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권의 정치적 도구였다

2025-03-27 14:58:00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6)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이에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과 과도기적 매너리즘 미술을 살펴보았다.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미술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된 문예부흥 운동의 종식과 함께 종언을 고했으며, 17~18세기는 범유럽적으로 바로크, 로코코미술이 약 200년간 유행하였다. 예술 사학자 Arnold Hauser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예술은 사회사의 일부’라는 거시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렇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이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듯이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에 따라 17~18세기의 미술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변형되고 발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17세기에 유행했던 바로크미술을 살펴본다.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은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반종교개혁의 상징으로 나타난 바로크 초기 미술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바로크 미술은 17세기 유럽미술의 지형변화, 미술의 중심지 이동, 미술 양식의 다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지역별로 각국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 이탈리아,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전편 게재)이 무너진 교권과 신앙 강화의 홍보 수단이었다면,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기에 결이 다르다.

프랑스는 루이 13세 시기(1610~1643)에 절대왕정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바로크 미술은 루이 14세 시기(1643~1715)에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꽃을 피웠다. 루이 14세는 5세 때 국왕이 되어 섭정 기간 포함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하면서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전제군주제와 귀족에 대한 통제와 권력을 견제하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였으며, 국가 차원의 예술정책을 주도해 나가기 위해 프랑스 왕립 회화, 조각, 건축, 음악아카데미 등을 연차적으로 설립하고 문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는 파리가 유럽미술의 중심지가 되고, 프랑스가 문화 예술의 중심국가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권의 상징

그렇다면 프랑스 바로크 미술의 배경과 특성은 어떠한가? 사실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연극으로 말하면 기획자이며 연출가였던 루이 14세와 불세출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의 합작품이다. 절대왕정의 바로크 미술도 무대의 설치미술이나 장식미술처럼 시각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만일 루이 14세가 없었다면 바로크 미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그는 프랑스 절대권력의 중심이었으며,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권의 상징’이었다. 이 점에서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이탈리아,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은 다르다. 즉,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구교수호를 위한 가톨릭교회 중심의 미술이었다면 프랑스는 구교국가지만 절대왕권 수호를 위한 ‘절대왕정 중심의 미술’이었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가 대내외적으로 처한 종교적, 정치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말 앙리 4세는 개신교(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했다. 그러나 루이 13세에 이어 14세는 신성로마제국 내 신·구교세력간 30년 전쟁(1618~1648)에서는 개신교 세력을 지원하면서, 국내에서는 개신교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종교통합의 도구로 삼아 절대왕정을 확립했다. 시대의 흐름은 부르봉 왕조 편이었다. 30년 전쟁을 종결한 ‘베스트팔렌조약(1648)’은 종교에 대한 국가 우위의 주권국가 체제를 확립했으며, 유럽의 최강국으로 부상한 프랑스는 국익 우선의 국가주의를 지향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웅장한 질서, 절제된 화려, 균형적 구조 등 고전주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이는 프랑스 바로크 미술의 특성이며, 추후 ‘고전주의적 바로크’, 또는 ‘바로크풍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궁정건축과 궁정예술이 중심

필자는 지난해 6월 11일부터 17일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시작으로 오랑주리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베르사유 궁전, 퐁텐블로 궁전, 프티 팔레, 생트샤펠 등을, 별도기간에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뮌헨의 알테피나코텍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프랑스 바로크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궁정건축과 회화가 중심이었다.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왕정의 상징 그 자체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기하학적, 대칭적으로 질서 정연한 정원, 웅장하고 우아한 장식물, 화려한 조각과 분수 등은 단순한 왕궁이라기보다는 도시 왕국처럼 보는 이를 압도하였다.

회화는 루브르 박물관의 전신인 루브르 궁전과 베르사유 궁전의 캔버스화, 벽화, 천장화였다. 이는 루이 14세의 후원으로 1648년에 설립된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궁정화가를 양성한 결과다.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아카데미 초기에는 이성적·고전주의 스타일의 푸생을, 후기에는 감각적·바로크 스타일의 루벤스를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회화는 역사화-초상화-풍경화-정물화 순으로 많이 보였는데 이는 궁정 미술의 위계였다. 르네상스미술은 메디치 가문이, 바로크 미술은 루이 14세가 주도해서 꽃을 피웠지만, 전자는 지역, 후자는 국가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대목에서 국가 주도의 미술 아카데미가 프랑스 대혁명 후 해체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는 호기심에서 그 후신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미술학교)를 방문하였으나, 내부 수리 중이라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왕정 및 절대왕권의 상징

프랑스 바로크 건축의 정수는 ‘베르사유 궁전’이다. 원래 왕실 사냥터였던 베르사유 궁전 건설은 어린 시절 프롱드의 난(부르봉 왕조에 반항한 귀족 세력의 반란)을 겪었던 루이 14세의 트라우마가 작용하였지만, 귀족들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축구장 1500배 크기로 일명 ‘루이 14세 양식’으로 불리는 궁전은 궁정화가 르브룅, 건축가 망사르, 정원디자이너 르노트르의 합작품이다. 하지만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루이 14세의 정치적 계산이 철저히 반영되었다.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말은 이를 대변한다. 그는 군주의 권력은 신성불가침이라는 왕권신수설의 화신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의 왕,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이라는 구호 아래 관료제, 상비군, 종교통합을 갖춘 강력한 절대왕정 체제를 확립하였다.

거울의 방(사진 1)
거울의 방(사진 1)
루이 14세의 초상화(그림 2)
루이 14세의 초상화(그림 2)

대연회, 궁정 축제, 사신의 접견 장소인 ‘거울의 방(사진 1)’은 사치의 극치이며,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그림 2)’는 절대왕권의 상징이었다. 궁정화가 이야생트 리고의 걸작으로 루이 14세가 입은 대관식 예복, 망토, 왕검, 지팡이는 절대권력의 상징이며, 스타킹과 붉은색의 하이힐은 그의 광적인 취미가 발레임을 말해준다. 그는 ‘태양왕’ 공연의 주인공 등 무려 80여 편의 발레공연에 출연하였으며, 짙은 화장에 키 높이 하이힐을 신고, 자신은 물론 궁전 곳곳에 향수를 뿌리며, 심지어 대변보는 행위도 귀족들이 참여하는 공식행사로 만들 정도로 기행을 일삼은 절대군주였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건축, 조각, 정원, 회화가 어우러진 총체 예술의 전범으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 오스트리아의 쇤 부른 궁전, 프로이센의 포츠담 상수시궁전 등 절대왕정의 모델이 되었다.

푸생, 고전주의적 바로크 양식의 롤 모델

프랑스 바로크 회화의 거장은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샤를 르브룅, 시몽 부에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초기 롤 모델이었던 푸생은 특별하다.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출신으로 로마에서 활동하다 고국으로 돌아온 화가다. 로마에서는 라파엘로, 카라치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628년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화로 유명해진 후, 1639년 루이 13세의 초빙으로 궁정 수석 화가로 활동하였다.

아르카디아의 목자들’(그림 3)
아르카디아의 목자들(그림 3)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르카디아의 목자들’(그림 3)은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이상향인 아르카디아(Arcadia)를 배경으로 한 목가적인 장면이지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라는 죽음의 필연성과 인생의 무상함이라는 철학적 주제가 담겨 있다. 2명의 목자는 “나 또한 아르카디아에 있다”라고 쓰여 있는 무덤의 비문을 바라보고, 1명의 목자는 죽음의 화신인 여인에게 비문의 의미를 물어보는 듯한 모습은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던져준다. 푸생의 안정적이며 균형적인 삼각형 구도, 부드럽고 조화로운 색채, 차분하면서도 철학적 상징성을 담은 이성적·고전주의적 화풍은 ‘고전주의적 바로크 미술’의 전범이 되었다.

루벤스, 감각적 바로크 양식의 롤 모델

다음은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후기 롤 모델이 되었던 루벤스다. 루벤스는 국제적인 거장이기에 미술 아카데미가 후기 바로크 미술의 교육적 모델로 삼았다. 그는 플랑드르(벨기에) 출신으로 안트베르펜(안트워프)에는 루벤스 하우스 겸 박물관이 있을 정도로 잘나가는 길드의 공인 화가, 플랑드르,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활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잉글랜드 간 평화협상에 참여하는 등 외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3세 초청으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의 연작(21점)’을 그리면서 미술 아카데미 설립자 겸 초대 교장이었던 샤를 르브룅 등 프랑스 궁정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그림 4)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그림 4)

그의 대표작은 뮌헨의 알 테 피나 코텍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그림 4)’다. 그리스신화 속 사건을 배경으로 레우키포스 왕의 두 딸을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형제(별자리 쌍둥이 좌를 상징)가 납치하는 장면을 그린 바로크 미술의 정수다. 쌍둥이 형제의 근육질 몸매, 풍만하고 관능적인 여체와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 남녀 인물들의 상반된 감정과 긴장감, 붉은 천을 이용한 강한 색채 대비 등은 작품의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고대사회의 강제적인 결혼관습을 상징하는 신화 속 주제를 감각적인 바로크 화풍으로 재해석한 명작이다.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정, 절대군주를 위한 ‘맞춤형’ 예술

이렇게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루이 14세 시기 절대왕정의 상징이며, 절대왕권의 정치적 도구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었으며, 바로크 회화는 베르사유 궁전의 시각적 상징이었다. 그렇다. 프랑스의 바로크 미술은 절대왕정, 절대권력, 절대군주를 위한 ‘맞춤형 예술’이었다. 이 점에서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는 국가 주도의 ‘아카데믹 미술 시대’와 본격적인 ‘궁정화가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파리는 유럽미술의 중심지, 프랑스는 유럽의 문화 예술 중심국가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고전주의적 바로크’, 또는 ‘바로크풍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과 차별화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태양도 권력도 정점에 달하면 기우는 법이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과도한 전쟁 참여와 베르사유 궁전의 지나친 사치는 절대 권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루이 16세 시기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이제 프랑스 바로크 미술은 점차 귀족 중심의 로코코미술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고, 동시대 북유럽의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적 바로크 미술이 황금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