 저를 탄탄 기지로 발령을 냈습니다. 모로코 근무 4년만인 31살에 최연소 기지장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엔 한국의 일반선원들은 한국으로 다 철수 하는 시점이었어요. 우리 밑에서 원양어업 기술을 십 수 년 간 배운 모로코 선주들이 선장 이외에 일반 선원들은 자국민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한국에서는 원양어선 타는 일이 3D직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요. 선원 송출 사업이 사양 산업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겁니다."
때로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1997년 3월 그레이트마린과 OMP간 선원송출 계약이 해지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선원 송출 사업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양사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빚어진 일이었다. 어느 새 불쑥 커버린 모로코 선주사들이 기존의 선원송출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 사장에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7년 동안 현장에 탄탄 기지에서 일을 하면서 OMP측과 우리나라 선장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쌓아 놓고 있었다. 전화위복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레이트마린과 OMP간 미불금이 200만 달러 정도 됐습니다. 제가 나서서 미불금을 깔끔하게 정리해 줬어요. 그런 과정에서 우리 한국선장들과 모로코 선주가 저를 지지해 주면서 졸지에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선원 송출회사 사장이 된다는 것은 권력을 쥔다는 의미였다. 송출회사 소속의 선원과 선장에 대한 인사권을 거머쥐게 되기 때문이었다. 선장이 되는 건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일단 선장이 되면 명예와 수입이 보장됐지만 그만큼 어려운 길이기도 한 것이었다.
"일등항해사 10년 수입과 선장 1년 수입이 맞먹을 정도입니다. 그 많은 항해사들의 진급이 제 손에 달려 있었어요. 이제까지 제가 진급시킨 선장이 대략 100명 정도 됩니다. 저희 고향에 완도수산고등학교가 있어요.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는 동향출신의 항해사들이 여럿 몰려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연 학연 연을 떠나 최대한 공정하게 인사권을 행했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외국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 줘야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외국인 선주사와 한국 선장들 중간에 서서 입장을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주사 입장 쪽으로 조금만 기울면 선장들이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냐'며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반대로 선장들 입장만 대변해도 선주와 일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지요. 선원 송출업무를 잘 하려면 조율의 달인이 돼야 합니다."
선원송출 사업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 초반까지가 최전성기였다. OMP 한 회사를 통해서만 선장과 일등항해사, 이등항해사, 갑판장, 처리사, 요리사 등 연간 1000여명의 선원들을 송출했다. 한국의 품질 좋은 어구들도 최 사장의 손을 거쳐 5000만 달러 정도가 OMP로 수출됐다.
"지금은 입출항 관리는 물론 선원들까지 모로코 자국화가 거의 완료된 단계입니다. 지금 우리 회사가 관리하는 배는 5척에 선장 다섯 분뿐입니다. 그렇지만 썩어도 준치입니다. 어획 상여금을 포함한 선장들의 연봉과 어구 수출액을 합치면 연간 160만 달러 정도가 됩니다. 대서양은 신이 내려준 청정해역입니다. 패류와 해초가 풍부한 수역이에요. 북극의 빙하 녹은 물이 해저로 유입되면서 한류와 난류가 섞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계 최고 품질의 문어와 갑오징어, 오징어, 서대 등이 잡히는 이유입니다."
<모로코 해역은 세계적인 청정 해역이다. 대서양변 천연염전의 모습이 마치 설원처럼 보인다.>
카사블랑카 부둣가의 한 하얀색 건물에 'Rick's Cafe'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사블랑카는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명화 카사블랑카의 무대다. 'Rick's Cafe'는 영화 속 주인공 릭 블레인(보가트 분)이 운영하던 카페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 카사블랑카의 한 컷도 카사블랑카에서 찍지는 않았다는 점을 꼬집어 내지만, 사람들은 그와 무관하게 전설을 만들어 낸다. 카페는 릭과 전설을 찾는 사람들 때문에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 어렵게 스탠드바에 자리를 구해 앉아 와인 한 병 주문했다. 최 사장은 카사블랑카에서 아름다운 이별과 새로운 만남과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는 지난 23년 동안 한국의 선진 원양어업기술을 모로코에 전수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원양어선 선원 송출 사업은 제 인생의 1막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업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 앞으로 제 인생의 2막은 모로코에 우리나라의 양식기술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로코의 청정해역에 한국의 양식 기술을 도입한다면 큰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참으로 숱하게 넘어지고 깨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단계라고나 할까요. 이제까지 저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도로를 200만㎞ 이상 달려봤습니다. 오후에 사하라 사막길을 운전하다보면 갑자기 회오리바람과 함께 모래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는 장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땅에 도전장을 내 민 것 아닙니까. 새로운 사업도 그 회오리바람처럼 저돌적으로 펼쳐 보려합니다. 가슴 두근거리는 새로운 도전입니다."
카사블랑카의 전설에 취하고, 와인 한잔에 취하는 밤이었다. 완도 섬 소년 출신 최규석 사장은 카사블랑카에서 또 다른 전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상주 언론인·오지여행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