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꿈 선물하기 위해 돈 벌어요"
탄자니아 청년사업가 김용경 AK트레이딩사장
혹시 일자리를 찾고 계십니까. 그런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글로벌 무대를 살펴보십시오. 지구촌 곳곳에서 '비즈니스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개척자들이 많습니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실래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더군요.
서울 대치동은 '엄친아'의 본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치맛바람이 드센 엄마들이 아주 요란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길러내는 곳이다. 엄마의, 엄마에 의한, 엄마를 위한 모범생들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곳이다. 엄친아들은 사회에 진출해서도 얌전하게 엄마의 주변을 맴돈다. 높다란 울타리가 둘러쳐진 안전한 공간에서, 세속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직장을 다니며, 고상하고 폼 나는 일을 한다.
김용경(26) AK Trading Co.(탄자니아 법인명 JAKI Traders Tanzania) 사장은 '엄친아 1번지'인 대치동에서 자랐다. 불면 날아갈 새라 쥐면 꺼질 새라 노심초사하는 부모 밑에서 곱고 착하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가 대학도 졸업하기 전인 스물두 살 때 거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벌써 5년 째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헌 옷과 헌 신발 등을 탄자니아와 케냐, 잠비아, 앙골라 등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하고 있다. 최근엔 탄자니아와 케냐 특산물인 커피 원두를 수입하는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김 사장은 돈만 버는 게 아니다.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탄자니아에 한 해 1~2개 씩 우물을 파주는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검은 대륙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돈을 버는 아름다운 총각 사업가다.
탄자니아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김 사장을 처음 만난 건 케냐 나이로비에서였다. 갓 학생티를 벗은 앳된 모습이다. 탄자니아 뿐 아니라 케냐와 앙골라, 잠비아 등지의 거래선들을 만나기 위해 출장이 잦은 김 사장이 마침 나이로비에 왔다가 탄자니아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경기도 용인에 사무실을 둔 그는 일 년 중 두달 정도는 아프리카에서 보낸다고 했다.
아침 일찍 다르에스살람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동행을 했다. 출국장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탑승 게이트 앞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그리고 또 비행기 옆 좌석에 나란히 앉아 기내에서 제공하는 포도주도 함께 나누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관절 그는 어떻게 갓 스물 두 살 나던 대학 4학년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험하다고 알려진 아프리카 대륙을 누비는 무역업을 시작했을까.
<탄자니아 도도마의 싸바싸바 시장을 찾은 김용경 AK 트레이딩 사장이 자신의 주요수출 품목 중 하나인 헌 신발의 시세와 판매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김사장은 연간 90억원 대의 헌옷과 헌신발을 아프리카 동부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저는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아프리카어를 전공했습니다. 그 덕에 2007년 12월부터 2008년 5월까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마친 뒤 아프리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더라고요.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생업 현장에 뛰어들어 그곳 사람들과 좀 더 가까이 부닥쳐 보고 싶었습니다. 귀국하지 않고 현지 한국인 무역업체에 인턴사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한국인 직원은 사장님을 포함해서 모두 4명뿐인 작은 중소기업이었어요. 중고 오토바이랑 중고의류, 자동차 배터리 등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일을 했지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거기서 현지인 직원과의 관계도 배웠고, 수입업무 전반에 관한 일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6개월간 근무를 한 뒤 그해 말 귀국을 해서 학생 신분으로 돌아왔지요."
인생이란 우연과 필연이 씨줄 날줄로 엮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보다. 4학년으로 복학을 해서 다시 얌전하게 학교를 다니던 중 그에게 탄자니아로부터 뜻밖의 연락이 날아들었다. 탄자니아의 한국 중소기업에서 인턴직원으로 일하던 시절 거래선 바이어였던 탄자니아 현지인 하나가 자기와 함께 동업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해 온 것이었다. 헌 옷과 헌 신발을 탄자니아로 수입 판매하는 무역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알렉스 베아투스라는 친구였어요. 거래처 직원이였던 저를 아주 좋게 본 것 같아요. 자기는 배운 게 없어서 해외에서 물건을 사서 들여오는 복잡한 수입통관 업무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내 손에 물건 만 넘겨주면 파는 데는 귀신이다, 한국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통관을 거치는 문제만 해결해 달라, 일단 물건을 탄자니아 땅으로 들여만 주면 나머지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 이런 제안을 해 온 거예요. 저도 당시엔 20대 초반의 풋내기였지만, 알렉스도 20대 후반의 젊은이였고,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미 아이가 둘씩이나 달린 가장이었고요."
알렉스는 참으로 놀라운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거리에서 봉지와 과일 한 줄, 헌 옷 한 두 벌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 몇 푼을 벌던 무조건 그 절반은 저축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이 한국 돈으로 따져서 4000만 원 정도 됐을 때 김 사장에게 동업 제안을 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렉스의 제안을 이야기 했더니 하나같이 반대를 하더군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네가 어떻게 험한 아프리카를 상대로 사업을 할 수 있느냐, 잠깐 겪은 탄자니아 사람을 믿을 수가 있느냐, 사기를 당할 거다 등등 걱정들을 늘어놓았어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탄자니아에서 현금 4000만 원은 정말 큰돈입니다. 맨주먹 이었던 사람이 이런 돈을 모았다면 지독할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13살 때부터 거리로 나서서 봉투를 팔아 한 푼 두 푼 성실하게 저축을 해 온 사람이었어요. 그런 친구가 남을 등쳐먹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알렉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한 다음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 역시 신중한 반응을 보이셨다. 너무 가볍게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일단 알렉스의 사람됨과 진정성을 확인해보자고 김 사장을 설득하셨다,
"아버지께서 알렉스를 한국으로 초청을 하셨어요. 아버지 돈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보냈지요. 한 달간 우리 집에서 한 식구로 함께 살았습니다. 식구들이랑 한국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알렉스가 관심을 보이는 중고의류 선별 공장도 돌아다녔지요. 아버지께서 알렉스의 반듯함과 성실함을 직접 눈으로 보시더니 마침내 이 친구라면 한번 해봐라 그러시더군요."
2009년 5월, 김 사장과 알렉스는 마침내 한국법인명 AK TRADING KOREA, 탄자니아 법인명 JAKI TRADERS TANZANIA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당시 김 사장은 대학교 4학년 1학기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 우선 한국의 중고 의류와 신발을 아프리카 시장에 내다 파는 무역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사업 지분은 50대 50으로 나누기로 했다. 알렉스가 먼저 3000만원을 보내왔다. 김 사장은 아버지로부터 3000만 원의 사업자금을 빌렸다. 헌 옷 6000만원어치를 사서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으로 가는 선편에 실었다. 40피트짜리 컨테이너 2대 분량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무대로 사업을 하는 22살짜리 청년 사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해 8개월 동안 컨테이너 9개를 탄자니아로 보냈습니다. 알렉스의 수완 덕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헌 옷과 헌 신발의 인기 때문인지 꾸준히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첫해 8개월 동안 컨테이너 9개를 선적했고, 이듬해인 2010년에는 20개로 물량을 늘렸습니다. 2011년부터는 사업선도 탄자니아 뿐 아니라 케냐, 잠비아, 앙골라 등 이웃나라로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탄자니아에 24개를 포함 네 나라에 모두 40개의 컨테이너를 선적했어요. 지난해에는 총 179개의 컨테이너 물량을 4개국에 풀었습니다. 컨테이너 한 개 당 출고가격이 4만 5000달러입니다. 대략 800만 달러(약 92억 원)를 수출한 것이죠."
출국장 게이트를 막 나서는 순간 게이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환영객 중에서 두 사람이 번쩍 손을 치켜들며 김 사장의 이름을 반갑게 부른다. 한 사람은 알렉스, 또 다른 한 사람은 김 사장의 대학동창으로 지금은 김 사장 회사의 총괄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찰스였다. 세 사람은 서로 반갑게 끌어안으며 인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 동안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다. 오랜만에 해후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김용경 사장이 공항으로 마중 나온 탄자니아 동업자 알렉스(왼쪽)와 총괄 매니저 찰스(오른쪽)를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다르에스살람 남쪽 탄자니아 서민들의 거주지인 창옴베 거리에 위치한 허름한 2층짜리 건물. 일군의 인부들이 커다란 마대자루에 든 물건들을 건물 밖 길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건물 앞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이를 받아 길 앞에 대 놓은 트럭이나 오토바이에 싣는다.
"한국에서 들여온 헌 신발들입니다. 헌 신발과 헌 옷은 인천과 부산, 대구, 경기도 일산 등지에 있는 재활용 업체들로부터 사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40피트짜리 컨테이너가 들어온 날이에요. 모두 7만 켤레 정도의 물량입니다."
<다르에스살람 서민거주 지역인 창옴베 거리에서 탄자니아 상인들이 컨테이너로 들여온 한국산 헌 신발들을 사서 나르고 있다.>
물건이 들어온 날을 맞춰 각 지역에서 몰려든 수십 명의 상인들이 서로 물건을 받아가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검은 피부의 탄자니아 상인들 사이에서 뽀얀 피부의 김 사장 모습은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김 사장은 평소 자주 만나는 사람들인 듯 반갑게 끌어안으면서 인사를 하기도 하고, 툭툭 어깨를 치면서 안부를 묻기도 했다.
참으로 놀라운 건 그의 언어 실력. 김 사장은 외모의 구별만 없다면 완전히 탄자니아 사람으로 착각하게 할 만큼 현지어인 스와힐리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거칠 수밖에 없는 시장 상인들을 대하면서도 전혀 쭈뼛거리거나 주눅 드는 일이 없이 너무나도 편하고 당당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고신발을 도매가로 받으러 온 탄자이나 상인들과의 한 바탕 전쟁을 치른 뒤 김 사장이 함께 가 볼 곳이 있다며 차에 오른다. 20여분 만에 도착한 곳은 다르에스살람 국립대학이었다. 널찍한 캠퍼스 위에 띄엄띄엄 건물들이 한갓지게 들어서 있다. 부드러운 구릉을 오른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4층짜리 건물이 캠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입구에 학생 기숙사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제가 6개월 동안 묵었던 곳입니다. 2007년에 3학년 2학기를 이곳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냈습니다."
<김용경 사장이 도도마 인근의 리빙 라이프 스쿨에서 자신의 기부금으로 마련한 우물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김사장은 물부족에 시달리는 탄자니아 사람들을 위해 매년 1~2개의 우물을 기부하고 있다.>
김 사장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특히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헐벗고 굶주리는 어려운 나라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었다. 자연스럽게 김 사장은 고교시절부터 선교사를 꿈꾸었다. 한국외국어대학 아프리카어학부에 지원을 한 것도 내심 선교사의 길을 가기 위한 준비과정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2007년 봄 3학년 때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주어졌다. 다르에스살람대학에서 3학년 2학기 과정을 이수할 학생들을 선발한다는 공고가 난 것이었다. 한국외국어대학과 다르에스살람대학간 파견학생제도가 처음 생겨난 것이었다.
"3명 뽑는데 지원자가 4명밖에 없었더군요. 3등으로 붙었습니다. 여기에 와서 보니 탄자니아 사람들 첫 인상이 너무 매력적인 거예요. 가난하지만 항상 웃고 행복해 보였어요.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행복해 질 것 같았습니다. 한 번 이곳 사람들에게 꽂히니까 그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지고, 그러자니 죽어라고 그 사람들 말을 배우기 위해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진짜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저 검은 피부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잖아요. 그들과 동화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동기부여가 되니까 갑자기 스와힐리어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더라고요."
기숙사 건물 바로 뒤편으로 작고 허름한 단층짜리 간이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었다. 김 사장이 그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빨리 한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빵과 음료수, 삶은 계란 등 학생들의 간식을 파는 구내매점이었다.
"저에게 여기 구내매점은 스와힐리어를 배우던 어학원 격 이었습니다. 매점 주인집 조카인 아모스란 친구 옆에서 물건 파는 일을 도와주면서 스와힐리어를 연마했지요. 얼마 안가서 학교 유명인사가 됐어요. 제가 학생들과 하도 수다를 떠니까 주변 친구들이 저에게 '너는 코리안이 아니라 음댕게레코 부족 출신'이라고 놀리더군요. 음댕게레코는 말이 많기로 유명한 부족이거든요. 3개월 쯤 지나니까 의사소통에 큰 불편함이 없을 만큼 말이 늘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신뢰하고, 아프리카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프리카 사람들 방식으로 일을 하라. 김 사장은 가장 훌륭한 회사 경영 방식은 언어를 배울 때처럼 그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들의 삶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 그들의 신뢰와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김 사장의 사업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가장 큰 비결은 바로 "너 스스로 아프리카 사람이 되라" 는 것이었다.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