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직 제도화
‘투명인간’ 공무직, 승진·승급 교육훈련 제도 없어
EU 회원국 중 18개 나라 ‘공공종사자’로 제도화, 초기업 교섭도 … “공무직 전담조직 ‘공무직위원회’ 설치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추석 연휴에 ‘무도실무관’을 관람했다. 윤 대통령은 “MZ세대의 공공의식과 공익을 위한 헌신을 상기시키는 영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 김우빈과 김성균이 주연한 영화 ‘무도실무관’은 법무부 보호감찰관과 무도실무관의 활약상을 그렸다. 법무부 소속 공무직인 무도실무관은 주로 유단자들로 3교대 근무에 한달 기본급 260여만원에 불과하고 근무 중 다쳐도 본인이 알아서 치료해야 한다.
정부는 공무직의 업무를 ‘공무원이 반드시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 ‘공무원을 보조하는 사무’로 규정하는 등 공무직 노동자의 전문성 책임성 등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공무직 노동자들에 대한 제도적 불인정은 공무직 노동자의 직업적 존엄성을 훼손하고 공공서비스 향상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공무직 노동자와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 모두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공공운수노조는 2일 김주영·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 정혜경 진보당 의원, 한창민 사회민주당 의원과 함께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유럽에서 공무직 제도화의 길을 모색하다’ 토론회를 열었다. 우리나라는 공무직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제도적 규정이 없어 복리후생·임금·승진 등에서 일상적인 차별에 노출돼 있다. 공무직 처우개선과 함께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무직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 철 사회공공연구원의 선임연구위원은 발제에서 “한국의 정부기관 공무직들은 정부기관 전체 인원의 1/3 정도를 차지하면서 다양한 공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저임금과 차별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조직 내에서 정당한 지위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투명인간 취급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1949년 제정된 ‘국가공무원법’상 별정직 가운데 ‘단순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으로 규정된 ‘고용원’이 바로 현재 공무직이다. 고용원, 소사로 시작해 공무원이 아닌 지방자치단체 직원으로, 정원 외 상근인력으로 관리돼왔던 상용직과 상시·지속적 업무에 2년 이상 기간제로 근무하다가 2006년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이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이다. 2008년 금융위기, 2016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 등을 통해 공무직 규모와 역할은 늘었지만 처우가 개선되거나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김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공공기관(중앙공공기관 지방공기업 지방출자·출연기관 지방의료원)과 함께 정부기관(입법·사법·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교육기관)에는 2021년 현재 공무원 142만8000명 외에도 무기계약직 22만9000명, 기간제 20만1000명, 민간위탁을 포함한 간접고용 노동자 21만3000명 등 공무원이 아닌 노동자 64만3000명이 존재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가 올해 4월 정부기관 공무직 836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에 따르면 43.1%가 월 220만원 미만을 받고 있다. 91.3%가 스스로를 ‘공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라고 규정하지만 38.6%만이 소속기관에서 공무수행 노동자로 존중받고 있다고 답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공무직은 공무에서 반드시 필요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소속기관 내에서 교육훈련은 없고 승진·승급 등의 제도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공무직에 적용되는 국가 관리체계는 ‘공무직 등 근로자 인사관리규정 표준안’뿐이라 참고자료 수준”이라며 “기관이나 직종별로 인사·노무관리 기준이 달라 기관 간 공무직 노동조건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반면 유럽에서는 공공부문 내에서 공무원 외에 공무를 수행하는 비공무원 노동자를 ‘공공종사자’라고 공무원과 구별해 그 지위와 범주를 명확히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8개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18개 나라가 공무직을 공무원과 구분해 ‘공공종사자’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돼 있다. 공무직 제도화란 법제화를 포함해 공무직의 안정적인 지위를 마련하기 위해 이들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규정·가이드라인·업무분장 등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토론회에서 독일 통합서비스노조와 핀란드 공공복지부문노조는 온라인으로 유럽 공무직 제도화 사례를 발표했다.
독일과 핀란드 모두 정부기관 내 비공무원 노동자들의 임금 및 승진, 조직 내 지위 등이 일정한 수준에서 제도화돼 있으며 이는 초기업단위 단체교섭에 근거하고 있었다.
아르만 두틴 독일 통합서비스노조 국제정책 담당은 “독일 국가기관의 공무직 노동자들은 근속기간에 따라 급여가 올라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6단계의 승진 등급을 거치면 더 높은 급여를 받는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공공종사자들은 민간부문과 동일하게 파업권을 비롯한 노동3권이 있으며 단체협약상의 동일임금표가 적용되기 때문에 개별 기관별 공공종사자들의 임금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공무원들은 파업권이 없지만 공공종사자들과 단체교섭 논의에 함께 참여한다. 이와 달리 한국의 경우 공무원은 노조를 통해 공무원보수위원회에 참여해 임금결정에 관여하지만 공무직은 이런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공무원과 공무직간, 공무직 내에서도 단체교섭을 진행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 임금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독일에서는 임금인상으로 인해 추가재원이 필요한 경우 관련 정부의 추가예산으로 재원을 조달하도록 돼 있다.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예산제약을 임금인상 저지의 핑계거리로 삼지 않는다. 추가예산 편성은 온전히 사용자인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마리 케투리 핀란드 공공복지부문노조 부위원장도 “핀란드에서는 고용주로서의 정부가 중앙차원의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고용주로서의 자격과 협약과 관련해 각 기관을 지원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채준호 전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공무직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부터 시작해 합리적 임금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며 “공무직 직무별로 직종 분류체계를 마련해 임금과 근로조건 실태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공무직 제도화 과정에서 정부가 이행해야 할 과제로 △공무직위원회 상설화와 관계부처 협조 체계 구축 △각 중앙부처의 인사노무 역량 강화 지원 △공무직에 대한 관심 제고 △노동계와의 긴밀한 협의 등을 제시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사용자조직인 정부가 공공종사자와의 단체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해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면서 “공무직의 교섭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기획재정부, 국무조정실, 고용노동부 등의 정부기관들이 나서서 공무직위원회와 같은 공무직관리기구 설치 및 초기업 단위 단체교섭 제도화에 힘써줄 것”을 주문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