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집중투표제 도입 놓고 치열한 공방
최윤범 회장 “대표적 소액주주 보호” vs 영풍·MBK “경영권 분쟁 도구로 악용”
학계·주주연대·시민단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위해 이사 선임시 확대해야”
고려아연과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의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집중투표제 도입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해졌다. 23일 임시주주총회를 앞두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은 소수주주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집중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안건을 상정했다. 반면 영풍·MBK 측은 집중투표제도가 경영권 분쟁의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집중투표제 도입 시 영풍·MBK 측이 의결권 기준으로 과반에 가까운 지분을 보유하고도 이사회 과반을 장악하기 어려워질 수 있어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소수주주연대와 시민단체, 학계관계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이사 선임시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액주주도 캐스팅보트 역할 = 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의 집중투표제도 도입 여부가 오는 23일 고려아연 임시 주총의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지난달 23일 열린 이사회에서 “소액주주 권한 및 보호장치를 강화하고 이사회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확대하는 데 최우선 방점을 두고 심도 있는 검토를 진행했다”며 “집중투표를 도입하는 정관변경안과 집중투표 도입을 전제로 한 이사 선임 안건을 추가했다”고 밝혔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집중투표제도가 소수주주들의 의결권이 사표가 되지 않도록 하는 상법상 대표적인 소액주주 권리보호 방안으로 평가된다는 점을 고려해 이를 적극 수용한다는 입장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수주주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참여할 기회를 얻을 뿐 아니라, 기존 지배주주의 독점적인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집중투표제란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1주 당 이사 수만큼의 의결권을 주주에게 부여하고 이를 원하는 특정 후보에게 모아줄 수 있게 해 소액주주들도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제도다.
기존의 단순 투표 방식으로 이사를 선임할 경우 과반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의 의사에 따라 모든 이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크지만, 집중투표 방식을 이용하면 소수주주의 의결권을 집중해 이들이 추천한 이사를 선임함으로써 모든 이사가 대주주의 의사대로 선임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일례로 3명의 이사를 선출할 때 10주를 가진 주주는 30표의 투표권을 가지는데, 해당 주주는 30표를 특정 후보 1명에게 몰아줄 수 있다. 소수 주주여도 특정 후보에 의결권을 집중함으로써 대주주를 견제할 수 있다. 이렇게 소액주주들도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경영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높일 수 있다.
◆주주가치 제고 및 경영 투명성 강화 = 소액주주연대 플랫폼 헤이홀더 측은 고려아연의 주장을 지지하며, 집중투표제가 주주가치를 제고하고 경영 투명성을 강화할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헤이홀더는 홈페이지를 통해 소액주주연대 플랫폼 헤이홀더 측은 “고려아연의 이번 안건은 말이나 허울뿐이 아닌 제도(정관)의 변화로서 자본시장의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며 “집중투표제 카드는 매우 훌륭한 선택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가 공동 개최한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세미나에서도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이사 선임 시 집중투표제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개혁연구소 등 시민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집중투표제’가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며 의무화를 주장해 왔다.
재계의 반발로 실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는 기업들이 거의 없어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국회에서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2016년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담은 3개의 상법 개정안(김종인 의원안·채이배 의원안·노회찬 의원안 각각 대표발의)이 2016년 발의됐다. 이후 2020년 박용진 의원안으로 다시 발의했다. 하지만 재계의 거센 반대로 입법은 모두 무산됐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소수주주 권리 강화를 위해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상법 개정 작업이 추진 중이다. 현재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가 매년 상장사에 의무적으로 작성해 공시할 것을 요구하는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의 모범 규준에 ‘집중투표제 채택 여부’가 포함되어 있다.
◆표 대결에 영향 = 반면 영풍·MBK 측은 고려아연의 집중투표제 도입에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고려아연의 집중투표제가 소수주주를 위한 제도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며 “현재 1대·2대 주주가 약 80~90%의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수주주가 집중투표제를 통해 이사 선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영풍·MBK 측은 “최 회장이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는 소수주주의 권익 보호와 무관하다”고 지적했다. 한 관계자는 “최윤범 회장의 자리 연장을 위한 목적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고려아연과 영풍 측은 주주명부 확정일이었던 지난해 12월 20일을 기준으로 고려아연 주주명부에 등재된 주주들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설득 작업을 주총 직전까지 펼치고 있다.
현재 고려아연 지분 구도는 의결권 기준 MBK·영풍 연합이 46.7%이고, 최 회장 측이 39~40%로 추정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집중투표제 도입 여부에 따라 경영권 분쟁의 승자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집중투표제 도입 여부가 경영권 분쟁의 핵심 변수인 표 대결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