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제의 미 대선 톺아보기

트럼프의 미국, 해리스의 미국

2024-10-15 13:00:01 게재

세계의 이목이 미국 대선에 쏠리고 있다. 질문은 3개다. 누가 이기느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어떻게 해야 하느냐?

투표일이 3주 뒤로 다가왔지만 판세는 여전히 초박빙이다. 이렇게 되면 선거가 끝난 뒤에도 후유증이 심각할 수 있다. 법적 다툼뿐만 아니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심각한 미국 정치 양극화

미국 정치의 양극화는 심각하다. 미국 대통령은 50개주와 워싱턴D.C.를 포함한 51개 선거구의 투표로 결정된다. 51개 중 20개주는 2000년 이후 6번 대선에서 내리 공화당 후보만 찍었다. 16개주는 민주당만 지지했다. 한번이라도 지지 정당을 바꾼 주는 15개에 불과했다. 그중 8개는 최근 3회 연속 같은 정당에 표를 던졌다. 결국 이번에 지지 정당을 바꿀 가능성이 보이는 선거구는 단 7개의 경합주, 러스트벨트의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와 선벨트의 네바다 애리조나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체성 정치가 원인이다. 인종이나 종교가 정체성을 결정하면 타협이 안 된다. 지금 미국에서 정체성의 바탕은 인종이다. 피부 색깔은 바꿀 수 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의 90%는 백인이었다. 유색인종의 출산율이 높고 이민이 대거 들어오면서 백인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1990년 76%, 2023년에는 58%로 떨어졌고 금세기 중반에는 50% 아래로 내려갈 전망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백인이 누려온 영향력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긴장도가 올라가고 정치 폭력도 증가한다.

7월 13일 유세 현장에서 일어난 트럼프 암살 시도는 미국 정치폭력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정치폭력을 대하는 미국 사회의 태도가 더 우려스럽다. 시카고대 로버트 페이프(Robert Pape)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을 위해서는 정치폭력이 정당화된다”고 한 응답자가 7%나 됐고 “트럼프 당선을 막기 위해 정치폭력을 쓸 수 있다”고 한 사람이 10%에 이르렀다. 둘을 더하면 17%, 거의 5명 중 1명이 정치폭력을 받아들인다.

미국의 기존 질서 흔드는 트럼프

트럼프는 큰 흐름에서 미국의 변화를 상징한다. 키신저는 2018년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그 시대의 가식을 벗겨내는 인물일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한 시대’는 2차대전 후 미국이 주도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대를 말한다.

트럼프는 이 질서의 3대 축을 흔든다. 첫째, 자유무역을 거부한다. 자유무역협정에서 탈퇴하고 관세와 보조금을 무기로 사용했으며 세계무역기구(WTO)를 마비시켰다. 둘째, 자유민주주의를 절대시하지 않는다. 선거의 공정성에 시비를 걸고 결과에 승복하기를 거부한다. 셋째, 미국의 세계경찰 역할을 버리고 ‘공공재’로 제공해온 국제 안보에 값을 매긴다. 1980년 자유주의 질서를 ‘가식’이라면서 벗어 던지고 미국제일주의를 주창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국민의 지지를 업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시대정신을 읽어냈다. 트럼프는 소통의 달인이다. 10년 넘게 리얼리티쇼를 진행하면서 시청자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기술을 갈고 닦았다. 그러나 쇼맨십만으로 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을 수는 없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피해자들이 가진 분노에 올라탔다.

미국 중서부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은 세계화 이전에 미국의 풍요를 누리는 중산층의 일부였다. 그러나 세계화 과정에서 철강 자동차 등 미국이 자랑하던 제조업 일자리는 일본 한국 중국으로 넘어갔고 그나마 남은 곳에 저임금의 이민자들이 밀고 들어왔다. 백인 노동자들은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도 역차별로 느꼈다. 피폐해진 삶에 알코올과 마약이 파고들었다.

트럼프가 이들을 대변하고 나섰다.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 이민을 끌어들이고 중국 저가 공산품을 수입하고 세계경찰 노릇에 돈과 사람을 가져다 버리는 기득권층이 문제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싸우겠다. 이민을 막고 저가 공산품을 금지하고 ‘영원한 전쟁’을 끝내겠다.”

호소할 데 없던 사람들이 트럼프의 사이다 발언에 환호했다. 막말을 하고 불법행위가 있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반대 진영의 공격 수위가 높아질수록 트럼프 곁으로 더 몰려들었다. ‘우리를 위해 기득권과 싸우는 전사.’ 그것이 트럼프였다.

이번에 트럼프가 이기면 미국제일주의는 2016년 이후 12년을 이어간다. 재집권한 트럼프는 중국과의 전략경쟁을 중심에 두고 1기 때의 정책을 계속할 것이다. 대외공약과 개입을 축소하고 동맹국의 협력과 분담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무역 부문에서 급격한 관세인상이 있을 것이다. 트럼프 1기 때 무역대표를 지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지난해 5월 “트럼프가 이기면 우선 중국과 교역수지 균형을 맞추겠다”고 했다. 무역전쟁 재개는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해리스의 미국도 트럼프와 큰 차이 없어

해리스가 되더라도 트럼프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바이든이 취임 일성으로 “미국이 돌아왔다”고 했지만 무역과 산업정책에 관한 한 미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중 전략경쟁과 제조업 재건은 공화당과 민주당 공동의 목표가 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내놓은 ‘신산업주의(new industrialism)’와 해리스가 발표한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전진(new way forward for the middle class)’도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양쪽 모두 보호무역을 정당화하고 노동·환경 기준 강화를 내세운다. 트럼프가 관세를, 해리스가 세제 혜택을 주요 정책 수단으로 내세우는 정도가 차이점이다. 이민정책에서도 해리스는 트럼프 정책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이민 추방작전을 실시하겠다는 정도가 차이로 남아있다.

어쩌면 바이든은 2차대전 이후 80년을 지속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마지막 수호자로 기억될 수 있다. 올여름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보자. 오바마 8년 동안 NSC 안보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Ben Rhodes)는 “이제 규칙 기반 국제질서는 없다”고 썼다. 카네기재단 회장을 역임한 제시카 매튜스(Jessica T. Mattews)는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현실주의 중도 노선을 표방하는 월터 미드 예일대 교수는 “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무너졌다”고 썼다. 테러와의 전쟁을 추진한 콘돌리자 라이스조차 “이제는 개입할지 말지를 더 조심스럽게 따져야 하고 동맹국들은 방위 분담을 늘려야 하며 무역협정은 과거처럼 야심적이고 포괄적이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미국의 변화와 한국의 선택

미국은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지금의 미국은 10년, 20년 전 우리가 알던 미국과 다르다. 트럼프의 등장이 미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트럼프는 2016년 이후 양대 정치 산맥의 하나인 공화당을 뿌리째 바꾸어 놓았고 미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민주당도 변화를 비켜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은 트럼프의 미국이 익숙하지 않다. 현대 한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구축된 다음에 태어났고 그 안에서 정치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상수였다. 그러므로 트럼프의 미국제일주의는 우리 대외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

먼저, 한국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기회를 찾으려면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야 시대착오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 새로운 시대에도 한미동맹은 우리 외교의 근간으로 남는다. 단, 미국보다 한발 앞서려 하기보다 반걸음 뒤처지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목표와 수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다. 한국도 미국처럼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진영과 흑백논리다. 사고가 유연해야 한다.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