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유시장이 ‘공급 부족’에서 ‘공급 과잉’ 국면으로 전환됐지만 한국석유공사의 대외 인식은 여전히 ‘중동발 공급 불안’에 머물러 있다. 시장환경이 급변했음에도 기존 시각(관점)을 반복하거나 최고경영자 현장 행보 중심으로 홍보를 진행하면서 국제유가 흐름에 대한 분석과 대국민 소통은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석유공사, 시장 흐름 못읽어 = 석유공사는 6일 아랍에미리트(UAE) 푸자이라항에서 선적한 자체 생산 원유 97만배럴을 국내 정유사에 공급했다고 밝혔다. 앞서 캐나다산 원유 57만5000배럴을 국내에 도입한 사실도 공개했다. ‘중동발 공급 불안 속 원유 수급 안정성을 높였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해외 생산 원유를 국내에 안정적으로 반입한 것은 의미 있는 성과다. 다만 국제 원유시장의 핵심 이슈가 이미 공급 부족에서 공급 과잉으로 전환된 상황에서도 기존의 ‘공급 불안’ 프레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현재 시장 상황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작 공급위기로 온 나라가 불안에 떨었던 시기에는 이 같은 성과 발표나 상황 설명·전망 제시가 없었다.
손주석 석유공사 사장이 홈페이지 CEO 인사말에서 “위기대응시스템을 바탕으로 국제정세 불안과 공급망 충격 속에서도 국민이 안심할 수 있도록 에너지 안보를 견고히 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사장 일정 중심 홍보는 그만 = 2월 27일 중동전쟁 발발 이후 국제 원유시장의 최대 변수는 공급 차질이었다. 그러나 6월 중순 미국과 이란의 평화협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방되면서 시장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었다.
그동안 수출길이 막혀 있던 6000만배럴 이상의 중동산 원유가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졌고, 브렌트유 선물가격은 4월말 배럴당 120달러대에서 최근 70달러 초반까지 40% 이상 떨어졌다.
공급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수요가 전쟁 이전보다 하루 약 500만배럴 줄면서 늘어난 공급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공급 확대와 수요 둔화가 겹치면서 시장의 관심사는 더 이상 ‘원유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아니라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 중 누가 먼저 감산에 나설 것인가’로 넘어갔다는 게 업계 안팎의 공통된 진단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콩고산 제노 원유는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14달러 낮은 가격에도 구매자를 찾지 못했고,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실은 초대형 유조선은 인도까지 약 1만6000㎞를 항해하고도 2주 이상 구매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국제 선물시장에서도 공급 과잉 국면을 의미하는 콘탱고(Contango) 구조가 형성되는 등 시장은 이미 감산 여부를 새로운 변수로 주목하고 있다.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 등 주요 투자은행들도 잇따라 2027년 원유시장의 공급과잉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석유공사가 6일 내놓은 보도자료는 시장 변화를 반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뒷북 경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중동전쟁 이후 석유공사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그동안 어떤 역할을 해왔고, 현재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전쟁 초기에는 비축유 방출 준비 점검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 대응 등 위기 대응 자료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손주석 사장의 여수·거제 석유비축기지 방문, 알뜰주유소 현장 점검 등 최고경영자 일정 중심의 보도자료가 이어졌다.
중동전쟁 이후 석유공사가 펴낸 국제 원유시장 관련 리포트도 ‘미·이란 전쟁과 국제유가 충격’ 단 한 건에 그쳤다.
◆시장변화 읽고, 선제적으로 전략 제시해야 =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석유산업을 담당하는 공기업이라면 원유 반입 실적을 알리는 데 그치지 말고, 급변하는 국제 에너지시장을 신속하게 분석해 국민과 시장에 전달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급 부족과 공급 과잉이 빠르게 교차하는 시대인 만큼 시장변화를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비축 전략과 수급 전망을 선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석유공사에 요구되는 책무”라고 제언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