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디지털 신원시대, 국경도 넘는다

2025-04-15 13:00:03 게재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등 모바일 신분증을 스마트폰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요즘 디지털 지갑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디지털 지갑을 단순히 물리적인 신분증이나 자격증을 스마트폰에 담는 수준으로 생각했다면 인식을 바꿔야 한다. 유럽에서는 디지털 지갑이 국경을 초월해 공공 및 민간 서비스를 아우르며, 유럽연합(EU)이 추진하는 디지털 싱글마켓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 바로 EU의 디지털 신원 지갑(EUDI Wallet)과 전자 신원 인증법(eIDAS 2.0)이다.

디지털 신원 지갑에는 운전면허증 증명서 의료정보 등 개인의 다양한 신원 증명뿐만 아니라 자격 및 속성 정보를 담을 수 있다. 하나의 디지털 지갑으로 EU 시민들은 EU 전역에서 행정 금융 의료 교육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인증받고 사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 신원, 디지털 경제의 핵심 기반이자 국가경쟁력의 전략 자산

디지털 신원 인증 체계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진행 중이다. eIDAS 2.0은 생체인식, 블록체인 등과 같은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개별 국가 중심의 인증 시스템을 EU 전체의 통합 인프라로 전환하고 있으며, 나아가 EU는 아프리카 중동 동유럽 등과 함께 디지털 공공 인프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즉 디지털 지갑은 EU가 전 세계 디지털 질서를 재편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2025년 1월 개최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이러한 이슈가 본격 논의됐다. 디지털 신원의 글로벌 상호운용성이 핵심 의제로 부상했으며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리눅스재단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오픈월렛 포럼’에서는 디지털 공공 인프라 특히 국경 간 호환 가능한 디지털 지갑 구축을 위한 표준화 강화를 촉구했다. 디지털 국경이 허물어지는 지금 디지털 신원은 더 이상 행정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디지털 경제의 핵심 기반이자 국가 경쟁력의 전략 자산이다.

지금까지 한국도 글로벌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분산신원증명(DID), 디지털 배지 등 다양한 기술을 통해 선진화된 디지털 인증 인프라를 확보해왔다. 모바일 신분증, 자격증 디지털 배지, 공공 마이데이터 등이 그 대표 사례다. 이러한 기술 기반과 실증 경험을 토대로 이제는 디지털 신원 체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디지털 경제 시장 변화에 대응할 정책적·제도적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미국 유럽연합 아세안 일본 호주 등 주요 디지털 규범 권역과의 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인증 연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협력체계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제 표준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World Wide Web Consortium(W3C), 국제표준화기구(ISO), ITU 등 국제 표준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해 한국의 디지털 신원 기술과 성공 사례를 글로벌 표준화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표준화와 함께 상호운용성 검증체계를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다. 디지털 지갑과 디지털 배지 등 국내 프레임워크가 EUDI Wallet, 블록체인기반 전자증명서(Verifiable Credential), 오픈 배지(Open Badge) 등과 실질적으로 호환되는지를 체계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전략적 준비 통해 한국형 디지털 인프라 세계 시장과 연결

이러한 전략적 준비는 한국형 디지털 인프라를 세계 시장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향후 국제 협력 프로젝트에서 신뢰받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나아가 디지털 신원 및 배지 분야에서 국제 표준과의 정합성을 확보하고 호환성 기반을 갖춘다면 새롭게 열리는 디지털 경제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직면할 수 있는 기술·정책적 진입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해당 시장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선점할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손승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