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디지털인화기 처음 들여왔더니 문전성시"
짐바브웨 김동현 익스프레션즈 포토 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짐바브웨 수도인 하라레 거리엔 아직도 선거벽보들이 덕지덕지 나붙어 있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노익장일까, 노욕일까. 여든아홉 살 나이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7선을 만들어 냈다. 1980년 짐바브웨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점부터 33년 간 권좌를 독점해온 인물이다. 득표율이 61.9%라던가. 화사한 꽃그늘이 늙은 무가베의 얼굴을 무심하게 덮는다. 9월의 하라레는 막 울긋불긋 꽃단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꽃의 도시' 하라레 거리를 휘청휘청 걷는다. 알록달록 피어나는 꽃들과 파아란 하늘, 그리고 사람들의 까만 피부색까지, 하라레 거리는 강렬한 원색으로 그린 한 폭의 수채화였다.
발걸음이 닿은 곳은 하라레 도심 한 가운데인 파크스트리트 17번가. 'Expressions Photo'란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아프리카 진출 20여 년 경력의 김동현(55) 사장이 10년 째 사진업을 하고 있는 곳이다. 김 사장은 이곳 파크스트리트의 1호점과 인근 스펙 애비뉴의 2호점, 하라레 남쪽 200km지점의 지방도시 꿰꿰의 3호점 등 세 개 사업장을 통해 많을 땐 연간 10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짐바브웨에 처음으로 디지털 인화기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전국 사진관에 인화 약품 공급권을 지닌 사진업계의 선도주자다. 김 사장은 얼마 전 의류사업과 무역업을 겸하는 'Ko-A'를 새롭게 설립해 사업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김동현 익스프레션즈 포토 사장이 하라레 도심 스펙 애비뉴에 위치한 2호점 카운터에서 고객들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짐바브웨에 처음으로 디지털 인화기를 도입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6층 건물 2층에 자리한 매장은 500㎡ 정도 되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고객 대기실에는 6대의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고객들이 모니터 앞에 앉아 메모리 카드 혹은 USB등에 담아온 사진들 중 인화를 맡길 대상들을 선별하고 있었다. 접수창구엔 현지인 직원 세 명이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 놓여진 5대의 디지털 인화기에서 사진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현지인 직원들 틈에서 바삐 움직이던 김동현 사장과 부인 노은진 여사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작업장 맨 안쪽에 붙어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김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라도 1976~1977년 고교농구계를 주름잡던 배재고의 김동현 선수를 기억하시는가. 1977년 중앙일보 주최 쌍룡기 고교농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거머쥘 정도로 고교농구에서는 빼어난 스타였다. 어디 고교농구 뿐이랴. 고려대로 진학한 이후에도 이충희, 임정명, 황유하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더불어 49연승 대기록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 김동현 선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유전이라고 했던가. 지금 짐바브웨에서 사진업을 하고 있는 김동현 사장이 바로 한때는 대한민국 농구코트를 주름잡던 김동현 선수였다.
"쌍룡기 농구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뒤 기독교방송 '양희은의 7시 데이트'에 1시간 동안 출연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고려대 2학년 1학기 때 운동을 그만두었어요. 무릎부상도 있었고, 온전한 지성인으로 성장을 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도 있었고요."
해병대로 군 복무를 마친 뒤 졸업과 함께 대우에 입사를 하게 된다. 84년 9월의 일이었다.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 등지로 군수품을 수출하는 특수물자부에서 근무하다가 6년 만인 91년 2월 앙골라 근무를 자원했다.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김 사장 특유의 성격이 아프리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당시 앙골라와 콩고는 모두 내전상태였습니다. 간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자원을 했지요. 당시 대리 때 1인 지사장으로 나갔습니다. 1년에 하나씩 이웃나라로 지사를 늘려 나갔어요. 91년 2월 앙골라에 부임했는데, 92년 2월엔 짐바브웨, 93년 1월엔 콩고에 새로 지사를 냈습니다. 앙골라에서 2주 근무하고 난 뒤 짐바브웨와 콩고에서 각각 1주씩 돌아다니며 근무를 했어요. 그런 강행군을 10년이나 계속했답니다. 다루는 품목도 조선, 자동차, 전자, 중공업 등 전 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뤘어요."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제대로 된 식당도 하나 없고, 한두 곳 있는 슈퍼에는 물건이 없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라면으로 하루 세끼를 때워야 했다. 심지어 병원에 말라리아 약도 없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것은 내전이었다.
"91년 11월~12월쯤 이었을 거예요. 그때 제가 앙골라 수도 르완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군이 반군거점이었던 호텔 하나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었어요. 양쪽에서 3000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당시 대우자동차 간부들이 앙골라에 출장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르완다 비행장이 폐쇄된 상황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비행기는 나이지리아로 기수를 돌렸지요. 한국 본사에서 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왜 르완다 공항이 폐쇄됐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들어봐라, 하고는 콩 볶듯 나는 총소리를 수화기를 통해 들려준 적도 있습니다. 94년 여름에 콩고에서 피부병 얻었습니다. 허리 부분에 부스럼이 생겼어요. 당시 콩고에는 병원이 없었어요. 제대로 된 처방약이 있을 턱이 없지요. 한동안 이명래 고약을 붙이고 다녔습니다. 다행히 앙골라에는 포르투갈계 병원이 하나 있었어요. 수술을 했더니 꿈틀꿈틀 살아있는 벌레들이 대여섯 마리나 나오더라고요. 구더기처럼 생긴 건데 망고파리라는 벌레였어요. 제 살에다 알을 까고 있었던 겁니다. 정말 끔찍하게 고생을 했던 시절이지요."
그날 저녁식사는 김 사장 집에서 하기로 했다. 김 사장과 친하게 지내는 동포 몇 분을 초대한 자리라고 했다. 김 사장 부부가 살고 있는 동네는 실버타운인 단다로 빌리지였다. 어깨에 장총을 둘러맨 경비병이 문을 열어 주었다. 김 사장의 차가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쳐진 단지 안으로 들어선다. 김 사장의 집은 어림으로 40평정도 돼 보이는 아담한 단층주택이다. 큰 아들은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고, 작은 아들은 한국으로 사업을 한다고 들어간 이후 함께 살던 큰 집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거실 사진액자 속에는 김 사장 가족들의 행복한 순간들이 담겨져 있었다. 김 사장도 노 여사도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들이다. 사진은 왜 찍을까. 김 사장은 어떻게 사진업을 시작하게 됐을까. 앙골라와 콩고, 짐바브웨를 오가며 고생을 하던 후속담이 궁금했다. 짐바브웨 맥주인 잠베지를 한잔을 하면서 김 사장의 이야기를 청했다. 김 사장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대목에서는 옆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노 여사가 끼어들어 거들었다.
<김사장> "결국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만든 건 99년 터진 대우사태라고 할 수 있죠. 저에게도 철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2000년 여름 한국으로 들어갔어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지요. 마침 택배사업을 하던 대학후배 녀석이 나보고 같이 택배사업을 하자고 그러더군요. 2001년 초부터 냉장고와 침대, 가구 등 큰 화물을 전문으로 하는 택배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년 만에 10억 원을 홀라당 들어먹었습니다. 2003년 9월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오게 된 계기입니다. 처음에 시작한 일은 게스트하우스였어요. 짐바브웨로 골프전지훈련을 오는 우리나라 고등학생 20명을 첫 손님으로 받았습니다. 골프를 하는 우리 작은 아들 재만이 때문에 연결된 일이었어요. 재만이는 중학교 1학년 국가상비군 주니어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기대를 모으던 유망주였답니다. 요즘 미국프로골프(PGA)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배상문 프로도 그 학생들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게스트하우스에 두 달 동안 먹고 자면서 전지훈련을 하고 갔지요.
그런데 게스트하우스 사업이 신통치 않더라고요. 빠듯하게 먹고 사는 정도였지요. 2004년 6월쯤 이었을 겁니다. 우리 동포 중에 사진관을 하시던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사진관을 인수할 의향이 없느냐 그러는 거예요. 자기는 이제 나이도 많고 몸도 안 좋아서 한국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사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냐 그랬더니 우선 두 달 정도 배워봐라 그러더군요. 그렇게 사진업에 들어서게 된 겁니다. 두 달 동안 우리 부부가 그분 사진관에 출근을 하면서 현상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 때 우리 꼬마들이 아빠, 엄마를 많이 도와줬어요."
<하라레 도심의 한 공원에서 만난 직업 사진사들.>
<노여사> "십 수 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유명 관광지에 가면 직업 사진사들이 많았잖습니까. 사진 찍어주고 돈 받는 분들 말이에요. 지금 이곳에는 웬만한 공원이나 유적지에 가면 그런 직업 사진사들이 여럿 나와 있어요. 우리 신랑이랑 두 아들이 함께 공원과 유적지를 돌면서 직업 사진사들을 만나 맨투맨 홍보를 하고 다녔답니다."
<김사장>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상할 정도로 현지인들과 소통을 잘 했어요. 그 때 우리 큰애가 고3 때였지요. 작은 애는 중3때 휴학을 한 채 골프에 매달리고 있던 시절이었고요. 그 어린 것들이 아빠랑 하라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어요. 멀리 지방도시까지 출장을 가기도 했습니다. 공원에 서성거리고 있는 사진사들 불러 모아 음료수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했어요. 오늘은 내가 한턱 쏜다, 오늘 여기 있는 친구들 다 불러 모아라 해놓고는 이곳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옥수수 떡 '싸자'와 전통주인 옥수수술 '치부쿠'를 대접했습니다. 치부쿠는 우리나라 막걸리랑 흡사한데 이곳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랍니다. 일 년 열두 달을 한 장에 넣어 인쇄한 홍보용 달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나눠주기도 했고요."
<노여사> "우리 아들들이 낸 아이디어는 거리 홍보뿐이 아니었어요. 경품을 내건 이벤트까지 벌였답니다. 우수 고객에게 다리미와 전기포트, 가방, 사진앨범 등을 선물하는 경품 행사를 했어요. 한국의 커피숍이나 슈퍼마켓 등에서 실시하는 스탬프 마일리지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연중 행사로 실시하는 경품행사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짐바브웨 사진사들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고객 대접을 받은 거지요. 거짓말처럼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하루 5000~6000장 들어오던 주문이 어느 순간부터 1만~2만장으로 늘었습니다. 곱절 이상 손님이 늘어난 거지요. 그해 8월 말 점포를 인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 마음이 바뀐 거예요. 갑자기 장사가 잘 되니까 팔기 싫었던 거지요. 여러 가지 조건을 까다롭게 붙이기 시작했어요. 인수를 포기하고, 사진관 일에서도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진 줄 아십니까. 사진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저희 집까지 찾아와서 일을 맡기는 거예요. 사진 일을 그만 두었다고 해도 미스터 김만 찾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짧은 기간 동안 신뢰관계가 형성된 겁니다. 그래서 그런 친구들이 맡기는 필름이나 USB를 받아서는 현지인들이 하는 현상소에 가서 맡겨 주고는 했지요."
<컴퓨터를 통해 인화할 사진을 선별하고 있는 고객들.>
<김사장> "이번에도 재천이와 재만이가 나섰습니다. 아빠, 아무래도 사진관을 여는 게 좋겠어요, 이러더라고요. 단골 사진사 그룹을 확보했고, 입소문도 나기 시작했으니 한 번 해 볼만 하다는 거예요. 사진관을 열면서 제가 한 일이라고는 가게자리 알아보러 다닌 일이었습니다. 사진관을 여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일들은 모두 재천이와 재만이가 했어요. 인화기를 들여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 두 녀석이 밤늦게까지 인터넷 검색하면서 어떤 기종이 좋은지 알아보기도 하고, 회사별로 가격비교도 해보고 그러더군요."
<노여사> "특히 재만이가 사업가 기질을 타고 난 것 같아요. 짐바브웨에 디지털 기계를 처음 들여온 주인공이 바로 재만이입니다. 아빠 이젠 디지털로 가야합니다, 아날로그 시대는 끝났다고 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에서는 아날로그 인화기를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한국에서는 완전히 디지털로 전환된 시점이었고요. 2004년 9월 두 아들이 기계를 사러 한국으로 들어갔어요. 서울 구로동에 ESSCO라는 후지 인화기 생산업체를 찾아가서 기계를 샀습니다. 두 아들 녀석이 기계 조작법과 색상 밸런스 맞추는 법 등을 배워왔어요. 다른 집 아이들 같으면 아직도 응석이나 부릴 나이의 아이들이 어른도 하기 힘든 일들을 척척 해 낸 거지요."
<노여사> "당시 하라레에 사진관이 총 세집이었어요. 그런데 디지털 시스템을 도입한 곳은 우리 가게뿐이었어요. 우리 사진관에 디지털 인화기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죠.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더군요. 밀려드는 주문 물량을 해결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6개월 이상을 밤새도록 기계를 돌린 적도 있어요. 거의 매일 밤샘 작업을 한 거죠."
<김사장> "사업도 계속 확장을 했습니다. 2011년 9월에는 하라레 남쪽 200㎞지점에 있는 지방도시 꿰꿰에도 점포를 냈고, 2012년 9월엔 처음 저희에게 사진관을 해보라고 했던 동포사업가의 점포도 인수했습니다. 식구들도 많이 불어났어요. 본점인 1호점에 11명, 2호점에 7명, 꿰꿰 지점에 4명이 근무하고 있지요. 저희 집을 찾는 단골 사진사들이 300명 정도 됩니다. 경기가 좋았던 2010~2011년에는 400~500명까지 올라가기도 했어요. 모두 아들 잘 둔 덕이었어요. 최근엔 봉제의류 분야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어요. 먼저 옷가게 하나를 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봉제공장 자리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하나 둘 손님들이 들이 닥치기 시작했다. 갈비찜과 보쌈, 잡채, 냉면, 된장국 등 웬만한 잔칫상 못지않은 요리들이 상위에 올라온다. 이런 자리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빠질쏘냐. 권커니 잣거니 술잔도 기울인다. 하라레의 밤이 포근하게 깊어간다.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