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세상에서 돈 버는 일이 가장 쉬웠어요"
짐바브웨·잠비아의 김근욱 소지키패션스 대표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김근욱 사장과 함께 잠비아 루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루사카에 있는 가발생산 공장을 둘러보러 가는 그의 출장길에 동행을 한 것이었다. 루사카 공항에 도착하니 반갑게도 아는 얼굴이 마중을 나와 있다. 루사카에서 세탁공장 '도쿄론드리'를 운영하는 박익성 사장이었다. 두 달 전 잠비아에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취재를 한 인물이었다. 박 사장은 네 살 위인 김 사장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 김 사장이 루사카에 출장을 올 때마다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박 사장이 그날 저녁 형님을 위한 저녁자리를 마련했다. 루사카 시내의 한국음식점에서 술 한 잔을 겸한 저녁을 함께 했다.
<김근욱 사장이 잠비아 루사카 말람보 로드에 위치한 가발생산 공장 '사나그룹'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나그룹은 케냐의 동포기업가가 만든 가발생산업체인 엔젤스와 반반씩 투자해 만든 공장이다.>
모처럼 호형호제 하는 지인들이 모인 편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주 겸 한잔 마신 술 탓이었을까. 김 사장의 말문이 활짝 열렸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스토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래봬도 중학교 내내 전교 1등만 했다오. 동아대 법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꿈이 컸었지. 김해에 은하사라는 절이 있어요. 영화 '달마야 놀자'를 촬영한 이후 널리 알려진 곳이지. 1학년 여름방학 때 고시를 하겠노라고 책을 싸들고 들어갔다오. 거기서 하라는 고시공부는 안 하고 맨 날 시원한 계곡에서 술판만 벌였어. 그 때 친해진 스님 한분이 어느 날 내 손금을 봐주겠다는 거야. 내 손바닥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 양반 왈, 당신은 1000만 명 중에 하나 날까말까 한 천운을 타고 났다는 거야. 그 소리를 들으니까 고시를 할 생각이 싹없어지더라고. 그런 천운을 타고 났는데 힘들여 고시공부를 무엇 때문에 하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러나 그건 그저 핑계일 뿐이고 아무래도 나는 진득하게 눌러 앉아 책을 파는 체질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 거야. 다만 그 핑계를 대고는 하산한 거지. 그때부터 누구 똘마니 노릇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 땡초의 한 마디가 평생 자기 암시 효과를 주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 그러고는 대학시절 내내 데모만 했어. 그때 한참 유신 반대투쟁을 할 때였잖아. 4학년 때는 학도호국단 법대 연대장을 했었거든. 부마사태에 이어 10.26까지 터지면서 정말 요동치는 세월이었지."
김 사장은 80년 졸업과 함께 신동아그룹에 입사를 했지만 2년 반 만에 사표를 내고 만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고 해도 결국 남의 머슴노릇을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인력거를 끌어도 내 인력거를 끌자고 결심을 한 것이었다.
"직장을 때려 치고 사업구상을 하고 있는데 대학선배 중에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하고 계신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이 사업 괜찮으니 한 번 해보라고 하더라고. 김해에 선호산업이라는 플라스틱 골판지 생산 공장을 차렸어요. 당시 보풀이 많이 일고 내구성이 약한 종이박스를 플라스틱 박스로 대체하는 붐이 일고 있었어. 십 수 년 간 참 성업이었지. 김해공장에서 물량을 대지 못해 산청에 또 공장을 지었을 정도니까. 서울사무실 직원까지 모두 500명이 넘는 식구들을 거느렸으니까. 당시 연 매출 140억~150억 원 정도 했을 거야."
그러나 아는 후배에게 당좌수표를 내 준 게 화근이었다. 후배가 부도를 낸 것이었다. 김 사장의 회사도 40억 원 가까이 연쇄부도를 맞았다. 96년 9월 경매로 회사가 넘어가 버렸다. 군산교도소에서 1년 6개월 간 수감생활까지 해야 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모두 인연으로 얽히는 것이더라고. 교도소 생활을 할 때 짐바브웨에서 잡화사업을 하던 친구를 만났지 뭔가. 경제사범으로 수배를 받다가 짐바브웨로 도피를 해서 2년 정도 사업을 하던 친구였어요. 기소중지 중 살짝 귀국을 해서 일을 보려다가 덜컥 불심검문에 걸려 교도소로 온 친구였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나중에 짐바브웨로 놀러오라고. 98년 7월 석방이 됐는데 그 양반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머리나 식히고 오자 하는 생각으로 짐바브웨에 왔지. 한 달 동안 와 있었는데 굉장히 좋더라고. 자연환경에서부터 주거시설, 물가, 사람들 모두 파라다이스처럼 보일 정도였어. 이곳은 꽃나무들 천지예요. 커다란 나무들이 화사한 꽃들로 치장을 한 모습을 보면 정말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야."
김 사장은 하라레에서 한 달 머물면서 바로 여기로구나 하는 결정을 했다. 한국으로 들어와서는 바로 짐바브웨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20만 달러를 들고 하라레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장조사를 해 보니 봉제공장을 하면 잘 될 것 같았다. 99년 7월 컨테이너로 미싱 60대와 원단을 들여왔다. 기술자 두 명도 함께 모셔 와서는 하레레 인근 마사사 공단에 봉제공장 세팅까지 완료했다. 그러나 봉제공장은 가동도 해보지 않은 채 접어버렸다.
"짐바브웨로 다리를 놓아준 한국인 파트너가 자꾸 사기를 치는 거야. 무슨 돈이 필요하다면서 자꾸 손을 내미는 데 터무니없이 속이는 거야. 그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비즈니스를 같이 할 수 있겠어. 거짓말 한 건만 눈에 뛰어도 끝을 내는 게 내 성깔이거든. 아, 이건 안 되겠구나, 미련 없이 접어버렸지. 미싱 등 들여온 물건 30%는 사기 치던 친구에게 줘버리고, 나머지 70%는 우리 동포들에게 헐값으로 처분해 버렸지. 망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육감이랄까, 결단력 같은 거라고 해두자고. 하긴 그때까지만 해도 해외이민 간 사람들이 조선 놈만 조심하면 성공한다고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2000년 5월 김 사장은 봉제 사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만다. 학교 양호선생을 하던 아내가 부랴부랴 명퇴를 하고는 둘째 딸 아진이랑 하라레로 건너왔다. 아내 명퇴금으로 잡화점을 시작했다.
"우리 집 사람이 참 센스도 있고 생활력이 강한 여자예요. 중국인들이 컨테이너로 물건 들여오면 달려가서 족집게처럼 잘 팔리는 물건들을 집어내 왔지. 현지인 10여명에게 원단을 사서 나눠주고 남방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 짐바브웨 방송 출연자들 중 우리 집 사람이 만든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어요."
그런데 막상 김 사장은 아프리카에 대한 회의가 자꾸 들기 시작했다. 한때 5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사업을 크게 하던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잡화나 팔고 있다는 게 속된 말로 쪽팔렸다고 했다. 서울 도곡동에 사무실 하나 얻어 놓고 아프리카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뼈를 묻을 것이냐, 확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냐, 장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04년 2월 4일 다시 하라레로 들어오면서 공항에서 서울 가는 리턴티켓을 찢어 버렸어요. 그때 내 나이 50 되던 해였지. 그래, 아프리카에서 승부를 보자,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고 굳은 결심을 한 거지. 그리고 아프리카 시장을 찬찬히 다시 보기 시작한 거야. 가만히 보니 가장 취약한 게 유통구조더라고. 아프리카엔 우리 동포들이 하는 가발공장들이 많습니다. 물건을 수월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가발 전문점을 내기로 결정을 한 거야. 그때부터 잡화 하던 거 다 걷어내고, 가발 전문점으로 다시 개장을 했지. 원래 잡화점을 두 곳에서 했는데, 다른 한국 사람이 하던 잡화점 한곳까지 인수를 해서 모두 세 곳에 가발 전문점을 열었어요. 잡화점에 있던 의류와 운동화 등은 몽땅 고아원과 양로원에 기부를 해버렸지. 그걸 처분했으면 30만 달러 정도는 건졌을 거야. 거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깨끗하게 기부를 해 버렸어. 이를테면 배수진을 친 거지."
가발사업 망하면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창기엔 방광이 터질 것 같아도 화장실엘 가질 못할 정도였다. 현장을 잠깐이라도 떠나면 직원들이 모두 도둑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남아공과 잠비아에 있는 가발공장까지 버스타고 가서 가발을 사오던 이야기 좀 해볼까. 바리바리 보따리를 들고 세관을 통관해야 했어요. 자기 짐을 들고 버스에서 내린 다음 세관을 통과한 뒤 다시 버스를 타야 하는 거지. 그 때 사들고 가는 가발에 대한 세금을 내야 하거든. 그게 너무 아까운 거야. 그래서 보따리를 세관 창구 옆에다 놔둔 채 멀찍이 나무 그늘 아래로 가서 지켜보고 있는 거야. 짐 주인이 안 나타나니까 한 동안 찾고 난리를 피우지. 그렇지만 버스는 떠나야 하고, 뒤에 통관할 사람들이 밀려들고 하니까 그냥 포기하더라고. 보따리 몇 개쯤이니까 그랬겠지. 그때서야 슬그머니 나타나서는 얼른 짐 들고 버스에 올라타고는 했어요. 그때 고생을 어찌 말로 다 하겠어."
7년 동안 한국에 나가지를 않고 일에 매달렸다. 그러니까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걱정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 년에 몇 번씩 들락거리던 아들이 여러 해 동안 안 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이었다.
"어머님이 우리 동생에게 그러셨다는 거야. 작은 형이 아프리카에서 멀고 살기 힘든가보다, 비행기표 좀 보내줘라, 아버지 살아계실 때 얼굴한번 봐야지. 내가 4남 2녀 중 차남이거든. 그 때부터 다시 한국에 나다니기를 시작했지. 사업 기반도 잡히기 시작했으니까. 돈을 벌만큼 벌었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뭔지 아시오. 나는 돈 버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 첫째는 일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단계를 건너뛰지 말고 하나하나 성실하게 한 계단씩 밟아가야 한다는 거야. 바늘구멍만한 구멍이 있어도 안 되는 거야. 이 세상에 눈 먼 돈은 없거든. 공짜로 돈을 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지. 특히 아프리카라는 곳은 눈 먼 돈 찾아 왔다가 생눈깔 다 뽑히는 곳이야. 둘째는 돈을 버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사람 밑천이야. 돈보다도 더 중요한 거지. 비즈니스도 사람이 사는 한 과정 아닌가. 사람은 사람에 기대서 크는 거야. 사람에 의해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늘 베풀고 살아야 해."
다음날 아침 일찍 김 사장의 가발생산 공장인 '사나그룹'을 찾았다. 'Angels Hair Production'이라는 대형 광고판으로 도배를 한 철문이 인상적이었다. 케냐의 동포기업가가 만든 가발생산업체인 엔젤스와 반반씩 투자해 만든 공장이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니 단층짜리 아담한 공장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공장 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한쪽에서는 남자직원들이 가발 원사를 일정한 길이로 자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여직원들이 미싱 작업과 약물처리, 실리콘 공정 등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 사장은 왜 자신의 가발가게들이 있는 짐바브웨가 아닌 이곳 잠비아에서 공장을 시작했을까.
"잠비아 인건비가 짐바브웨의 딱 절반 수준이에요. 짐바브웨가 미국 달러를 화폐로 쓰기 시작하면서 인건비가 주변국가에 비해 대폭 올랐어요. 가발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산업입니다. 짐바브웨에서는 인건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요. 이곳 공장은 아직은 시작단계에요. 바로 옆에 있는 정비공장을 인수해서 공장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장을 둘러본 뒤 공장건물 입구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앳된 한국 아가씨가 발딱 일어서면서 인사를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힘든 젊은 한국인 여성이었다.
"내 조카예요. 여동생 딸인데 한국에서 학습지 교사 하던 놈을 데려다 놨어요. 아프리카에서 한 번 인생승부 걸어보라고 데려왔지요. 지구상에서 남은 마지막 큰 시장이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지금 아프리카 전체 인구가 10억 정도인데 인구 성장률 7.5%입니다. 20년 후엔 25억 시장이 되는 거지요. 소득이 올라가면서 영양실조나 에이즈로 죽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어요. 게다가 석유나 광물 등 천연자원이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땅이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정치 불안이 여전히 큰 변수로 남아있지만 최근 들어 민주주의도 많이 정착이 돼 가고 있잖아요. 젊은이들이 도전해 볼만한 기회의 땅입니다. 다만 아프리카는 손에 흙 묻히지 않고, 얼굴에 검댕 묻히지 않고, 폼 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올 곳이 못됩니다. 고생할 각오를 해야지요."
<봉지쌀과 신발들을 팔고 있는 루사카 시내의 노점상들.>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 루사카 거리에서 젊은 청년이 옷을 팔고 있다.>
<예쁜 가발로 잔뜩 멋을 낸 루사카의 어린 소녀.>
점심을 먹기 위해 공장을 나섰다. 한 낮 하라레의 도심은 거대한 시장이었다. 달랑 청바지 한 장 셔츠 한 장씩을 손에 들고 파는 청년들, 쌀 한 줌씩을 비닐봉지에 담아 파는 아주머니, 과일 박스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아저씨, 헌 옷가지를 산더미처럼 진열해 놓고 파는 노점상들이 저마다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인도는 서로의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인파로 넘쳐났고. 자동차들로 꽉 들어찬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무섭게 팽창하는 아프리카의 시장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