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비정상 한국경제’ 징표가 너무 많다

2024-07-17 13:00:02 게재

무역수지가 뒷걸음치고 증권시장도 기를 펴지 못하는 등 무기력했던 한국 경제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반도체 실적의 화려한 부활과 ‘반도체발 훈풍’이다. 부진에 빠져 있던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면서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2분기(4~6월) 영업수지가 10조4000억원 넘는 흑자를 냈다. 세계적인 인공지능(AI) 붐 등에 힘입어 주력제품인 D램 반도체 등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증권시장의 ‘대장기업’이기도 한 삼성전자의 주가가 ‘7분기만의 영업이익 10조원 돌파’ 호재 속에 큰 폭으로 오르면서 모처럼 증시 전체가 힘을 받았다. 코스피지수가 연중 최고점을 연일 넘어서며 2년6개월 만의 최고치로 올라섰다. 상장기업들의 전체 시가총액(코스피)은 역대 두 번째 높은 수준으로까지 불어났다.

증시만 활기를 띤 게 아니다. 맥을 못추던 경상수지가 올 5월 89억2250만달러(약 12조3175억원)의 흑자를 내며 2년8개월 만의 최대실적을 냈다. 5월 수출(589억5350만 달러)이 전년 대비 11.1% 늘어나며 8개월 연속 오름세를 나타낸 덕분이다. 수출의 대반전을 주도한 게 전년 대비 53%나 수출이 급증한 반도체다.

반도체 경기 착시에 가려진 부진의 늪

이런 지표들만 보면 국내 경제가 크게 살판이라도 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되살아난 반도체 외에 조선 자동차 등 일부 업종만 선전하고 있을 뿐 대부분 산업이 부진의 늪을 헤매고 있다. 한때 반도체 못지않은 신(新)성장동력으로 각광받았던 배터리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이 전기차 시장 침체 등으로 성장둔화에 빠져 있고, 유망분야로 꼽혔던 게임업체들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온 건설업계의 부진이 심각하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사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고전하고 있는지는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올 상반기 기업평가 보고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용등급 및 전망을 내린 기업이 74곳인 반면 올린 기업은 44곳에 그쳤다.

기업의 신용등급 하락은 사업 활동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어렵게 하고, 돈을 빌리더라도 차입 금리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적이 안 좋으니까 신용등급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사업여건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중은행들이 하반기 들어 발 빠르게 기업대출 조이기에 나섰다. 최근 3년 새 기업대출을 40조원 넘게 늘리며 ‘기업금융 경쟁’을 촉발했던 하나은행이 최근 전국 점포들에 “일정한 금리수준을 밑도는 기업대출은 내주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려 보냈다.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 다른 시중은행들도 기업금융의 무게중심을 ‘성장’에서 ‘수익성 관리’로 옮겨가고 있다.

지방기업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부산·대구·경남·광주·전북·제주 등 지방은행 6곳의 지난 1분기 연체 대출액(1조3771억원)이 관련 통계가 공개된 2008년 이후 최대치로 불어났다. 이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업하는 지방기업들의 자금사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규모가 영세한 개인사업자들은 더 험난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6개 지방은행들의 개인사업자 대출 평균 연체율(0.86%)이 금융위기 때인 2008년 4분기(0.84%)보다도 높아졌다. 전국 자영업자들의 3개월 이상 대출금 연체금액이 1년 새 53%(3월말 기준)나 급증하는 등 규모가 작은 사업체일수록 더 긴박한 위기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수두룩하다.

제2, 제3의 삼성전자가 나오게 하려면

이렇듯 우리 경제 곳곳에 피멍이 들고 있는데도 반도체경기의 회복만으로 경제 전반에 큰 탄력이라도 붙은 것처럼 비춰지는 현실이 무엇보다도 큰 문제다. 세계 10위권 선진국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국제 반도체시황 하나에 일희일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경제의 특정산업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준다. ‘삼성전자 착시’를 경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 지가 20년이 넘어가는데도 도무지 달라진 게 없다.

우리 경제가 제대로 활력을 띠게 하려면 반도체 이외 분야에서도 ‘제2, 제3의 삼성전자’가 나와야 하고, 규모가 작더라도 튼실한 강소기업들이 나래를 펼 수 있는 경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각 분야 기업들의 사업유연성을 높이고 산업별 진출과 퇴출이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는 작업이다. 정부와 여야정당들이 이 문제의 화급함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