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은 아방가르드적 혁신이었다

2025-01-16 13:00:22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1)

필자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마치 동화 속의 파랑새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처럼 설렘도 컸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나 홀로 자유여행’이라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피카소 미로 달리 모네 르누아르 샤갈 고흐 클레 마그리트 등 거장들의 개별미술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미술관 산책은 필자에게 미술에 대해 광각으로 사유하고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었다. 필자는 유럽미술관 산책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미술을 예술로써 지각하고 인정받기 시작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미술, 모더니즘 미술, 그 이후의 현대 미술을 대상으로 거장들의 명작이야기를 필자의 프리즘으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최고의 비평가인 독자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미술에 대한 이해와 감상, 더 나아가 탐구에도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하였다.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으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다.

르네상스는 사전적으로 ‘다시(Re) 탄생(Naissance)한다’는 의미지만 그 문화사적 의미는 실로 위대하다. 중세 천년의 암흑시대에서 벗어난 부활이면서 찬란했던 그리스·로마문화의 재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린 것만은 아니었다. 마치 오늘날의 복고풍인 레트로(Retro)에 새로움(New)을 더한 뉴트로(Newtro) 에 비견될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새로움 이상의 혁신이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미술을 재발견한 르네상스 미술의 위대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점이 혁신적이었는가? 첫째는 신 중심의 중세미술에서 인간 중심의 미술로 전환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모방과 재현의 미술에 원근법 수학 기하학 해부학 등의 과학적인 접근방법을 활용했다는 점이며, 셋째는 미술이 예술로 인정받고 미술가는 예술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르네상스로부터 인간 중심의 미술이 정초되고 미술가의 존재가치가 인정받게 된 것이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미술 문예부흥 운동으로 발전

우리는 르네상스 미술이라 하면 보통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이들은 르네상스 전성기 미술의 3대 거장일 뿐이다. 천재적인 미술가였지만 이들이 르네상스 미술의 알파고 오메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미술은 200여년이라는 오랜 기간 전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애도', 파도바 스코로베니 성당(사진1)

즉 14세기 피렌체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으로는 15세기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초기 전성기 후기미술로 발전해 나갔으며 초기에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성기 이후는 로마, 베네치아, 북알프스 이북의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으로 확장되었다. 피렌체가 르네상스 미술의 아방가르드(전위)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발전양상은 시기와 지역적으로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피렌체는 중세 말기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대내외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았다. 시저가 세운 퇴역군인 도시로 출발한 피렌체는 로마 시대 건축물과 예술품이 많이 남아있어 시민들의 자부심이 강했으며 중세 이래 무역업과 금융업의 발달로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혁신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부유해진 상인들은 중세 후기의 고딕미술을 야만족인 고트족 문화로 치부하면서 영광스러운 로마문화의 부활을 열망했으며 평민 출신으로 피렌체의 지배권을 확립한 메디치 가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과 은행업으로 축적한 부에 대한 죄의식을 씻고 리더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구 10만의 피렌체는 창조적인 혁신도시로 변모해 갔다.

피렌체의 혁신적인 화가 조토와 천재 건축가, 브루넬레스키

필자는 지난해 7월 5일 피렌체에 도착해 우피치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두오모 오페라미술관, 피렌체 두오모 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등을 방문하며 르네상스 초기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15세기 중반 이전의 중세도시 피렌체도 다른 도시와의 경쟁을 위해 교회를 더 높게 크고 멋지게 짓느라 건축과 회화가 중심이 되었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두오모 성당)(사진3)

우선, 14세기 중세의 끝자락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은 거장 치마부에의 제자 조토(Giotto)였다. 그의 ‘그리스도의 애도’(사진1)는 미술사의 큰 획을 그었다. 측면과 후면에는 공간감을 만들어 회화에 배경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단축법 투시법과 명암 등을 사용해 2차원 평면에 입체감을 구현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인물 표정에서 읽히는 생생한 슬픔이었다. 이는 종교의 시녀 역할에 머물렀던 중세미술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혁신적 시도였다.

두번째는 오랜 기간 공사가 중단되었던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사진3과 같은 돔을 올린 천재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였다. 그는 로마로 건너가 세계 최초의 돔(석재) 신전인 판테온 등을 철저히 연구한 후 무려 16년에 걸쳐 ‘헤링본(herringbone, 청어 뼈 모양)’ 방식이라는 혁신적인 기술로 지름 45.5m의 8각형 돔(벽돌)을 성당 위로 올렸다. 153m 높이의 대성당 위에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봉긋이 솟아있는 돔은 한마디로 예술이었다. 또한 그는 실측을 통해 눈에서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먼 것은 작게 보이며 그 너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실점이 있다는 원근법을 최초로 입증했다.

두오모 대성당,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 관광과 르네상스 미술의 진수

두오모 대성당은 피렌체의 자부심이자 관광의 중심지다. 대성당 돔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남녀주인공의 약속장소로 유명해서 두오모 광장과 미켈란젤로 광장은 사진 찍는 관광객들로 늘 북적인다. 대성당 내부 역시 조토 부르넬레스키의 흉상 단체의 신곡 그림 42개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 등이 있어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이렇게 대성당 안팎을 둘러보면 르네상스 미술의 정수인 건축물과 조각 회화 장식미술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필자는 유럽에 가면 우선 구도심 광장부터 가볼 것을 권한다. 그곳에 가면 성당 교회 박물관 미술관 등이 몰려있어 관광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피렌체도 마찬가지다. 두오모 광장에 가면 근처에 대성당 산조바니 세례 당 조토의 종탑 메디치궁 아카데미미술관을 만날 수 있고 시뇨리아 광장에 가면 인근에 베키오궁 다비드상 베키오 다리 유럽의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이며 르네상스 미술작품이 가장 많은 우피치 미술관 등을 몰아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피렌체의 유명관광지도 다 보고 르네상스 초기 미술도 대부분 감상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다. 관광도 그렇지만 미술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플로렌스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사진2)

브루넬레스키 원근법을 실천한 화가, 마사초

세번째는 어릴 적에는 조토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기초를 닦고 후에 아버지뻘인 브루넬레스키로부터 원근법을 배운 마사초(Masaccio)다. 그의 프레스코화 ‘성 삼위일체’(사진2)는 이러한 성취를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 뒷면의 공간은 원근법을 적용해 마치 안쪽에 벽이 파인 듯한 입체감을 창출했다. 즉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을 구현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머리 양손 등에서 시작된 모든 선은 발 하단의 중앙 지점으로 이어져 소실점이 하나인 1점 투시법을 적용했다. 2, 3점이나 다초점 투시법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한 원근법이나 과학적 원근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조토가 자연주의적 원근법을 처음 시도했다면 마사초는 이를 과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이상미를 구현한 화가 보티첼리

마지막으로는 피렌체 출신으로 르네상스 전성기의 3대 거장에 비견되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Botticelli)다. 그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봄’ ‘동방박사의 예배’는 우피치 미술관이 자랑하는 명작이다. ‘비너스의 탄생’(사진4) 그림은 더 특별하다.

사랑과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거품이 이는 바다의 조개에서 탄생한 후 바람의 신인 제피로스가 인도하고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가 꽃(꽃의 도시, 피렌체의 상징)으로 덮인 외투를 건네는 장면은 단순한 신화의 재현을 넘어선다. 캐논(Canon)의 법칙에 따라 비너스의 신장이 8~9 등신이고 목과 팔은 지나치게 길어 비현실적이지만 이는 그리스·헬레니즘 미술과 모방자 양식을 따른 로마의 이상미를 재해석한 것이다. 더욱이 르네상스 최초의 누드화로서 짝다리 형태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는 에로틱한 감성마저 표현했다. 아직도 중세인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과감한 혁신이다.

‘비너스의 탄생, 1485', 우피치 미술관 소장(사진4)

이처럼 르네상스는 다른 유럽 도시보다 앞서 나간 혁신도시 피렌체에서 꽃을 피웠다. 르네상스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한 피렌체의 르네상스 초기 미술도 키워드는 혁신이었다. 이는 세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미술가들의 혁신적인 도전정신이다. 조토는 육안과 직관에 의한 접근으로 부르넬레스키 마사초 보티첼리는 과학적 접근으로 고전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둘째, 메디치 가문의 혁신적 리더십이다. 특히 코시모 메디치와 로렌초 메디치는 후원가 겸 수집가로서 미술가를 보호하고 도서관, 플라톤 아카데미 등을 설립해 예술과 과학의 결합이라는 ‘메디치 효과’를 창출하였다.

마지막으로 공모전을 통해 수주한 국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장인(artisan)이 아닌 예술가(artist)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피렌체에서 시작된 위대한 혁신의 물결은 천재 미술가와 거장들이 활약했던 전성기 미술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