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품고 독립·민주화 도시로
1014명 수형기록카드 분석 … 생존 독립운동가 족적 남기고 유공자·후손에는 보금자리 제공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있던 독립운동가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분들이 여럿입니다. 헌데 전체 수감자 가운데 대다수는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이들이에요. 학생 여성 노인…."
박경목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3.1운동이 연령 계층을 뛰어넘어 전 국민이 참여했던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아픔이 깃든 서대문형무소를 역사관으로 승화시킨 서대문구가 3.1운동을 계기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 면면을 분석했다. 독립유공자 족적을 남기고 후손까지 보금자리를 챙기는 일상적 선양사업에 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또다른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10대부터 60대, 농민부터 행정기관 직원까지 = 일제강점기 전국 최대 규모로 운영된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식민지 근대감옥으로 문을 열었다. 경성감옥으로 출발해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는 동안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옥고를 치렀다. 박경목 관장은 "서울과 경기는 물론 강원 충청 황해 함경지역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포괄했다"며 "중범죄자로 분류되거나 고등법원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기결수·미결수가 모두 투옥됐다"고 설명했다.
해방 후 1945년에는 서울형무소, 1961년과 1967년에는 각각 서울교도소와 서울구치소로 바뀌었고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대거 수감됐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하면서 서대문구가 체험교육공간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했고 국내는 물론 미주 유럽 아시아 각지에서 연간 70만명이 찾는 국제적 명소가 됐다.
서대문형무소는 당초 500여평 면적에 500명을 수감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는데 3.1운동 직후 수감자는 수용인원 6배 가량인 3075명에 달한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25년간 수감된 인원은 최소 6만5000여명. 연간 2600명 이상이 투옥된 셈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보존돼있는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수형기록카드) 6264장 가운데 3.1운동 당시 수감자 1014명 기록을 좇아 '서대문형무소 3.1운동 수감자 현황과 특징'을 발간했다. 보안법 위반이나 소요, 출판법 위반으로 1919~1920년에 형을 언도받고 입소한 이들이다.
가로 15㎝, 세로 10㎝ 크기인 낱장 종이 앞면에는 사진과 간단한 인적사항이, 뒷면에는 기본 신상과 수형 관련 사항이 기록돼있다.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985명 가운데 가장 어린 이는 15세 7명. 학생 5명과 여관조합 급사, 무직까지 다양하다. 최고령은 황해도 수안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60대 차제남(1850년생)이다. 전체 수감자는 20대가 57.5%로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3.1운동 수감자는 10대 12.79%, 20대 39.29%, 30대 22.74%, 40대 15.13% 등 전 연령대에서 고르게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수감자 직업도 다양하다. 직업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777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424명(54.57%)이 농업인이고 학생 108명(13.9%) 종교인 51명(6.56%) 교사 46명(5.92%) 상인 40명(5.28%)이 뒤를 잇는다. 행정기관 직원인 면장 구장을 비롯해 순사보 우편배달원 공장근로자 마차꾼 등 다양한 직군 참여가 눈에 띈다. 계층과 계급을 초월한 전 민족적 운동이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박경목 관장은 "수감자들은 사상범으로 분류돼 보안법범으로 취급당했고 이들 가운데 99% 이상이 6개월 이상 많게는 15년형까지 받았다"며 "(일제는 3.1운동을) 단순 범죄사건이 아닌 식민지 체제 변혁운동으로 인식했다"고 설명했다.
◆형무소역사관, 통일로 나아가는 평화의 길목 =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기록 분석은 서대문구가 지난해 초부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해온 사업이다. 구는 민선 5기 이후 형무소역사관에 더해 6.10 민주항쟁을 촉발시켰던 이한열 열사 등 역사적 자산을 토대로 독립·민주화의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지난 2010년부터 시작한 독립·민주지사 족적 남기기(풋프린팅)가 대표적이다.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옥중에서 숨을 거둔 이육사 시인의 유해를 수습했던 이병희 독립지사,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시작으로 지난해 비밀결사 혈맹단을 결성해 옥고를 치른 승병일 지사 등까지 모두 45명 풋프린팅을 진행했다. 서대문구는 이를 활용해 현저동 독립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진입로에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를 주제로 한 추도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독립지사 30명 풋프린팅 조형물과 함께 독립운동 정신을 공유하는 동판으로 꾸밀 예정이다. 애국선열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의 정신을 현재·미래 세대와 공유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는다는 구상이다.
독립·민주 유공자와 후손들이 서대문구 주민이 되기도 했다. 구는 2017년 천연동에 5층짜리 집을 지어 유공자와 후손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나라사랑채'로 명명했다. 경남 고성군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군자금 모집을 했던 허재기 지사의 손녀 허성유(68)씨와 일제강점기 말 경북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강제 노역에 항거했던 강동석 지사의 외손자 이승민(31)씨 등 14세대가 입주해있다. 입주 당시에는 인근 주민들과 함께 축하 잔치를 열었다.
서대문구는 최근 홍은동에도 독립·민주 유공자와 후손 16세대가 청년·신혼부부와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나라사랑채 2호를 마련했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서대문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 6.10 민주항쟁 기폭제가 됐던 연세대학교가 있는 독립·민주의 현장"이라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예우는 국가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문 구청장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 역사도 품고 있다"며 "지금은 통일로 나아가는 평화의 길목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 [인터뷰│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 "유공자 후손 국가가 예우해야"
▶ 독립관 앞에서 만나는 3.1운동 1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