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

9년간 1000여명 넘어 … 아동유기 조장 논란에도 ‘자진 철거’ 권유만

2018-06-27 11:10:57 게재

정부 ‘어정쩡’ 대처 속 경기도에도 한 곳 생겨

비밀출산 등 대안 필요

“불가피하게 키울 수 없는 아기를 유기하지 말고 아래 손잡이를 열고 놓아주세요.”

서울 관악구 난곡동 한 교회의 담벼락에 달린 손잡이 위에 쓰여 있는 말이다. 흔히 베이비박스로 불리는 이 곳은 형법상 범죄인 아동유기 행위를 유인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컸지만 2009년 설치된 이래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운영 10년째에 접어들었다. 관악구와 서울시는 ‘자체 철거를 권유하고 있다’면서도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교회 건물 내에 설치돼 있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어정쩡하게 대처하는 사이 전국에서 서울 관악구 한 곳밖에 없던 베이비박스가 4년 전 경기 지역에 하나 더 생겨났다. 2009년 이후 서울.경기 지역의 베이비박스에서 지자체로 인계된 아이들은 1173명이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 한 교회에 베이비박스가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인도주의냐 유기조장이냐 = 베이비박스 논란은 흔히 두 가지 입장으로 수렴된다. 일반인들 사이에선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심하면 살해됐을 수 있는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듬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시각이 많은 편이다. 간혹 언론에서도 베이비박스가 지난 9년여간 버려질 수 있었던 아이들을 1000여명 이상을 살려냈다며 ‘인도주의’적 시각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전문가들은 베이비박스가 없었더라면 그 아이들은 모두 길거리나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것이라는 것은 섣부른 주장일 뿐 베이비박스는 아동유기의 한 방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베이비박스를 찾아올 정도의 부모라면 베이비박스가 만약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동을 양육하고 보호해줄 다른 시설을 찾아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안전하다고 알려진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기 위해 오는 부모와 아이를 애초부터 길거리에 버리려고 하는 부모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적으로 관리되는 아이들 = 그렇다면 베이비박스와 기존의 다른 아동보호시설에 아이를 맡기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아동보호시설을 찾을 경우 아동은 그 즉시 공적인 체계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지만 베이비박스는 민간에서 법적 근거 없이 운영하는 시설이어서 공적인 체계에 편입되는 데 시차 또는 구멍이 생긴다.

베비비박스에 들어온 아동은 2011년부터 유기아동으로 신고절차를 거치도록 돼 있어 관할 경찰서와 구청을 거쳐 광역지자체로 인계된다. 서울시의 경우 서울시어린이병원에서 건강진단 후 보육원 등 아동복지시설로 아이들을 보낸다.

문제는 일부 아동은 신고나 지자체 인계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이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리는 부모는 교회측과 일정 시간 상담을 하는데 이 때 아이 부모가 아이를 다시 데려가겠다는 의지를 밝힐 경우 지자체 인계에서 빠지게 된다.

관악구 교회 관계자는 “상담 과정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을 때까지 봐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적 사정이 다양하다”면서 “일정 기간 교회에 맡겼다가 부모가 아이를 찾아가는 경우, 부모의 뜻에 따라 입양을 준비하기로 해 출생신고와 입양숙려제 등에 걸리는 시간 동안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경우 등은 구청에서 관리하는 베이비박스 통계에서 빠진다”고 밝혔다.

◆“출생신고시점도 아동복지시설장에게 맡겨져” = 실제로 중앙.지방정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베이비박스 아동 숫자와 베이비박스 운영 기관에서 밝힌 숫자는 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관악구 교회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는 모두 210명이었지만 관악구.서울시가 보건복지부에 보고한 숫자는 154명이었다.

통계치에서 빠진 아이들에 대해선 교회 내에서 자체 기록으로 남기기는 하지만 관악구나 서울시가 이 자료를 따로 관리하지는 않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통계치에서 빠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시에서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동인권 전문가인 이경은 국제엠네스티 사무처장은 “베이비박스 아동들은 일단 유기된 아이들이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아동보호체계 안에 즉시 흡수되어야 하는데 일부 아이들은 베이비박스 운영기관 내에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비판했다.

베이비박스 아이들이 지자체에 인계된 후에는 어떻게 될까. 일부 입양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보육원 등 관내 아동복지시설로 분산된다. 아동복지시설로 간 후에야 아이들은 출생신고 대상이 되는데 출생신고 시점은 아동양육시설장에게 맡겨져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되도록 빨리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마무리하도록 양육시설 기관장들에게 권고하고 있다”면서도 “출생신고 시점은 양육시설장이 판단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무처장은 “출생신고를 사적인 주체의 의사에 맡겨 놓는 것은 명백하게 국제적인 인권규범에 반하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베이비박스 합법화될까 = ‘그나마 안전한 아동유기 방법’이라는 베이비박스 옹호론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현재 상태로는 아동 권리 측면에서 숭숭 구멍이 나 있는 만큼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학계에서 해법으로 제시해온 ‘비밀출산’ 제도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비밀출산 제도가 도입되면 성폭행, 혼외출산,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임신이나 출산 사실을 감추고 싶은 산모는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아기를 출산해 가명으로 자녀 출생등록을 할 수 있다.

지난 2월 오신환 국회의원이 ‘임산부 지원 확대와 비밀 출산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면서 제도 도입 가능성이 처음으로 열렸다. 이 법에는 베이비박스를 합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논란이 많아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출생 즉시 등록하는 ‘보편적 출생신고제’가 도입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비밀출산을 도입하면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 베이비박스 합법화시 아동유기가 더 조장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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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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