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주가 만난 '비즈니스 한류의 개척자들'

"해적 무섭다고 소말리아 황금어장 포기할 수 있나요"

2013-12-31 10:06:51 게재

'인도양 터줏대감' 오만 김점배 아라수산 사장

트롤어선 5척으로 연 2700여만 달러 외화벌이



오만 남부 살랄라 항구는 불야성이었다.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줄줄이 입항해 있었다. 스물다섯 대의 거대한 크레인들이 밤을 잊은 채 하역 및 선적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적의 350t급 트롤망 어선인 백양37호에 대한 출항허가가 떨어진 건 새벽 1시쯤이었다. 백양37호가 인도양 밤바다의 검은 물살을 힘차게 가르기 시작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소말리아 해역으로 조업을 나가는 길이다. 목적지는 살랄라 항으로부터 350마일 떨어진 북위 10도 인근 소말리아 연안. 시속 10노트 정도인 트롤어선으로 가자면 35~36시간 예상되는 거리다.

뱃머리에 단단한 체구를 한 초로의 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인도양의 터줏대감' 김점배(56) 아라수산 사장이다. 김 사장은 현재 1000t급 3척, 350t급 2척 등 모두 5척의 트롤망 선박을 보유한 채 인도양의 소말리아 해역을 중심으로 조업을 하면서 연간 2700여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해적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모두들 떠나버린 소말리아 어장을 꿋꿋하게 지키면서 조업을 계속한 결실이다.



<김점배 아라수산 사장은 1000t급 3척, 350t급 2척 등 모두 5척의 트롤망 어선으로 인도양을 중심으로 조업을 하면서 연간 2700여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소말리아 해역으로 조업을 나가는 350t급 백양37호에 동승을 한 김 사장이 인도양 한복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33년째 오만 수도 무스카트를 거점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김 사장은 그동안 항해사에서 선장, 선주, 사장 등으로 호칭은 바뀌었지만 오만과 소말리아, 탄자니아, 인도, 파키스탄 등 인도양 해역은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문자 그대로 '인도양 터줏대감'인 것이다. 2004년 이후 오만 한인회장을 계속 맡고 있으며. 2009년 이후 14~16기까지 3기째 평통자문위원을 연임하면서 동포사회 발전에도 기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8년 '무역의 날'에 1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고, 2012년 10월엔 재외동포 권익신장을 통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김 사장이 무려 22년 만에 다시 배를 탔다. 선장 일을 그만 둔 1991년 말 이후 처음으로 원양어선에 오른 것이다. 지난 4월 회사이름을 '라사교역'에서 '아라수산'으로 개명을 하면서 분위기 일신을 위해 현장 격려 방문에 나선 길이었다. 김 사장과 함께 4박5일간의 '소말리아 해역 어드벤처'를 함께 했다. 수도인 무스카트를 출발해서 아라수산 선박들의 모항인 살랄라항까지 1000㎞는 비행기로 이동한 뒤 살랄라항에서 배를 타기로 한 것이다. 40여 일간의 일정으로 출어하는 백양37호를 타고 소말리아 해역까지 나갔다가, 그곳에서 40일 가까이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익투스9호에 옮겨 타고 살랄라 항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1000t급 익투스9호가 오만 남부의 거점항구인 살랄라항에 입항을 하자 예인선이 안내를 해주고 있다.>

김 사장과 함께 갑판에서 조타실로 오르는 계단을 오른다. 흔히 브리지라고 부르는 조타실은 선장과 항해사가 배를 조종하는 방이다. 브리지 앞에 키가 장대처럼 큰 흑인 두 명이 기관총 2정과 AK-47소총으로 무장한 채 보초를 서고 있었다. 브리지로 오르는 김 사장을 보고는 '하이, 보스' 하고 인사를 한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얀 이빨과 흰 눈동자만이 환하게 드러난다.

"소말리아 출신 사설 보안요원들입니다. 2004년부터 소말리아 보안요원 일곱 명을 고용해서 승선시키고 있어요. 우리 배 다섯 척에 승선하는 소말리아 보안요원을 모두 합치면 40여명 정도 되지요."

브리지는 아늑한 카페 분위기였다. 누군가 금방 커피라도 마셨는지 커피 향까지 진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전자 레이더와 어군탐지기, GPS PLOTER(선박의 내비게이션 장치) 등 방안 가득 들어차 있는 기기들도 카페를 꾸미는 멋진 장식품처럼 보인다. 황홀한 별밤, 인도양 한 가운데 떠 있는 멋진 선상 카페다. 키를 쥐고 있던 선장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작달막한 키에 단단한 몸집을 한 인물이었다. 선장 경력만 10년이라는 김영관씨다.

<김 사장> : "속도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요. 지금 뒷바람 받고 가는 거 아닌가. 아까는 9.8노트(시속18.52㎞)까지 나오던데."

<선장> : "지금 해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해류를 거슬러서 가고 있기 때문에 속도가 나질 않고 있습니다."

<김 사장> : "레이더는 둘 다 작동 잘 되고 있나. 출항하면서 청해부대에는 연락을 취했는가."

<선장> : "청해부대 최영함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출항하면서 연락도 취했고요."

김 사장은 전남 장흥군 대덕읍 산외동에서 4남 2녀 중 위에 형님을 하나 둔 둘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대덕초등학교와 대덕중학을 졸업한 뒤 5년제인 여수수산전문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1978년 2월 어렵사리 여수수전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졸업 후 북태평양 캄차카 반도에서 조업을 하는 동원산업과 인도양에서 참치 잡이를 하는 천양수산 등에서 3년 동안 배를 탔다. 산업체 특례로 병역근무를 겸한 일이었다.

"1981년 말 쯤 오만 무스카트에 기지를 둔 한국해외수산의 배를 타게 됐습니다. 처음 무스카트에 왔는데 한 나라의 수도라는 곳이 도로포장도 안 돼 있더라고요. 서부영화서 모래먼지 확 날리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당시 한 회당 계약기간은 무조건 30개월이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한 어기(漁期)만 하고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배위에서 30개월씩 생활하다보면 지치거든요. 그런데 저는 두 어기, 즉 60개월을 내리 계약을 했습니다. 60개월 한국에 안 들어가고 성실하게 일을 하니까 회사와 주변에서 인정을 해주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 사회에서 성실은 정기적금 같은 것이다. 때론 지루하고 더딘 것 같지만 가장 정확하게 그 결실을 되돌려 주는 게 바로 성실이다. 여러 해 동안 성실하게 배를 탄 김 사장에게 세상은 두 가지 선물을 한꺼번에 안겨 주었다. 1986년 10월 초등학교 동창생인 첫사랑 임순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선장 진급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 한 달만인 11월 1000t급 트롤어선인 금봉 202호 선장으로 나갔어요. 당시 우리 회사의 다른 선장들은 대부분 4년제인 부산수산대학 출신들이었습니다. 저만 전문대 출신이었어요. 항해사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선장이 된 뒤에는 더욱 4년제 대학 출신들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들기 시작했어요. 가방끈이 짧으니까 고기도 못잡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었어요. 전문대 출신들 도매금으로 욕 안 먹이기 위해 참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웃나라 예멘과 소말리아는 물론 인도양의 갈라파고스라고 하는 소코트라섬, 멀리 케냐와 탄자니아 어장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양 구석구석을 탐험하던 시절이었지요."

흔히 세상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천시(天時)와 지시(地時), 인시(人時)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늘이 내리는 때와 그에 걸 맞는 장소, 그걸 행하는 적절한 사람 등 3박자가 맞아야 일이 풀린다는 것이다. 하늘은 기회를 내리고 그걸 잡는 건 사람들의 몫이다. 달리 말하면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고, 그 성사여부를 결정하는 건 하늘이다. 하늘이 무스카트에서 김 사장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늘이 내리는 기회는 때론 위기의 모습으로 내려온다.

"금봉801호 어기를 마치고 났더니 한국해외수산에서 무스카트 기지 과장 자리를 제안하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지상근무를 하면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잖아요.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1991년 말부터 무스카트 기지의 과장으로 근무 시작했어요. 이듬해엔 가족들을 무스카트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런데 지상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더라고요. 1993년부터는 아예 조업조차 중단한 채 회사 매각절차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갑자기 저의 어깨에 모든 짐이 걸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저의 상관이었던 기지장은 회사 매각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며 한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동분서주했지요. 살리고 싶었어요. 다시 돌리고 싶었습니다. 죽어있는 배의 엔진을 다시 살리면 선원들의 일이 다시 생기고, 거래 업체들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돈 받을 가능성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걸 돌릴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돌아보니 어느새 제가 네트워크의 한 가운데 깊숙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하늘은 늘 적절한 시점에서 인간사에 개입을 한다. 김 사장이 이곳저곳 불을 끄느라 동분서주 한 지 6개월쯤 지난 무렵 하늘은 '솟아날 구멍'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리 배를 사겠다는 회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우선 4개 회사에 한 두 척씩 팔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사 배를 산 그 회사들은 여전히 인도양 해역에서 조업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기지장 역할을 부탁하더라고요. 비록 한국해외수산이 망하기는 했지만 20년 이상 무스카트를 기지로 사업을 한 노하우가 축적돼 있는 회사였습니다. 게다가 저 개인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제가 여러 회사의 기지장 대행 업무를 하기 시작했어요. 선주들이 공동으로 사무실 운영비와 저의 급료를 얼마씩 부담하는 형식이었지요."

모든 게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멈춰 서 있던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바다로 조업을 나갔고, 선원들은 일을 시작했으며, 그러다보니 납품 업체들에게 걸려 있는 빚도 하나씩 정리가 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선주들은 힘들이지 않고 인도양 해역으로 진출하는 문을 열게 된 것이었다. 이른바 상생의 비즈니스가 시작된 것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때마침 풍어가 계속됐어요. 1994~1997년 세 해 동안 참돔과 갑오징어가 엄청 잡혔습니다. 모든 회사들이 재미를 봤어요. 침체 상태에 있던 포클랜드 어장의 배들까지 오만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척 두 척 받다보니 어느새 열 척이 넘어설 정도로 규모가 커져 버렸지요. 그렇지만 풍년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요. 배 두 척을 저에게 맡겼던 회사 한 곳이 부도를 냈어요. 한국에서 벌이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연쇄적으로 부도를 낸 거였어요. 당시 배 한 척당 가격이 6억~7억 원 정도였어요. 그동안 제가 모은 재산을 털어보니 2억 정도는 되더라고요. 그걸로 선가를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 부채로 떠안으면 되겠더라고요. 2000년 4월 그 배 두 척을 제가 인수했습니다. 그래서 라사교역이라는 회사가 시작된 겁니다."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절벽 해안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북위 11도 54분, 소말리아 최북단 알루라 연안이었다. 배 한 척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와 도킹을 하기로 약속돼 있는 김 사장의 1000t급 트롤망 원양어선 "익투스9호였다. 두 배가 익숙한 솜씨로 옆구리를 맞댄다. 40시간 가까이 정 들었던 백양37호 선원들과 허둥허둥 급하게 인사를 치르고는 "익투스9호로 풀쩍 몸을 옮긴다. 백양37호는 이제부터 한 달 간 소말리아 해역에 머물면서 조업을 하게 될 것이었다.

익투스9호는 백양37호보다 몸집이 갑절 이상 큰 배였다. 갑판 위에 솟아 있는 마스트도 두 개나 우람하게 솟아 있었다. 1998년부터 선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남해 수산고 출신의 서중귀 선장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지난 한 달 동안 이곳에서 조업을 한 "익투스9호는 이제 살랄라항으로 귀환을 준비하고 있는 배였다. 갑자기 갑판이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서 선장이 마이크를 통해 지시사항을 하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투망작업을 하려는 것이었다.

갑판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던 어망이 순식간에 푸른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어서 배의 고물에 붙어 있던 초대형 자동차 문짝처럼 생긴 물건이 바다 속으로 내려진다. 어망의 입구를 넓게 벌려주는 역할을 하는 오타보드(Otter Board)였다. 그 다음은 일정한 시간 동안 그물을 끌고 다니는 예망(曳網)작업이 진행된다. 조타실에 있는 어군 탐지기 모니터에 울긋불긋한 색깔로 물고기의 이동이 표시되고 있었다. 2시간 쯤 지났을까. 또 다시 갑판이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양망(揚網)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 투망으로 끌어 올린 그물은 3분의 1정도 차 있었다. 평균의 배 이상 되는 5t 정도의 물고기가 올라온 것이었다. 공중으로 치켜 올려진 어망의 입이 열리자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들이 갑판 아래 처리실로 콸콸콸 쏟아져 내려간다. 능성어와 레드 스냅퍼, 삼치, 적돔, 악질상어, 갑오징어…. 용궁에 있는 물고기란 물고기는 다 잡혀 올라온 것처럼 큼지막한 물고기들이 작업대 위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김 사장이 익투스9호에서 잡은 커다란 레드 스내퍼(붉돔) 한 마리를 들고 흐뭇해하고 있다.>

동녘 하늘이 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인도양에 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태양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떠오르는데도, 어찌 매번 일출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까.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날에 대한 꿈을 꾸기 때문일 것이다. 김 사장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제 삶은 소말리아 어장과 함께 해온 것입니다. 앞으로도 소말리아 어장과 함께 할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 어장 중에서 트롤 어업을 할 수 있는 곳은 소말리아 어장뿐 이에요. 이걸 잘 유지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올해는 심기일전하기 위해 회사 이름도 아라수산으로 바꾸었어요. 올해 매출 목표인 3000만 달러를 반드시 달성할 겁니다. 앞으로는 사업 다각화에도 신경을 쓰려고 합니다. 트롤망 어업은 사양 산업이에요. 바닥을 끌고 조업하는 방식에 대해 환경보호 단체들의 압력이 거셉니다. 앞으로는 트롤망 어선 비중을 줄이고 참치 잡이 조업 쪽으로 새롭게 사업을 늘려가려고 합니다. 소말리아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돼 투자여건 조성되면 그곳에 통조림 공장을 세우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어요."

멀리 살랄라항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 사장과 백양37호, 익투스9호 선원들과 함께 한 '인도양 어드벤처'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13년 만에 회사이름을 아라수산으로 바꾼 뒤 22년 만에 다시 배를 타고 인도양 조업 현장을 둘러본 김 사장은 머릿속에 어떤 구상들을 새롭게 채웠을까. 앞으로 김 사장의 인생 항로엔 어떤 모험과 성취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인도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계시키는 그의 통 큰 사업 구상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 모름지기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 끼룩끼룩 살랄라 항구의 갈매기가 우리의 귀항을 반기고 있었다.

박상주 언론인·오지여행가 sangjo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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