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전쟁이 베트남 민족을 만들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찰스 틸리가 명쾌한 분석력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유럽의 1000년 정치사를 훑어본 뒤 단언한 국가기원론이다. 오늘날 절대 다수 나라들의 정치체계가 국가라는 유형으로 수렴하게 된 배경에는 지난 1000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전쟁이 있었다고 했다.
전쟁 속에서 나라들이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다른 국가들을 흉내내다 보니 오늘날 다른 유형의 정치체계는 사라지고 오로지 국가만이 남게 된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재정과 군대, 즉 세금을 거두고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가 다른 유형의 정치체계보다 월등하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민족 형성의 기존 사례와 다른 베트남
“전쟁이 민족을 만든다.” 베트남의 지난 1000년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 나라의 민족과 민족주의를 만든 것은 바로 전쟁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학자들은 19세기 이후 민족과 민족주의의 탄생을 흔히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반한 근대화 과정에서 찾는다. 식민지배를 받는 엘리트들이 느끼고 겪은 차별, 동일한 운명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식민지인들의 공통된 상상, 인쇄매체를 통한 인식의 확산 등이 민족을 만들어 내고 민족주의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구성주의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이다. 구성주의자들에 앞서 민족이란 고정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나 속성을 근원적으로 공유한 집단이라고 생각한 학자들이 득세했다. 이들에게 민족은 인류의 출현 시기로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엔 베트남 사례는 민족 형성에 관한 이 두가지 입장 중 어느 쪽과도 합치하지 않는다. ‘베트남민족’이라는 개념은 안 썼어도 “다른 집합체와 구분되는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근대 이전부터, 빠르면 10~11세기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 초 베트남이란 나라 이름을 처음 갖게 된 최초의 남북 통일왕국이었던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그리고 오늘날보다도 더 많고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혈연 언어 전통 문화 기억 등 어느 하나 제대로 공유한 것이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1000년 전에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베트남민족은 끊임없이 다른 종족 민족 성원들을 수용하고 통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강대국을 무력으로 몰아낸 유일한 나라
세계사에서 베트남만큼 외침과 외세의 정복과 지배에 시달린 나라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 나라들 중에서도 또 베트남만큼 한두나라가 아닌 여러 강대국들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나라는 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나아가 침략 점령 지배한 모든 강대국들을 전쟁에서 무력으로 몰아낸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하다. 베트남의 전쟁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연 압도적이다.
중국 왕조에 대한 베트남의 첫 승리는,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중국 지배를 끝낸 939년 응오 꾸옌의 바익 당(Bach Dang)강 전투다. 그는 조수간만 차를 이용한 뛰어난 책략으로 중국 남한(南漢) 군사를 몰살시킨 후 자신을 왕으로 칭하고 최초의 베트남 독립왕조를 세웠다.
그로부터 20년 뒤 중국대륙의 새 주인이 된 송(宋)은 자원이 풍부한 남양 정복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한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980년 딘 왕조로부터 전(前) 레 왕조로 이행하는 시기에 다이 비엣 왕국이 내분과 혼란에 휩싸이자 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륙 두 갈래로 공격을 단행하였다. 송은 전 레 왕조의 첫 황제로 추대된 레 호안의 기만적인 외교와 거짓항복에 속아 전쟁을 종결짓지 못하고 병사들도 무더위와 질병에 지쳐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자, 북쪽 국경 거란족의 위협을 핑계로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말았다.
미련이 남은 송은 무려 100여년이 지난 1075년 다시 다이 비엣(리 왕조)과 전쟁을 벌이지만 “베트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수의 한사람”인 리 트엉 끼엣의 선공, 지연작전, 심리전 등 다양한 전술에 밀려 20만명의 군사를 잃는 참패를 맛보고 물러났다.
불과 1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바익 당 전투로부터 시작된 중국과 베트남간의 전쟁은 차수를 거듭할수록 그 규모와 피해가 극심해졌다. 원(元, 몽골)과 쩐 왕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은 세차례에 걸쳐 무려 30년(1257~1288)간이나 이어졌다. 리 트엉 끼엣장군을 능가한다는 평가에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전략가 쩐 흥 다오장군은 350년 응오꾸옌이 쓴 것과 같은 책략으로 같은 바익 당강에서 30만 원군을 패퇴시킴으로 30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길고 긴 전쟁은 승리로 끝났으나 피해도 엄청났다.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도 탕 롱은 3번씩이나 함락되어 살육 약탈 파괴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매번 황제는 왕궁을 비우고 피신해야 했다. 쩐 왕조도 얼마나 전쟁이 지긋지긋했으면 원의 침략 기미가 보이거나 한차례 전쟁이 끝날 때마다 원에 사신을 보내 재물을 바치고 사과했다. 그래도 쩐 황제는 한번도 원의 요구에 응해 친조하거나 사신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맛본 가장 큰 치욕은 명(明)의 침공을 막지 못해 20년 동안(1407~1427) 명의 직접지배를 받은 일이다. 1403년 재위에 오른 영락제는 정화의 원정에서 베트남에 대해서만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게 베푼 혜택이나 관용을 보여주지 않았다. 왕위찬탈과 학정으로 정당성과 백성들의 인기를 잃은 호 왕조는 영락제가 보낸 20만명의 원정군 앞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명나라는 20년 동안 억압적인 권위주의 정치와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베트남인들을 복속시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레 러이라는 불세출의 영웅과 응우옌 짜이라는 베트남 최고의 애국시인이자 전략가가 이끈 10년간의 독립운동 앞에 1427년 무소불위 명도 철군을 하기에 이른다. 응우옌 짜이의 조언을 받은 레 러이장군이 귀국하는 명나라 군인들을 위해 다리와 도로를 수리하고, 배 500척을 내어 주며 지휘관들에게 술과 고기로 대접하고 선물까지 주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 자부심 강한 ‘민족’으로 거듭난 베트남인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명이 물러간 15세기 중반 이후 중국은 더 이상 베트남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족이 지배한 중국은 그러했다. 이후 명나라가 200년 더 존속했으니 최소한 명은 레 왕조는 물론이고, 남북을 분할해 베트남 전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찐씨와 응우옌씨 정권을 인정하면서 전반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프랑스 미국과의 전쟁도 민족형성에 영향
명이 물러간 이후 지난 500년 동안 베트남을 침공하거나 전쟁을 벌인 강대국은 청(淸) 프랑스 미국 세나라다. 청은 1788년 레 왕조 구원과 떠이 썬 반란 진압을 핑계로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안남 국경을 넘어 탕 롱에 입성했다. 그러나 청-떠이 썬 전쟁은 예상외로 싱겁게 3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 떠이 썬 반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응우옌 반 후에는 베트남인들의 영웅이다.
프랑스, 미국과 벌인 전쟁은 베트남이 현대 들어 서방국가들과 벌인 전쟁이라는 점에서 앞선 중국 전통왕조들과 벌인 전쟁과는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이 두 전쟁조차도, 아니면 이 두 전쟁이 가장 강력하게 베트남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베트남 쪽의 전쟁 당사자는 역대 왕조국가는 물론이고 떠이 썬과 같은 농민반란세력, 북베트남의 혁명정부, 남베트남의 인민해방전선 등 베트남 사회의 다양한 부문들이 망라돼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이 전 역사를 통해 외국과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아가 전쟁이 민족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베트남 역사 이야기는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