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홍해는 스펙이나 학벌따윈 묻지도 않더군요"
한국을 '못 말리는 신분제 사회'라고 규정한다면 과장일까. 학벌과 집안, 재산, 성별 등에 따라 성골, 진골, 육두품 정도만 가려내고는 나머지는 거들떠도 보지도 않는 사회, 이른바 'SKY 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과 'In 서울' 대학 출신이 아니면 어디 이력서조차 내밀지 못하는 뿌리 깊은 학벌중심 사회…. 이런 사회를 신분제 사회라고 하는 거 아닌가.
고졸 학력뿐인 두 자매는 이런 답답한 한국 땅이 싫었다. 언니가 스물네 살, 동생이 스물한 살 나던 해 두 자매는 이집트 홍해변 후르가다로 건너왔다. 세계 다이빙 마니아들이 한번쯤 찾기를 꿈꾼다는 이곳에서 두 자매는 스킨 스쿠버 다이빙 강습업체를 차렸다. 홍해에서 한국인이 차린 첫 다이빙 에이전시인 '레드시다이브팀(Redsea Dive Team)'과 게스트하우스 '우리집'의 공동대표인 이윤선(31)과 윤진(28) 자매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림 같은 홍해에서 한류 물결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인어 자매'다.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자격을 얻은 언니는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고 있었고, 동생은 지방의 한 대학을 1년 마치고는 때려치워 버렸다. 어느 날 두 자매는 간판도 묻지 않고, 스펙도 따지지 않고, 명품 옷과 명품 백을 걸치지 않았어도 무시당하지 않는 글로벌 무대로 훌쩍 길을 떠났다. 세상 모험을 찾아 길을 떠난 어린 물고기 니모처럼. 영화 '니모를 찾아서'의 니모는 아네모네피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평생 한 발짝도 자기 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아네모네피시를 모험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자체가 자못 역설적이다.
<영화 니모의 모델로 유명한 아네모네 피시가 아네모네 산호초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후르가다는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 탄 뒤 남동쪽으로 1시간가량 날아가면 닿는 곳이다. 후르가다 공항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20여 분 달리다보면 레드시다이브팀의 본사 겸 게스트 하우스인 '우리집'에 도착한다. 24개의 베드를 갖춘 그림 같은 하얀 색 이층집이다. 정원엔 야자나무와 각종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고, 옆 마당엔 수영장도 들어서 있다. 후원의 문을 열고나서면 곧바로 해변으로 연결된다.
이제 갓 서른 살 안팎인 두 자매는 성수기인 7~8월에는 다이빙 강사를 30여명까지 고용할 정도로 탄탄한 '레드시다이브팀'을 운영하고 있다. 그것도 다이빙 마니아들이 죽기 전에 한번쯤 꼭 가봐야 하는 곳으로 꼽는 홍해 후르가다의 한 복판에서 독일과 영국 스위스 스웨덴 러시아 등 유럽의 쟁쟁한 업체들과 당당하게 경쟁하고 있다. 도대체 갓 스물을 막 넘긴 나이의 자매가 무슨 깡으로 머나먼 이집트에서 사업을 벌일 생각을 했을까.
<윤선> "저는 동대문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2003년이니까 당시 23살이었지요. 한 달 500만~600만원을 벌었습니다. 돈을 많이 버니까 많이 쓰게 되더라고요. 명품 핸드백과 구두가 아니면 아예 들고 다니지도 않는 '된장녀' 였답니다. 게다가 나이트클럽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죽순이'였어요. 그런 저의 인생항로를 확 바꿔 놓은 건 고교시절 친구 윤희였습니다. 그 친구는 틈만 나면 배낭 메고 한국의 섬을 돌아다니고, 입만 열면 봉사활동이나 환경보호 이야기를 하고는 했어요. 다이빙과의 인연을 맺어준 사람도 바로 그 친구입니다. 2004년 가을 추석 연휴 때 여행광인 윤희가 푸켓에 다녀오자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추석 연휴만 놀다 오자하고는 푸켓으로 떠났지요."
<윤진> "그해 봄에 언니랑 푸켓에 놀러 갔다가 저 혼자 눌러 앉아 6개월 동안 다이빙을 즐기고 있을 때였어요.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저보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추석 연휴기간 동안만 할머니 병간호 교대 좀 해달라는 거예요. 당시 팔순이 넘으신 우리 할머니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계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로 들어오고 언니는 푸켓으로 나오고 그랬지요. 며칠 만에 돌아온다던 언니는 아예 들어오지 않았지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난 언니가 귀국을 하지 않고 여기 이집트까지 온 겁니다."
<윤선> "방랑벽이 도졌던 거지요. 갑자기 다른 나라 다이빙 사이트에도 가고 싶더라고요. 윤희랑 둘이서 방콕의 여행사 사무실에 앉아 필리핀으로 갈까, 말레이시아로 갈까 고민을 했어요. 결국 친구랑 가위 바위 보를 해서 필리핀 보라카이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 누가 보라카이로 가자고 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여행사 직원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모습은 눈에 선합니다."
그 언니에 그 동생이다. 추석연휴 며칠 쉬겠다고 나간 언니는 태국과 필리핀을 거쳐 이집트까지 날아가 정착을 했고, 4박5일 비행기 표 끊어가지고 나간 동생은 6개월이나 푸켓에서 눌러 앉았으니…. 이런 경우를 '난형난제' 혹은 '피는 진하다'고 하는 걸까.
<윤선>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강사 자격증을 딴 뒤 이집트로 왔어요. 처음에 도착한 곳이 시나이 반도 남쪽의 휴양지 중 하나인 다합이었습니다. 다이버들의 인기 사이트라고 해서 왔는데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온통 돌밭이었어요. 보라카이 해변은 정말 예쁘거든요. 세계 10대 해변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니까요. 이집트 사람들 생김새도 부리부리한 게 처음엔 무섭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그 친구가 말한 대로 강사자리는 얻을 수 있었어요. 다합에서 여덟 달 동안 강사 생활을 하다가 이곳 후르가다로 옮겼습니다.
당시 만해도 후르가다는 한국인들에겐 아주 생소한 곳이었어요. 후르가다에 동양인이 운영하는 다이빙 센터라고는 이집트 남자랑 결혼한 일본 여자가 사장인 '사라 다이버스' 하나뿐이었습니다. 거기 문을 두드렸지요. 한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다이빙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 2006년 1월 우리 세 자매 중 맏이인 윤미 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2004년 추석연휴 때 집을 떠난 이후 열여섯 달 만에 귀국을 했지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함께 쏘다녔습니다. 함께 어울려 다니다가 한 번은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점쟁이가 다짜고짜 '당신은 사막에서 물 팔아먹고 살 팔자인데 여긴 왜왔어' 라고 하더군요. 참 신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또 '사업을 할 거면 동생 데리고 가라. 확 풀릴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을 데리고 갈 작전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윤진> "새벽 댓바람에 언니한테 전화가 걸려 왔어요. 정말 용한 점쟁이가 있으니까 너도 가봐라, 그러는 거예요. 하도 성화를 대는 바람에 갔더니 '네 앞으로 물이 많이 보인다'고 그러더군요. 그때 저는 복학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막상 학교에 다시 가려니까 머리에 다이빙 생각이 빙빙 돌기 시작하더라고요. 바로 그때 언니가 홍해로 함께 가자고 꼬신 겁니다. 언니의 성화에 밀려 결국 복학을 포기한 채 이집트로 건너오고 말았지요."
2006년 3월, 드디어 두 자매가 이집트에서 합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젊은 여자들이 말 설고 물 설은 이집트에서 일을 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집트는 한국보다 훨씬 여성차별이 심한 보수적인 나라였다. 게다가 두 자매는 일찍이 제대로 영어를 배워 본 적이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들은 좋은 사냥감이었다. 성희롱도 당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갑으로 사느냐, 을로 사느냐. 두 자매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많은 고통들이 프리랜서 강사인 을의 입장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그래, 앞으로는 을의 설움을 더 이상 겪지 않으리. 그래 우리도 갑이 되는 거야. 두 자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2006년 10월, 두 자매는 자신들이 직접 스쿠버 다이빙 에이전시를 열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이집트 홍해 후르가다에서 다이빙 강습업체인 레드시다이브팀을 운영하고 있는 이윤선(왼쪽), 윤진자매가 산호초로 유명한 샤브르 움 가마르에서 다이빙 채비를 하고 있다.>
<윤선> "보증금 200만원으로 방 네 칸짜리 사무실 겸 게스트 하우스를 열었어요. 다이빙 에이전시 '레드시다이브팀'과 게스트 하우스 '우리집'이 동시에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엔 냉장고나 TV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어요. 하루 나가서 돈 벌면 그날은 냉장고 하나 사고, 또 며칠 후 TV 사고 그랬어요. 직접 목재를 사다가 톱질하고, 사포질하고, 니스 칠하고 해서 필요한 가구를 만들었답니다. 힘들기는 했지만 참 꿈에 부풀었던 때였어요.
다이빙 에이전시 사업도 곡절이 많았지요. '레드시다이브팀'이란 간판을 내걸고는 에이전트 계약을 맺어줄 다이빙 센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무턱대고 찾아간 곳이 스위스 친구들이 운영하던 IMEI(International Middle East Instructors) 다이빙 센터였어요. 일본인 사장이 하던 사라 다이버스에 비하자면 스위스 친구들은 인간적으로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정말 다이빙을 사랑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계산이 바르지 못하더라고요. 잠깐 한눈을 팔면 보트 이용료와 선상에서 먹는 밥값을 터무니없이 받아 갔더라고요. 스위스 친구들도 우리를 호구로 여기는 구나하는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술 한 잔 먹고 한 바탕 싸우고는 IMEI 다이빙 센터와도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고난의 시절이었다. 며칠 동안 호텔에서 푹 쉬면서 머리를 식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윤선·윤진씨는 함께 오성급 호텔인 메리어트에 방을 하나 빌렸다. 그런데 갑자기 직업의식이 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호텔의 다이빙 센터는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두 자매는 메리어트 호텔의 다이빙 센터인 아쿠아리스 매니저를 찾아가서는 이것저것 물어본 뒤 우리랑 파트너십으로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돌아오는 건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윤진>: "거기서 그냥 포기하고 주저앉을 우리가 아니죠. 제가 아쿠아리스 다이빙 센터 헤드오피스에 다시 연락을 했어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죠. 우리 사업 구상을 구체적으로 들어보기나 해달라며 들이 댔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유치한 고객 규모와 날로 늘어가는 한국 다이버 시장 성장세 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자료였어요. 그 자료를 들고 아쿠아리스 다이빙 센터를 다시 찾아 갔습니다. 간곡하게 그들을 설득했지요. 그런데도 시큰둥하더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후르가다에서 동양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일이었거든요."
만일 복권에 맞은 확률이 3분의 1 혹은 4분의 1 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살까. 그럼에도 무슨 일을 추진하다가 세 번, 네 번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두드리면 열리는 것이 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두 번 두드려보고는 일찌감치 포기한다. 한 번만 더 두드렸어도 활짝 열릴 문이었거늘! 그러나 두 자매는 달랐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걸 두 자매는 믿었다.
<윤진>: "처음엔 우리가 유치한 다이버 고객들을 막무가내로 밀어 넣었어요. 그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보여 준 거지요. 들어오는 손님을 거부하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한 달 정도 계속 한국 다이버들을 유치하니까 비로소 정식으로 계약을 하자고 그러더군요. 당당하게 협상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야, 이젠 우리도 갑이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07년 봄쯤의 일이었습니다."
<윤선>: "메리어트 호텔 다이빙 센터인 아쿠아리스와 맺은 에이전트 계약은 이집트로 온 이후 가장 큰 성취였어요. 아쿠아리스 다이빙 센터는 기업형이라 사이트가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이빙 상품과 투어 사이트가 다양합니다. 새로운 즐거움과 의욕이 용솟음치기 시작하더군요."
<윤진>: "그 곳 아쿠아리스 숍의 매니저가 바로 지금 우리 형부인 마하무드입니다. 이래저래 인연이 많은 곳이에요. 언니랑 사귀기 전부터 마하무드 매니저와는 호흡이 척척 맞았어요. 처음으로 신뢰할 만한 이집트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객들도 늘고, 강사 숫자도 8명으로 늘렸어요. 2012년 2월 서울에서도 정식으로 다이빙 센터 업체로 등록을 했습니다. 다이빙 에이전시를 벗어난 다이빙 센터로서 더 큰 도약의 틀을 마련한 것이지요."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잘 나가던 두 자매의 사업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풍랑이 몰아닥쳤다. 바로 2011년 초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이집트 정정의 불안이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발발한 아랍 민주화의 바람이 인근국가들을 휩쓸면서 이집트까지 번진 것이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유혈충돌이 발생하고,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다. 자연히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관광객들을 기반으로 하는 윤선·윤진씨의 사업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윤진> "한창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즈음이었어요. 강사 여덟 명이 하루도 쉴 틈 없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민주화 운동이 터진 거지요. 큰 시련이었습니다. 연간 4억 원 안팎을 기록했던 매출이 1억까지 급전직하 하더군요. 한 달 300~400여 명이나 되던 손님들이 10~20여명으로 줄어들더군요. 강사들이 빈둥빈둥 노는 걸 보는 게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후르가다는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 사이트입니다. 사회가 안정되면 금방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지요. 비온 뒤에 마당이 다져지고,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잖아요. 위기에 대처하는 큰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미치도록 하면서 미친 듯 한 평생을 사는 것처럼 행복한 삶이 또 있을까. 그러다보면 성공과 돈, 명예쯤은 덤으로 따라 오는 게 아닐까. 그런 세속적인 덤들이 굳이 따라오지 않은들 또 어떠리. 좋아하는 일을 누리면서 늘 행복한 것을!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